<팬픽 동화> 누비 갑옷을 입은 용사와 푸른 악마 팬아트&캘리

대상작품: 흐린 진눈깨비 속에서 (작가: 옆집알파카, 작품정보)
리뷰어: 하얀소나기, 2일전, 조회 15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은 친구들에게.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 나의 자매들에게.

아래 내용은 작자미상의 동화를 ‘나기사 소라스키(Nagisa Sorhaschi)’의 이름으로 옮겼다는 것을 미리 말해둘게.

어릴 적에 읽었던 이야기와 다를 수밖에 없을 거야. 이미 그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으니까.


 

모두 이 재난의 원흉을 ‘악마’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썩 와닿는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이 소년에게는 그렇습니다. ‘악마’가 숨어 있다는 동굴 깊숙이 몸을 밀어 넣는 와중에도 그 단어를 의아한 듯 곱씹어봤다는 것이 분명하죠.

 

다들 ‘악마’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관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죠? 그저 겁주기만을 위해 무작정 머리 위로 자라난 뿔이 두 자루, 독사가 헤엄치는 듯 날름날름 움직이는 혓바닥, 어쩌면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무시무시한 눈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게 웬일이죠? 악마의 은신처를 기습한 소년이 마주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어린아이였습니다. 심지어 여자아이였죠.

 

“설마…… 네가 마을에서 말하는 ‘푸른 악마’야?”

 

소년이 반신반의하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녀…… 아니, 악마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죠.

 

“나를 찾아온 게 분명하구나? 너희 마을에서 부르는 ‘푸른 악마’를 찾아왔다면 기꺼이 환영해줄게!”

 

소녀 목소리가 쨍하니 울렸습니다. 말끝마다 느낌표가 붙는 듯한 어투에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죠.

 

가만 보니, 활기가 폭발하는 목소리에 비해 용모는 비루했습니다. 홀쭉하니 마르고 작은 몸집의 외모였지만, 어깨를 좁히지 않는 자신감 때문인지 기가 약해보이진 않았습니다. 짧은 단발은 끝이 고르지 못 했지만, 그 어디에도 새까만 뿔은 보이지 않았죠.

 

다만 용모가 평범했냐고요? 그건 아니었습니다. 소년은 그녀가 왜 ‘푸른 악마’라고 불리는지 단번에 깨달았습니다.

 

말 그대로였습니다. 공기 위로 노출된 살갗이 빠짐없이 푸른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죠. 얼굴도, 팔도, 다리도 전부 피멍처럼 파랗게 물들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녀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내 외모에 놀란 모양이구나?”

 

악마가 키들키들 웃었습니다.

 

“이해한단다, 소년……. 내 손에 죽어간 너의 형제자매들도 똑같은 눈빛으로 날 봤으니까. 개중에는 날 무시하는 눈빛도 있었지. 내 손짓 한 번에 목이 달아나기 전까지 말이야.”

 

소년은 흠칫 숨을 삼키며 목검을 바로 세웠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마을의 피 절반을 집어삼킨 악마는 이 ‘푸른 소녀’입니다. 소년은 이 악마를 쓰러뜨리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왔습니다. 직접 마당에 있는 고목을 베어내 목검을 깎았고, 천을 꿰매고 헝겊을 채워 갑옷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푸른 악마’를 쓰러뜨리고 마을을 구하기 위해서요.

 

“너도 그 마을 얼간이들과 똑같구나?”

 

칼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악마는 그 작은 떨림을 놓치지 않고 눈꼬리를 찢었죠.

 

“겁먹을 거 없어. 네가 마음먹고 칼을 휘두르자면 채 3초도 걸리지 않을 거야. 우리 악마들은 인간들의 용기를 치하해왔지. 나도 그런 어른들을 본받아서 기회를 줄까 해.”

“기, 기회라니?”

“단 한 번이야. 그 칼을 내게 휘두를 수 있도록 기다려줄게. 다만 칼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내 자비는 끝나는 거야. 어때?”

 

그러더니 동굴에 뭉툭하게 깎인 석순에 몸을 기대며 여유를 부리기 시작했죠. 정말 자신을 베어가라는 말인가? 아니, 악마들을 교활합니다. 소년도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아마 칼이 악마의 목덜미를 치기 전에, 제 목이 떨어지리란 것을 모를 수가 없겠죠.

