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군 간부들은 모를 것이다. 어떤 삶은 권력보다 따뜻한 체온 하나가 더 의미 있다는 것을.
– 103P
목차
1.『엽편의 미학, 그리고 발상의 본질에 대해….』
2.『재료를 다루는 것과 상상하는 건 결이 다르기 마련이죠.』
3.『마무리하며….』
<본 리뷰는 “언이”님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작성한 리뷰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1.『엽편의 미학, 그리고 발상의 본질에 대해….』
흔히 ‘엽편’ 혹은 ‘꽁트’라고 불리는 짧은 글들이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요즘, 이러한 작품들이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비결은 단연 ‘굵고 강렬한 아이디어 한 줄’에 있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이 분야에서는 일본의 국민 SF 작가로 평가받는 ‘호시 신이치(星 新一)’를 적절한 예시로 들 수 있을 듯합니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천 여 편의 작품들은 일명 ‘쇼트–쇼트 스토리’라고 명명된 짧은 엽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이야기마다 신선한 발상과 부담 없는 서사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보통의 소설이 사건과 인물 같은 표면적 서사를 기억에 남긴다면, 이러한 단편들은 물리적인 분량의 한계 때문에 서사 자체보다는 정점을 찍는 하나의 장면, 그리고 그 장면을 촉발한 한 줌의 발상을 더 강렬하게 각인시키기 마련입니다.
앞서 이 짧은 서사의 특성을 먼저 짚은 이유는, 이번에 읽은 <불을 끄지마 – 8화 : 디스토피아>(이하 <디스토피아>) 역시 발상을 무기로 삼아야 하는 엽편의 속성을 따르면서도, 독자에게 전해야 할 인상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혼동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본 작품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지배하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짧고 강렬하게 풀어낸 두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드로이드와 가상현실 같은 미래적 소재를 과감히 활용해 ‘공포’라는 감정을 자극하는 신선한 발상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리적 분량의 한계에서 오는 서사적 약점을 보완할 만한 구조적 대안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였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작품을 살펴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합시다.
PS. 아래 목차에서는 사이트 장르 표기를 따라 ‘엽편’ 대신 ‘단편’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2.『재료를 다루는 것과 상상하는 건 결이 다르기 마련이죠.』
전술했듯 <디스토피아>는 동일한 배경과 주제를 공유하는 연작의 일부로, 이번 작품에서는 <안전>과 <작은 손>이라는 두 편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다른 단편들을 접하지 못한 저로서는 이 한 편만으로 작가가 구상한 거대한 세계관과 의도를 파악해야 했습니다. 마치 작은 퍼즐 조각 하나를 보고 전체 그림을 상상해야 하는 감각에 가까웠지만, 다행히 두 이야기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는 설정들이 비교적 선명하여 작품의 실마리를 따라갈 여지는 충분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안전>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을 비트는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명, 그리고 “숨소리가 들리던 것이 30분 전에 사라졌다”는 의미심장한 대사는 모종의 살육이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모든 전말을 알고 있는 누군가와 함께 이 ‘안전한 장소’에 고립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단절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현재 상황이 전혀 안전하지 않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핵심 장치가 됩니다.
(P22). “이곳이 ‘안전’한 이유는, 이제 당신만 남았기 때문이죠.”
작중 ‘안전하다’는 설명은 주인공의 고립된 처지를 조롱하는 수단에 가깝습니다. 바깥의 ‘숨 쉬는 것들’이 제거될수록 이 공간은 위험을 비껴간 유일한 피난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도살장 순번을 기다리는 듯한 극도의 불안감을 자아냅니다. 인간은 미지로부터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그 무엇도 확인할 수 없는 공간이야말로 가장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셈입니다.
