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날씨가 참 이상합니다. 수능 날인데도 한파는 커녕 낮 기온이 20도 안팎을 넘나들더니, 이제는 또 비가 오네요. 기후 이상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기후 이상 관련 글이나 영상을 볼 때마다 ‘지구 x됐다’류의 댓글을 보게 됩니다. 거기엔 마치 세트 마냥 이런 답댓이 붙죠. ‘X된 건 인간이야. 지구가 아니라.’
그러게요. 망하는 건 인간이지 지구가 아닙니다. 지구에 인간만 사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류의 종말이 뭐 그리 대수인가 싶습니다. 공룡도 멸종했고 도도새도 멸종했고 메머드도 멸종했는걸요. 그리고 이제, 그 목록에 호모 사피엔스가 추가될 뿐인거죠.
너무 무덤덤한 반응일까요? 저는 이 글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설 역시 이렇게 차분하고, 침착하게 인류 종말을 얘기합니다. 이 글이 사람이었다면 ‘너 T야?’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러나 이 글은 차분하지만 냉정하진 않습니다. 침착하지만 다정하고요. 인상 깊은 곳도 많았는데, 어디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주절주절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1.신장망락(新疆網絡) : 이름에서 드러나듯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관련 있습니다. 중국이 만든 사회 통제용 인공지능인데 이들은 ‘하루아침에 수만 명의 중국인‘을 만들어냅니다. 공민신분번호도 받고 일도 하지만 월급의 반이상을 세금으로 내면서도 사회 보험은 받지 못하는 처지로, 초창기 그들의 역할은 ‘저소득층보다 더 열악한 환경의 저소득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짤막한 설명 만으로도 초기 안드로이드들이 현대판 노예 처지라는 것이 잘 와 닿았습니다. 특히 인간이 행-불행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으로, 내 밑(아래)에 나보다 더 못나고 불운한 누군가가 잔뜩 있다면 그로써 위안을 얻는 인간의 특성이 명확히 드러나는 듯 했습니다.
신장망락이 나오는 도입부의 백미는 그러나 이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작가님은 흔히 하는 ‘인간vs안드로이드’ 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안드로이드는 ‘중국인’, 인간은 ‘단백질 기반 중국인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로써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구성 물질 외엔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죠. 마치 신장 위구르 출신 중국인, 본토 베이징 출신 중국인처럼요.
그리고 위구르에 이어 이 정책을 적극 도입한 곳들이 스코틀랜드, 카탈루냐, 디트로이트라는 점도 인상 깊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독립했다는 것은 인공 지능들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겠죠. 종국에 정치의 모든 권력이 인공지능에게 넘어갔다는 게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러면 인공지능 마저도 협잡과 권모술수에 능한 걸까요?ㅜ)
2. 주당 6시간 근무 : 주인공은 뉴스를 통해 인류 종말이 인공지능 의원들의 투표로 결정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이 소식을 전하는 뉴스 아나운서도, 기자도, 듣고 있는 주인공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질 않는다는 점 입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하고 듣는 것 처럼요.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출근을 합니다.
출근길의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코로나 팬데믹보다도 더 침착한 분위기에, 회사에 결근자는 한명 뿐이죠. 사장은 다소 당황해 보이지만 평소와 같은 업무를 지시하고, 주인공도 일을 합니다. (그 일이 빌딩형 공동묘지 디자인이라는 것은 또 의미심장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하는 일은 주당 6시간이며, 그마저도 ‘돈을 주려고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회는 인공지능의 노동만으로 모든 재화가 풍족하게 생산되고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간을 위해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입니다.