 

칼을 휘둘러야합니다. 하지만 몸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늪에 빠지기라도 한 듯 팔다리가 무거워 옴짝달싹도 못 한 채 악마 앞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죠.

 

정적이 밑도 끝도 없이 길어졌습니다. 이 침묵을 깬 건 악마의 한숨소리였죠.

 

“어떻게 너 같은 꼬마를 보낼 수 있지? 마을에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남정네들이 그렇게 없나? 아, 내가 다 죽였구나…….”

 

소년은 기가 꺾였는지 고개를 더욱 푹 수그렸습니다.

 

“…… 좋아. 용감한 소년에게 이 악마가 자비를 베풀어줄게.”

“자, 자비라니?”

 

악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악마들은 피를 좋아하지 않아. 비록 인간을 개미 찌부러뜨리는 것보다 쉽게 죽일 수 있는 나라도 마찬가지야. 그날도 내 파란 얼굴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서 어쩔 수 없던 것 뿐이야. 어쩔 수 없던 것치고 너무 많이 죽인 거 아니냐고?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을 어쩌겠어? 나도 소란을 피우고 난감하던 참이야. 이쯤 되었으니, 그만 마을을 떠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

 

정말? 소년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악마는 의기양양해져서 고개를 끄덕였죠.

 

“물론 맨입으로 떠날 수는 없지.”

“난 돈 없어.”

“난 돈이야 차고 넘쳐. 난 무시무시한 악마니까.”

“그럼 무시무시한 악마들은 뭘 원하는데?”

“이 마을을 떠나면 얼마나 걸어야할지 몰라. 금방 배가 고프지 않겠니? 당장 마을로 가서 음식을 가져 와. 푸른 꽃게로 끓인 그라탕과, 푸른 양배추로 만든 샐러드, 그리고 복숭아 즙에 졸인 코끼리 귀를 구해 오도록 해.”

 

그게 다야? 소년은 조금 주저하며 되물었습니다.

 

“정말 식사만 끝나면 마을을 떠나줄 거야?”

“영영 떠난다는 말은 아니야.”

“그럼?”

“너 같은 머슴애들은 다 똑같아. 멋진 용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거 아니야?”

 

악마는 손가락 다섯 개를 쭉 펴며 말했습니다.

 

“딱 50년이야. 식사를 마치면 50년 동안 이 마을을 떠나 있을게. 그럼 넌 마을로 돌아가서 소리치면 돼 ‘마을사람들! 제가 푸른악마를 물리쳤어요! 제가 이 칼로 그 악마의 얼굴을 반으로 쪼개줬죠!’ 그럼 마을 사람들은 널 칭송하고 용사로 인정해줄 거야. 네가 바라던 ‘진짜’ 용사가 되는 거지.”

 

뭐라고? 소년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건 용사가 아니야! 거짓말쟁이야!”

“거짓말이면 어때?”

“뭐?”

“말했잖아. 50년 동안 이 마을을 떠나 있겠다고.”

 

악마는 ‘50년’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습니다.

 

“인간들에게 50년은 수명이 다 하는 시간이지만, 우리 악마들에게 50년은 촛불을 불어 끄는 찰나의 순간밖에 안 되거든. 넌 죽을 때까지 용사로서 칭호를 누릴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마을에 동상이 세워질지도 모르지. 너를 주인공으로 한 노래가 마을 곳곳에서 울려도 모르는 일이야.”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꿈에 바라던 용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소년은 조금씩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그…… 푸른 꽃게를 끓인 그라탕과 복숭아 즙에 졸인 코끼리 귀면 되는 거야?”

“하나 빼먹었어. 푸른 양배추로 만든 샐러드 말이야.”

“푸른 양배추?”

“그래! 반드시 양배추여야 해! 내 파란 피부는 모두 양배추를 먹고 물들인 거라고!”

“아, 알았어…….”

 

소년은 머뭇머뭇 대답을 하더니, 본인이 걸어왔던 동굴을 다시 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터덜터덜 흔들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푸른 악마는 키들키들 웃고만 있었죠.

 

“남자들은 다 똑같아. 눈앞의 꿈을 좇는 데 빠져 아무것도 못 보는 장님이 되버리고 말지. 저 꼬마의 동상이 세워진다면 재밌겠는걸? 50년 뒤에 두고 보자고. 그 동상을 발로 차주고, 마을 사람들의 피로 목욕을 시켜줄 테니까.”

