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작가님이 리뷰어에게 당부하신 점을 대놓고 어긴, 구체적이고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직 작품을 읽지 않으신 독자님께서는 뒤로 가주시기 바랍니다.
※ 리뷰 제목도 스포를 피하기 위해 내용과의 관련성을 최소화해서 대강 지었습니다.
「링구아 코스미카」는 외계의 존재들이 지구가 쏘아 올렸던 골든 레코드, 레가요프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낯선 외계의 시선으로 인류의 단편적인 기록을 해독해 나가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SF 장르 특유의 풍부한 재미를 선사하죠. 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매력적인 소재만큼이나 탁월한, 작품이 독자를 속이는 방식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보의 은폐 없이 진상을 담담하게 늘어놓으면서도, 독자를 그들이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서서히 빠트리는 방식. 최후반부 레가요프의 비행체가 지구의 골든 레코드임을 명확히 하는 부분에서 녹음 기록에 픽션적 변조를 준 것을 제외하면, 작품은 담담한 진상만으로 독자를 서서히 속여나갑니다.
대표적으로 작품 초중반부, 작품은 골든 레코드 표지에 새겨진 수소 원자의 전이 기호를 독자들에게 대놓고 보여줍니다. 우연히 그 이미지를 본 적이 있던 저는 순간 깨달아 버렸습니다.
‘아, 골든 레코드에 대한 이야기구나. 그럼 화자는 외계인이겠네.’
저는 간접적인 스포일러를 당했다고 느꼈고, 스포일러는 작품의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던 저 역시 이 지점에서 다소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스포일러에 대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눈치챘더라도 작품은 독자를 다시 속여넘길 예정이기 때문이었죠.
적어도 저에겐 그랬습니다. 일찌감치 진상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중반부에 이르러 ‘어? 아니었네. 지구가 쏘아 올린 물체가 아닌가 본데?’라며 스스로 확신을 뒤집고 다시 속아 넘어갔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보의 은폐는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당연히 여기가 그들의 행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9번째 이미지인 첫 번째 행성은 운석으로 처참하게 폭격당한 크레이터뿐인 행성이고, 두 번째는 붉은 불모지 행성이며, 그 다음은 기체행성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레가요프 행성계는 네 개의 행성을 품고 있으며 그들은 가장 바깥 행성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수소 원자의 전이 기호 다음 바로 이어지는 행성계에 대한 서술을 읽고 저는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네 개의 행성을 품은 행성계라는 것은 둘째치고, 가장 바깥 행성에 살고 있다니? 우리가 아는 지구는 수성, 금성에 이은 세 번째 행성이 아닌가.
처음 저는 외계인들이 태양계의 네 번째 행성인 화성을 지구인의 거주 행성이라고 오독했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핵과 맨틀로 이어지는 암석형 행성’, ‘물로 뒤덮인 행성’, ‘산과 숲과 강과 호수와 사막과 화산’ 등의 묘사는 절대 화성이 아닙니다. 명백히 지구에 대한 묘사죠.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었습니다.
1. 세월이 흘러 모종의 이유로 지구가 네 번째 행성이 되었다.
2. 비행체를 띄운 것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계였다.
앞서 수소 원자의 전이 기호를 보며 레가요프의 비행체가 골든 레코드임을 눈치 챘던 저로서는 1번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태양계 근처를 통과하던 거대한 천체가 태양계의 중력에 붙잡혀 행성으로 편입된 것일까? 아니면 거대한 천체가 지구나 화성의 궤도를 비틀어서 순서가 바뀐 것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지구도 인류가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을 테니, 인류 멸망 시나리오로도 재밌겠군.’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이러한 서술은 일절 없습니다. 지구가 멸망하긴 했지만, 그것은 태양의 노화로 인한 것이었지, 행성 순서가 바뀔만한 사건은 일절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2번 가능성, 지구의 비행체가 아니었던 걸까요? 역시 아닙니다. 작품은 해당 비행체가 골든 레코드임을 명확히 알 수 있게끔 끝을 냅니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요? 작가님께서 사소한 오류를 범하신 걸까요? 어차피 픽션이니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 인위적인 변조를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저 담담한 진상일 뿐이었습니다. 글을 다 읽은 뒤에 골든 레코드 수록 목록을 찾아본 저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골든 레코드의 이미지 목록 9~12번엔 표면을 관측하기 어려운 금성을 제외하고 수성, 화성, 목성, 지구 순으로 4개의 행성이 실려있었습니다. 외계인들의 입장에선 네 번째 행성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후대 학자들의 추측이긴 하지만, 외형적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는 3개의 행성을 순서대로 보여준 뒤, 인류가 사는 지구를 마지막으로 담았다고 하더군요. 13번부터 이어지는 지구 문명에 대한 이미지들이 스토리텔링적으로 지구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작품 속 외계인들 또한 적어도 지구가 인류의 행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의도대로 되었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들에게는 이기와 경쟁, 폭력, 시기와 질투, 폭탄, 살인, 분쟁 같은 이미지가 없습니다. 행성 안에 아주 다른 아홉 종족이 살고 있고 한 종족 안에서도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지만,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익숙한 반목이 없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어울리며 함께 발전해 나가는 종족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레가요프인에게는 갈등이 없다는 서술과, 자신들의 역사는 승자 기록의 반복이었다는 화자의 서술에 저는 완전히 속아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지구의 역사야 말로 살육과 전쟁 그리고 승자의 역사 기록의 연속이었으니까요.
레코드에는 지구의 어두운 단면을 인위적으로 배제했었다는 후속담을 저는 역시 작품을 덮고 후속조사를 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론 당연한 조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역시 승자의 역사 기록의 한 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더 나아가서는 기록에는 당연히 밝은 부분만 담았을 것이라는 점을 외계인들이 정말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제 막 화합을 이룬 초보 단일 행성 국가로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해석을 전파할 수는 없던 것이 아닐까 하는 재밌는 상상도 해보면서요.
이렇게 담담하게 독자들을 속여넘기던 작품은 비행체가 지구의 골든 레코드임을 명확히 알 수 있게끔 끝을 맺습니다. 지구는 태양의 세 번째 행성이라는 짖궂은 진상을 밝히면서요. 외계인들이 아직 해석하지 못한 지구인의 음성 녹음 기록을 통해서 말입니다. 속았음에도 배신감보다는 기분 좋은 유쾌함이 앞섰습니다. 특히 작품을 덮고 후속 조사를 하며 작가가 정보 은폐가 아닌 정보의 담담한 서술을 기만 재료로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끝으로, 작품의 따뜻한 분위기 뒤에 잘 숨어있습니다만, 지구는 멸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배드 엔딩으로 다가오진 않는 것 같아요.
화자를 지구인으로 오해한 채 이입하며 읽었기에 외계인들에게 기묘한 유대감이 형성된 것일까요. 골든 레코드를 진심으로 이해하려 시도하고, 계속 여행을 지속시키기로 결정하는 그들의 호의에 감동 받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와 염기서열이 같다는 묘사를 본 뒤에는 이들이 먼 친척과도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와 공통조상을 공유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공통조상이 아니더라도 발생 기작이 우리와 일치함을 뜻하는 것일까요. 어느 쪽이든 형성된 유대감과 결합되어 왠지 모를 친근감을 줍니다.
일본 유명 해적 만화의 명언 중 ‘사람은 잊혀졌을 때 비로소 죽는 것이다’는 골자의 명언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렇다면 지구 역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골든 레코드의 계속되는 비행으로 우리의 문화는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까요. 우리의 먼 친척들이 우리의 문화를 계속해서 기억해줄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