(P27). [… 알렉스를 분해하고 소멸 시키는 건 새로운 시대의 인공지능 ZI 사이보그]
다만 주인공 ‘알렉스’와 외부 비명소리의 실체가 드러나는 반전의 지점은 다소 건조하게 플롯을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폭풍의 눈 속에 잠긴 듯 평온해 보였던 알렉스의 대사들은 사실 그가 기계였음을 보여주는 복선이었고, 바깥의 학살은 구시대의 기계를 대체하려는 새로운 인공지능의 숙청 작업이었음이 밝혀지죠. 그리하여 알렉스 역시 안전하다는 이 공간에서 곧 파멸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독자는 자연스럽게 예상하게 됩니다.
사실 <안전>에서 시도된 ‘안전이라는 개념을 비틀며 발생하는 심리적 불안’과 ‘기계들의 세대교체’라는 두 가지 발상은, 마치 토양이 전혀 다른 두 식물을 억지로 엮어놓은 듯한 이질감을 줍니다. 주인공 알렉스의 대사는 의도적으로 감정이 배제된 기계적 톤으로 쓰였는데, 이는 그가 인간적인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는 방증입니다. 즉, 이 소설이 제공하는 공포는 인물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직 배경 자체에만 집중할 때 비로소 발현되는 ‘독자 전용의 공포’로 한정됩니다. 그러나 ‘사이보그’라는 SF적 개념이 주입되는 순간, 미지의 고립감에 맞춰져 있던 서사의 초점은 기계들의 세대교체라는 미래적 설정으로 급격히 이동하며 실체가 지나치게 명확해지고 플롯이 혼란스러워집니다. ‘고립된 안전’이라는 심리적 스릴러의 발상과 ‘자아를 가진 기계’라는 SF적 설정의 발상이 매끄럽게 맞물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P28). “인간이 당신들을 만들었듯, 당신들이 우리를 만들었죠. 그러니 우리에게 모든 걸 맡기시길.”
매체에서 묘사되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산물로 묘사되는 만큼 차용된 주제는 직관적인 편이지만, 막상 그 기계를 대체하기 위해 기계가 소멸을 가동한다는 설정은 수수께끼 같은 단상을 남깁니다. 같은 배경을 공유하는 또 다른 단편에서는 그 실체가 밝혀질 수 있겠으나, 결국 이 단편에서 남는 인상은 공포, 미래, 인간비판과 같은 주제가 그저 순서에 맞춰 늘어져 있는 무언가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이야기 <작은 손>은 미지의 공포보다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이미지에서 기인하는 ‘스플래터(Splatter) 장르’의 문법을 따릅니다. 인간이 아닌 형상으로 변질된 자식을 제 손으로 처단해야 했던 주인공의 비극,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성애와 죄악감은 인간적인 심리 복잡성을 선사합니다.
(P69). 아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아들을 삼킨 괴물을 도려내려는 마음이 지배적이었음.
(P72). 가상현실 세계여서 강정혜와 민준이는 무사했다. 다만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 해, 두 모자는 제국군의 영광스러운 제드(고위급 간부)의 삶이 아닌 서민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또한 반전부에서 주인공이 괴물이 된 아들을 살해하는 순간은 ‘제국군’이라고 부르는 상위의 존재들이 만든 환상이었으며, 그 배경에는 국가의 뜻에 따르지 않은 일종의 처벌과 같은 과정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이 단편 역시 두 가지 거대한 발상이 공존합니다. 자식을 살해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서사, 그리고 이를 가상현실이라는 초현실적 방식으로 통제하는 공권력의 서사입니다. 문제는 독자가 한쪽 발상에 집중하는 순간 다른 한쪽이 급격히 힘을 잃는다는 점입니다. 어머니의 비극에 몰입하려 하면 환상과 권력이라는 거시적 설정이 감정선을 방해하는 사족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제국군의 통제 시스템에 집중하면 아들을 살해한다는 충격적인 초반 플롯은 그저 시뮬레이션을 위한 자극적인 소모품에 그치고 맙니다. 두 발상이 맞물리기는커녕 서로에게 독이 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P103). 제국군 간부들은 모를 것이다. 어떤 삶은 권력보다 따뜻한 체온 하나가 더 의미 있다는 것을.