 

웃는 것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배를 달래며 소년을 기다리던 악마는 조금씩 입술을 비틀었죠. 하루, 이틀, 사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소년이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왜 이렇게 안 돌아오는 거지? 혹시 양배추를 구하지 못 한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양배추 키울 마당 한 뼘 정도는 남겨둘 걸 그랬어. 불장난은 힘 조절이 어렵단 말이야.”

 

그때였습니다. 동굴 저편에서 무언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솜이 삐져나온 누비갑옷이 얼굴을 가리고, 끝이 뭉툭한 목검이 허리춤에서 덜렁거렸죠. 틀림없는 소년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악마를 기다리게 할 셈이야?”

 

악마는 꼬륵꼬륵 울리는 소리를 참기 위해 배를 힘껏 움켜잡아야 했죠. 소년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두 손이 텅 비어 있던 것이죠.

 

“뭐야? 푸른 꽃게를 끓인 그라탕과 복숭아 즙에 졸인 코끼리 귀는 어디 있는데?”

 

소년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습니다.

 

“아, 아무래도 그 부탁은 어려울 거 같아.”

“어째서?”

“나는 겨우 남자아이야. 내가 악마를 해치웠다고 한들 누가 믿겠어?”

“그래서 어쩌자고? 기어코 나랑 붙어보겠다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소년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습니다. 영락없이 겁에 질린 모습이었죠.

 

사실 간단한 일입니다. 지금 악마가 손가락만 튕긴다면 이런 애송이야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겠죠. 하지만 지금은 배가 고픕니다. 푸른 꽃게를 끓인 그라탕과 복숭아 즙에 졸인 코끼리 귀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죠. 양배추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 알았으니까 고개 들어. 악마를 쓰러뜨렸다는 증거가 필요하다는 거지?”

 

악마는 마지못해 손가락을 튕겼습니다. 그러자 툭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언가 떨어졌습니다. 그건 ‘뿔’이었습니다. 속이 채워진 피리처럼 생긴 녀석이었죠.

 

“이걸 가져가서 마을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해. 아무리 의심이 많아도, 네가 악마를 죽이고 뿔을 베어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테니까.”

 

악마는 소년이 뿔을 주워드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해서 숨을 내쉬었습니다. 동굴을 걸어 나가는 소년의 뒤로 한바탕 소리를 질러줬죠.

 

“늦기 전에 푸른 꽃게를 끓인 그라탕과 복숭아 즙에 졸인 코끼리 귀를 가져오도록 해! 양배추를 잊어버리면 화낼 거야! 알았지?”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바람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 날이었죠. 다시 소년이 찾아왔습니다. 역시 두 손이 비어 있었습니다. 얼굴을 두껍게 가린 누비 갑옷과, 조잡하게 깎아낸 목검이 전부였죠. 악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물었습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날 굶겨서 죽일 셈이야? 하지만 네가 바라는 대로 되진 않을 거야. 나 같은 악마는 최소 수십 년 동안 뱃속을 비워둘 수 있거든. 힘이 약해지기는커녕 굶주린 사자처럼 난폭해지는 걸 보게 될 거야.”

 

소년은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잠깐이었죠. 기어코 허리춤에 걸려 있던 목검을 뽑아들었습니다. 악마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눈을 가늘게 찢으며 말했습니다.

 

“응? 지금 칼을 뽑아 든 건 무슨 의미야? 실수했다는 기분이 든다면 용서할 수도 있어. 그 칼을 거두고 고개를 조아릴 수 있도록 10초만 기다려줄게. 하나, 둘…….”

 

하지만 숫자를 다 셀 때까지도, 소년은 목검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악마가 의아해하는 그때였어요. 소년이 더듬더듬 떨림을 뱉어내기 시작했죠.

 

“…… 코끼리 귀를 복숭아에 졸이면서 생각해봤어. 나는 어떤 ‘용사’가 되고 싶었는지. 그랬더니 자괴감이 가슴을 물어뜯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눈물이 떨어졌어. 내가 되고 싶었던 용사는 악마를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는 용사였어. 악마와 손을 잡고 코끼리 귀를 요리하는 용사가 아니었다고.”

 

떨림이 멎었습니다. 칼끝은 명확히 눈앞의 악마를 향하고 있었죠. 그제야 악마도 그 목검에 실린 각오의 의미를 알게 됐죠.

