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에서는 전골 요리를 자주 해 먹습니다. ‘간을 맞춘다’ 라는 세밀한 작업이 덜 들어가도 되는 요리이기도 하고 원하는 재료를 마구 섞을 수 있으니 아이가 좋아하지 않는 재료를 맛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유용하더군요.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전골을 ‘얼큰한 요리’ 로 알고 있더군요. 처음 듣는 분들은 ‘읭?’ 하실 수 있는데 사실 저는 얼큰파라서 어느 정도 끓이고 나면 꼭 고추가루를 넣거나 묵은 김치 같은 재료를 투척합니다. 항상 그렇게 먹다 보니 아이는 전골을 김치 찌개와 비슷한 요리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나중에 아이가 이런 게 아니지 않냐고 물어보면 ‘사실 우리가 먹었던 건 마라탕이었어.’ 라고 해 줄 생각입니다. 조금 미안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 작품의 제목인 [파밀리아]는 참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족이었습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상에서는 인간의 생식 능력이 거의 사라지고 복제 인간이라 할 수 있는 ‘합성인’이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합성인 또한 생식 능력이 없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의미는 퇴색된 세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가족의 일반적 의미나 법적인 정의에서도 혈연을 필요 조건으로 두지는 않지만, 우리는 혈연을 가족이라는 관계의 가장 큰 뿌리로 두고 여러 새로운 줄기를 붙여 나갔습니다.
작품에서 다루는 주요 화두 또한 생식 능력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만, 다 읽고 나니 또 다른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더군요.
이 작품에서 사만다는 합성인이 생식 능력을 가진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작품에서 등장하는 파밀리아는 지하에 위치한 연구소 혹은 피난처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장소이고, 그 곳에서는 인간과 합성인의 공존을 꿈꾸는 사만다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만다는 자신의 연인인 안나가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 꿈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합성인이라는 종족의 미래나 인류와의 공존 같은 거창한 목표들이 있기도 하지만 저는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사만다의 연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면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 ‘함께 미래를 꿈꾸다’ 입니다. 한정된 시간을 사는 인간들에게 미래를 꿈꾼다는 건 단지 내일 혹은 내년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 겁니다. 그것이 단지 둘이 만들어낸 후대의 생명 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사만다 또한 그저 생식 능력 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인류 모두가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저 제 추측일 뿐이지만 이런 시각도 있을 수 있겠다 정도로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파밀리아에는 성스럽다는 뜻도 있습니다. 생식기가 퇴화되고 성별의 구분조차 거의 사라진 존재. 이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천사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다양한 구분으로 서로 싸우고 적대하는 최근의 세태를 보면서 ‘차라리 민족이나 성별의 구분이 없었다면 세상이 평화로웠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히어로 만화의 빌런들이나 떠올릴 법한 극히 단순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최근 여러 미디어를 보면 이런 인종이라는 이유로 혹은 저런 성별이라는 이유로 끝도 없이 서로를 혐오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고귀한 행위이자 인류 존속의 토대입니다. 그런데 임신과 출산 없이도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들이 천사에 가까운 형상을 가진다면? 그렇게 된다면 과연 세상에 분쟁과 혐오가 사라질까? 그 질문에 대한 작가 님의 생각이 글에 녹아있으니 읽어보시고 독자 분들 나름의 판단을 내려보시는 것도 일독의 재미가 될 것 같습니다.
찾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뜻이 하나 더 있더군요. 생물 분류 중 [과]의 단계를 파밀리아라고 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세포 단위의 분류로부터 시작하여 과까지 오면 어느 정도 유사한 성질을 보이는 생물들이 묶이게 되는 단계가 됩니다. 작품 안에서 보면 기존 인류와 합성인들은 다른 생명체라 할 수도 있지만 지구 상의 그 어떤 생물보다 동일한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수 백, 수 만 가지의 비슷한 부분을 제쳐 두고 다른 점 한 두 개를 두고서 서로 배척하고 말살시키려 하는 겁니다. 지금 인류가 처한 상황과도 다르지 않은 비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작품의 배경 설정이 특히 좋습니다. SF 소설에 진입 장벽이 있는 이유는 여러 작가님들이 오랜 시간 고민해서 창조하신 배경이 독자 분들에게 쉽게 받아 들여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배경에 대한 설명은 쉽고 간단하지만 생각하고 음미할 재료는 많이 남겨주셨습니다. 가독성 좋은 SF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앞으로 제 아이가 자라면서 여러 다른 장소에서 전골을 먹어보게 될 겁니다. 어렸을 적 먹었던 그것이 아니라며 혼란에 빠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양한 전골을 맛보면서 아이의 미각과 세상을 보는 눈은 성장하겠지요. (물론 전골에 김치를 넣는 건 단순한 제 취향입니다..)
이 작품은 내용에 담긴 여러 의미들을 제목과 함께 제 나름의 해석을 통해 곱씹어볼 수 있는 재미가 풍부한 멋진 작품입니다. SF 소설이 100 매 남짓의 분량에 이런 재미와 깊이를 담아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네요. 작가님의 필력과 작품에 들인 노력에 엄지를 치켜 들고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요.
SF 소설은 순 문학의 아름다움과 추리 소설의 짜릿함과 공포 소설의 스산함을 모두 갖춘 장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작품에는 꽃집을 지날 때 느껴지는 달콤함 같은 로맨스까지 담겨 있으니 한 번 읽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