예전에 무상급식소에 들어온 항의 관련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도시락을 받아간 노숙자가 밥이 이천쌀밥이 아니라며 항의했다고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란 충분히 저럴 위험성이 있는 존재죠. 그리고 인공지능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잇감을 주듯, 인간에게 [약간의] 일을 줍니다. 급여는 안드로이드들이 만들어내는 풍족한 재화로 부족하지 않게 지급하고요. 저는 이 대목이, 마치 인공지능이 인간을 위해 준비한 ‘역할놀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주당 6시간만 일해도 된다고? 야호!’가 아니라 어쩐지 으스스하게 느껴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하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주인공 스스로도 자기가 디자인 한 건물은 머지않아 또 다른 ‘돈을 주려고 만들어내는 일‘ 창출을 위해 철거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출근을 하고, 일을 하지요. 마치 인간이 언젠간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죽은 뒤에는 작지만 자신이 이뤄낸 성취들이 조만간 무(無)로 돌아갈 것임을 알면서도 하루 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듯이요. 그래서 제겐, 이러한 주인공의 태도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3. 터키 양식 도자기 잔 : 주인공은 아침에 터키 양식 도자기 잔에 커피를 마십니다. 그리고 퇴근 길에 건물 발주처인 시청에 들러 그곳에 근무하는 안드로이드로부터 비슷한 무늬가 있는 잔에 커피를 대접받죠. 이 안드로이드는 옷을 갖춰 입었고, 라일락 향이 나며, 작은 화분에 꽃(눈풀꽃)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깜빡이지 않고, 상대가 무엇을 하든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죠.
인간과 안드로이드 두 존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 도자기 잔 만큼의 차이일까요? 비슷한 터키 양식 커피 잔에 조금 다른 무늬 만큼의? 스스로가 인공지능이면서도 데이터 오염을 염려해 컴퓨터를 쓰지 않고,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씨앗을 심는 안드로이드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작품에 잠깐 언급되는, ‘수리비를 구걸하는 안드로이드‘에게 연민을 느낀 것은?
4. 책(혹은 이야기)와 바티칸 대 성당: 주인공은 자살을 시도한 직장 동료의 비품 가운데서 책 한권을 얻게 되어 읽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미완으로 중간에 끝나고 (이 대목에서 ‘끔찍해’라는 주인공의 대사에 격하게 공감했습니다.) 책의 저자가 인류 멸종을 발의한 인공지능 의원이라는 걸 알게 되자 다소 충동적으로 바티칸으로 날아가죠.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제대에 서 인류 멸종을 이야기하는 건 교황이 아니라 인공지능입니다. (하긴 교황이라면 종말이 다가올 때 구원을 얘기하는 게 맞겠네요.) 이 대목에서 인공지능이 정치에 이어 종교까지 잠식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치와 종교, 모든 것이 인공지능 아래 들어간 것이죠. 그런데 이 둘이 없는 인간은 무엇으로 스스로를 다스릴까요? 이렇게 된 인류라면 멸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효율과 능력에 취해 자존을 넘겨주었구나 싶어서요.
바티칸 성당 앞은 주인공이 예상치 못했던 긴장감과 적대감으로 가득합니다. 글의 제목과 분위기만큼이나 침착한 우리의 주인공은 강압적이지도 않고 폭력적이지도 않기에 그 상황에서 의원 만나기를 포기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갈등이 만들어 준 기회 탓에 주인공은 결국 의원을 만나게 되고, 상황의 부적절성을 인지하면서도 두 눈을 질끈 감고 묻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을요.
안드로이드 의원은 자신이 발의한 법안 때문에 그 개체의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인류 종말 결정에 따라 다음 주에 종말을 맞이합니다. 곧 없어질 두 존재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한쪽은 들려주고, 한쪽은 들으면서. (의원이 한 이야기 역시 많은 걸 상징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별도로 언급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줄거리 위주의 짧은 몇 줄이지만, 그래도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께는 직접 읽으시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죽음을 코 앞에 두고도 호기심을 채우려는 인간과 그러한 인간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의원은 모습은 어쩐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단순히 살아있다는 것 외의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요.
이야기는 끝나고, 의원은 파괴됩니다. 그리고 예정대로 인류는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의원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희망을 품어봅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 이후 인류를 다시 번성하게 하셨 듯, 데우칼리온과 피라가 빈 들판에 돌을 던졌 듯, 어쩌면 인공지능도 종말 뒤에 더 친환경적인 새 인류를 배양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봅니다. 또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어쨌든 상상은 자유고, 지구에는 인간만 있는게 아니며, 눈풀꽃은 싹을 틔웠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