 

“좋아, 거래는 여기서 끝이야. 먼저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다만 그 칼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모든 게 끝날 거야. 그래도 좋다면 어서 시작하도록 해. 작고 어리석은 용사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년이 달려들었습니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유약한 비명이 허공을 이리저리 찢어발겼죠. 목검이 크게 허공을 갈랐습니다. 그리고…….

 

툭!

 

…… 모든 게 끝났습니다. 목검을 쥔 손이 스르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미 소년의 머리는 바닥을 구르고 있었죠. 곧 주인을 잃은 몸뚱이가 뒤로 고꾸라졌고, 철퍽 핏물이 튀었습니다. 잠시 뒤, 동굴에는 물이 빠진 듯한 고요가 흐르기 시작했죠.

 

“바보 같아…….”

 

악마는 욕지거리를 질겅이며 다가갔습니다. 누비 갑옷을 뒤집어쓴 머리가 바닥을 굴러다녔죠. 목검은 힘이 풀린 손아귀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일찍이 알았지만, 용모가 볼품없었습니다. 목검은 조잡하게 깎아낸 탓에 날이 전혀 서지 않았고, 누비 갑옷은 이미 실밥이 터져 솜이 삐져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장인의 솜씨는 아닙니다. 설마 이 소년이 직접 칼을 깎고, 갑옷을 꿰맸다는 말인가요?

 

악마는 조용히 입술을 비틀었습니다. 몸집이 작은 소년이 발치에 죽어 있습니다. 이미 주워 담을 수 없을 만큼 피를 흘린 참이었죠. 이런 작은 소년이 직접 나무를 깎아 검을 만들고, 집안의 솜을 긁어모아 갑옷을 꿰매는 장면을 상상해봤나요? 지금 푸른 악마의 머릿속에는 그 장면이 고스란히 그려지는 듯합니다. 마치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말이죠.

 

아무리 악마라도 알 수밖에 없겠죠. 이 어린 소년이 푸른 양배추 샐러드 대신 목검을 들이 댄 이유가 있다면, 분명 용사가 얻을 수 있는 명예와 조금 다른 곳에 있을 거라는 사실을.

 

“…… 어쩔 수 없네. 이 몸이 다시 기회를 줄게. 진짜 ‘용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얼마 뒤였습니다. 마을에 누비 갑옷을 입은 용사가 찾아왔습니다. 그 작은 용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검을 하늘 위로 치켜들며 소리쳤죠.

 

“마을사람들 걱정 마세요! 이제 푸른 악마는 저 동굴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못 해도 50년 동안 이 마을은 평화로울 거예요!”

 

곧 사방에서 환호가 쏟아졌습니다. 꽃을 던지는 아낙네들과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소녀들이 용사를 반겼죠.

 

하지만 용사는 환호를 등에 업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목검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겠다는 다짐에 가까운 말이 전부였죠.

 

아참! 누비 갑옷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틈새로 보인 목덜미가 양배추처럼 파란색이었다는 건 비밀입니다.

 

어찌되었든 마을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관습적인 표현이지만 이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군요. 사람들은 다시 활기를 찾았고, 웃는 법을 알았으며, 양배추 농사는 풍년을 맞았습니다. 마을 최고 인기식당 ‘미소짓는 여우’가 더 이상 복숭아 즙에 졸인 코끼리 귀 요리를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지만요. 지금도 그 마을에서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구절을 들려준다고 하더군요.

 

“…… 네 머리카락이 회색인 건 아무 상관없단다. 네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여자아이라도 문제가 없지.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명심하렴. 누비 갑옷에 목검 한 자루면 충분할 테니까.”

 

 

*

*

*

 

 

고백한다. 이 동화를 내 손으로 다시 써보겠다는 생각이야,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성을 보고 느끼는 감정처럼 충동에 가까웠다.

 

그날은 평소처럼 어수선한 저녁이었고, ‘미소짓는 여우’에서 식사를 기다리며 숨을 고르는 한 때였다. 테이블을 나눠 쓰던 멜리사가 대뜸 말을 꺼냈다. 그녀는 정말 사소한 질문을 예고도 없이 꺼내는 재주가 있었다. 아마 대화 흐름이 이렇지 않았을까?

 

“이 봐, 나기사……. 어릴 적에 읽던 동화 이름 기억 나?”

“동화라니?”

“그냥 떠올랐어. 모험에 관한 이야기였거든.”