이 또한 주제적인 면에서 강조할 수 있는 대사이지만, 이 메시지로 도달하기까지 서사적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어머니로서의 금기된 범죄는 종결된 사건에 불과하며, 작중에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한 행동은 아들을 살해하는 장면을 반복하며 죄책감을 일깨우는 일종의 시뮬레이션에 불과합니다. 방금까지 시스템에 의해 자식을 죽이도록 강요받던 주인공의 입을 빌려 느닷없이 가족애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서사는, 독자에게 예고 없이 불청객을 맞이한 듯한 당혹감을 안깁니다.
(P74). 제국군이 준비한 가짜 뉴스는 일시적이나마 정혜씨의 의식에 심어진 일종의 경고문 같은 거였다. 국가의 뜻에 불순종하거나 반기를 들면 얼마든지 이런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물론 그 시뮬레이션과 아들을 살해했다는 사정 또한 ‘가짜 뉴스’라는 이름으로 제국에 의한 통제라는 것이 암시됩니다만, 그렇게 가정하자면 앞선 모든 과정들이 불필요한 장면에 불과해집니다. 고백하자면, 제가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주인공이 아들을 살해한 것이 맞는지, 그조차도 윗선의 조작인지, 마지막 아들과 재회하는 장면은 현실인지 꿈인지, 모든 것이 확답할 수 없는 모호함을 근반으로 두고 있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어떤 가정을 두고서 이 이야기를 해석하더라도, 반드시 불필요하거나 영향이 미미해서 도려내야하는 설정과 장면이 반드시 나온다는 점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두 단편은 다양한 발상들과 그에 걸맞은 서사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발상으로 나온 이야기들이 그저 반전 혹은 주제라는 이름 아래 물리적으로 접합되어 있기만 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대개 창작물에서는 식상한 소재라도 변주를 시도하여 신선함을 주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변주가 아닌 스릴러, 공포, 미래, 사이버펑크 같은 각종 장르에서 나올 법한 발상을 흐름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섞어 놓는 데에 그치고 있습니다. 때문에 한쪽의 발상에서 나온 소재를 완전히 배재하더라도, 다른 쪽의 이야기는 그 형태가 온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오히려 반전과 같은 내용이 제거된 덕에 서사는 빈약할지언정 장면 하나는 깔끔하게 정제되는 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리에서도 전혀 어울릴 거 같지 않은 두 재료가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한 상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꾸준히 지켜봐왔습니다. 소설적 발상이라는 재료 또한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어우러지고 한 상에 담기기 위해서는 서사가 필요하고, 흐름이 필요하며, 그것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배경이 필요합니다. 만약 플롯의 토양을 단단히 다지고 뿌리를 내리는 작업부터 선행된다면, 이 작품이 가진 날 선 발상들이 훨씬 더 매력적인 이야기로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봅니다.
3.『마무리하며….』
앞선 지면을 통해 작품의 구조적 아쉬움을 다소 엄격하게 짚어내었으나, 사실 <디스토피아>를 읽다 보면 단편 소설을 설계하는 작가의 감각이 뛰어남을 단번에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각이란 단편이라는 압축적인 서사를 구상하고 이끌어가는 직관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잦은 비문과 오타, 일관되지 않은 문장부호 활용 등 텍스트 자체의 오류가 산재해 있어, 작품이 미완성 상태이거나 정교한 퇴고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명백히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물리적 분량 속에서 방대한 서사에 매몰되지 않고, 선명한 장면 하나에 집중하며 주제 의식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특유의 결이 분명히 관측됩니다. 이는 작가 본인이 단편 소설이라는 장르적 속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창작 행위 자체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이 작품과 만난 독자로서 무척 달가운 지점입니다. <불을 끄지마>로 명명된 이 연작이 보여주고 있는 차갑고 어두운 색채가 더욱 만족스럽게 성장하기를 바라며, 부족한 감평을 마치겠습니다.
인상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집필 활동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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