“가여운 멜리사……. 그 시절 동화들 대부분이 모험을 떠나는 꼬마 이야기였다는 걸 잊었구나.”

 

멜리사도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동화가 유독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시절 동화에서 느낄 수 없는 아릿한 향내가 가득했거든. 분명 어린 소년이 용사가 되는 이야기였는데…….”

 

대답은 바로 옆 테이블에서 튀어나왔다.

 

“…… 푸른 악마 아닌가요?”

 

우리는 동시에 옆 테이블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하늘을 불태우는 노을처럼 시선을 사로잡았고, 굽히지도 꺾이지도 않을 것 같은 강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망토를 두르고 칼을 찬 꼴이 왕국소속의 기사라는 추측은 들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우리가 어안이 벙벙한 사이, 그녀는 목소리가 묻힐까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대화를 엿들어서 불쾌했다면 사과할게요. 귀가 밝고 눈이 맑은 것 외에 장점이 없거든요. 하지만 제목을 알 것 같아서요. ‘누비 갑옷을 입은 용사와 푸른 악마’ 맞죠?”

 

가게가 제법 어수선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선이 분명한 화살처럼 깨끗하게 솟아올랐다. 자신 있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그 여기사를 훑는 사이, 나와 멜리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맞아요! 바로 그런 제목이었죠!”

 

‘누비 갑옷을 입은 용자와 푸른 악마’ 요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 제목이 낯설 리가 드물었다. 무심코 누군가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 기억 나?’라고 물으면 한 번쯤은 언급될 법한 동화였으니까.

 

다만 그 내용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건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책들이 소실되어 그 원고가 남아 있지 않은 지금은 더욱 그랬다. 막연하게 ‘누비 갑옷을 입은 용사가 여행을 떠나는 결말이었지?’라며 적당한 여운을 되새김질 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이 시대에 이야기가 소실 되는 과정은 무척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단순히 오래되어서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읽었다고 자부하는 이야기가 그 내용조차 모호해졌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이유야말로 내가 펜을 들게 만드는 가장 큰 동기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를 복구하는 작업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아련한 감정을 자극했다. 하지만 모두의 추억 속에 결말만 밑그림처럼 남아 있는 동화를 복구하는 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창작이었다. 푸른 악마가 소녀라는 것도, 양배추를 미끼로 거래를 던진 일도, 소년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최후(멜리사가 원고를 보고 말했지. “네 뒷골목 같은 취향을 동화에 곁들이지 말아줄래?”), 조금 어색한 교훈까지…….

 

하지만 창작을 곁들이겠다면 어설프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악마가 소년에게 동정을 느끼는 과정이 모호하다고 느꼈다면 변명이 따로 없다. 초고에서 결말이 조금 달랐던 걸로 기억한다. 악마가 소년의 갑옷을 벗기고 그의 머리카락이 ‘회색’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소년의 정체가 ‘재의 아이’라는 것을 깨달은 악마가, 소년이 그토록 용사로서의 인정을 갈망했던 이유를 깨닫는 장치로 만들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 안은 당분간 머릿속에 구겨넣기로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재의 아이’가 당했던 취급을 생각하며 쓴맛을 삼킨 것이 첫 번째였고, 현재 왕국 내에서 떠도는 소문이 두 번째였다. ‘재의 아이’가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고 이곳까지 도망쳐왔다는 소문이 파다한 지금, 그들에게 동정을 가지는 악마를 동화에 등장시킨다고? 미안하지만 난 그 정도로 용감한 여자가 아니다. 내가 그들을 차별하거나, 루덴도르프의 이름을 가진 대마법사가 이뤄낸 혁명의 결과물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난 검은 머리를 가진 일개 아녀자가 아닌가. 모험을 갈망하는 용사의 이야기가 동화 속에 머무르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현재 이 동화에는 ‘나기사 소라스키(Nagisa Sorhaschi)’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안타깝지만 원본 동화작가의 이름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이 동화를 다시 세상에 꺼낼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왕궁의 여기사에게는 심심한 안부를 전해야겠지. 분명 그 여기사 이름이…….

 

…… 내 정신 좀 봐. 가게에서 이름을 묻지 못 했네.

 

빨간 종달새를 닮은 여기사님께 여쭤볼게. 혹시 오늘은 만날 수 있을까? 괜찮다면 당신이 즐겨먹는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려볼게. 우리가 사랑하는 식당 ‘미소짓는 여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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