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 드레드풀(Penny Dreadful)’이라는 말이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세기 영국에서 생산된 ‘1 페니짜리 싸구려 연재 소설’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런 ‘페니 드레드풀’은 노동계급을 위한 값싼 오락으로 기능했고, 기차 타고 움직이는 할 일 없는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킬링 타임’ 거리가 되어 주었다.
드라마 <페니 드레드풀>의 어원이기도 한데, 이 드라마 주인공들이 ‘페니 드레드풀’에 등장했던 인물상들을 반영하고 있다. ‘탐정’ ‘미국 다임노블에 등장할 법한 카우보이’, ‘영매’, ‘고고학자’나 ⋯ ⋯ . ‘고딕 호러 소설’의 주인공들 말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나 ‘도리언 그레이’ 같은 주인공들이 직접 인용된다.
<금기>는 그야 말로 심심풀이로 쓰였다. 실제로 작가는 사석에서나마 ‘원고 피드백 돌아오는 중에 심심해서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심심풀이로 쓴 작품에 ‘진지한 주제의식이 없다’, ‘작가적인 자아가 보이지 않는다’ 혹은 ‘시대정신이 드러나지 않는다’ 류의 케케묵고 ‘꼰대스러운’ 평가는 오히려 궤를 벗어난 것일 테다. 거기다가, 오히려 그런 ‘심심풀이’에서 그런 걸 읽어내는 것이 리뷰에서 제일 즐거운 작업이고 말이다.
어둑어둑해지는 한 술집에서, ‘백작부인의 성’에 되한 괴담이 돌기 시작한다. 하녀들을 죽이고 피로 목욕을 한 백작부인. 그 백작부인의 성에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말에 전사, 마법사, 레인저가 힘을 합쳐 성을 돌파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그들은 과연 ‘성’이라는 ‘던전’을 돌파하고 보물들을 차지해 돌아올 수 있을까.
(알면 재밌고 몰라도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이 이런 일화로 유명하고, 작가가 언급했듯 <디아블로 2>의 1장 네 번째 퀘스트가 이를 모티브로 했다.)
읽고 있자면 <워해머 판타지>나 <던전 앤 드래곤>이 소환되는 듯하다. 특히나 이 둘은 <그레이 마우저와 파프나르> 시리즈를 핵심 키워드로 삼고 있는데, 작가의 지향점 또한 거기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황야, 도시, 그리고 ‘던전 약탈자들’ 말이다.
작품은 말했듯 정말 심심풀이로 쓰였고, 심심풀이를 위해 소비된다. 서사의 구조 자체가 ‘던전의 구조’를 충실히 따라가기 때문에, 정말로 ‘게임 하는 감각’으로 읽게 된다.
필자가 예전에 다른 곳에 투고한 에세이의 <던전 기획자를 위한 던전 설계 이야기> 편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던전’은 상당히 그 구조가 ‘탐험과 이야기 중심’으로 발전되어 있는 공간이다.
‘테이블탑 롤 플레잉 게임’하면 <던전 앤 드래곤>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던전 앤 드래곤>이 던전을 탐색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다같이 둘러 앉아서 캐릭터 하나 붙잡고 던전을 탐사하는 게임’인데, ‘게임’의 근본적인 목적이란 ‘다같이 좋은 시간 보내기 위함’이다. 각자에게 캐릭터가 주어지는 만큼이나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이 활약할 공간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그 ‘활약’을 위해 ‘던전’은 다소간 인위적인 구조로 형성된다.
그 결과, 던전은 다섯 가지 요소로 분리된다.
‘입구 – 롤플레잉 공간 – 적대 요소, 퍼즐 혹은 함정 – 보스 – 보상
몇십 층이나 수백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메가 던전’도 존재하지만, 그 ‘메가 던전’조차 이런 구조를 되풀이하기 마련이다. 이는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과 맞아떨이지는 면이 있는데, 이 또한 ‘테이블탑 롤 플레잉 게임’ 자체가 ‘공동 서사 창작’을 위한 놀이로 발전하면서로 추정된다.
이 작품 같은 경우엔 ‘술집의 소문’이 입구의 역할, ‘박쥐/해골 사냥’ 쪽이 ‘롤 플레잉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그 외에 함정과 나름의 보스전도 존재하지만, 스포일러가 되므로 말은 하지 않겠다.
이 던전이란 공간 역시 캐릭터가 뛰어놀기 위한 서사적 놀이터다.
극초기 TSR 시절의 <던전 앤 드래곤>만 하더라도, 그리고 그 시기의 철학이 반영된 ‘OSR(올드 스쿨 르네상스/리바이벌)’의 경우 캐릭터의 비중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던전 까기’에 집중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게임의 규칙이 점점 복잡해지고, 자신이 만든 캐릭터에 ‘애정’을 쏟는 사람, 그리고 ‘더 다양한 역할과 더 많은 던전!’을 위해 캐릭터는 분화된다.
극초기 판본에 존재했던 건 ‘전사(Fighter), 도적(Thief), 성직자(Cleric), 그리고 마법 사용자(Magic-User)’였고, 던전의 구조 또한 이들에게 ‘최적화된’ 형태로 제공되었다. 이를테면 전사는 일반적인 전투를, 도적은 함정 해제를, 마법 사용자는 퍼즐을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클레릭은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으로서, 여타 온라인 게임에서도 그러하듯 파티의 기둥이다. 아직까지 현 판본 <던전 앤 드래곤>에 존재하는 다른 ‘클래스’들도, 여기에서 출발해 혼합, 분화된 것이다.
그 결과 작품의 파티 또한 ‘전사, 레인저, 마법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레인저’는 야생 탐험에 특화된 ‘도적’이라 할 수 있으니, 충분한 대체품이다. 음? 그럼 ‘성직자’는 어디에 있냐고? 아, 여기서 이들의 최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야, 나름 언데드 사냥하러 가는데 성직자는 제대로 데려갔어야지.
이 점에서 아쉬운 점은 역시 그것이다. 소설에 ‘충분한 여유 공간’이 없다는 것. 아직 소설을 덜 즐겼는데, 너무 빨리 캐릭터들을 데리고 마쳐버리는 느낌이랄까. 각종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전사는 검을 휘두르고, 레인저는 함정을 해체하고, 마법사는 불덩이를 던진다.
그러나 ‘게임’의 목적은 ‘페니 드레드풀’과 같다. ‘남는 시간을 재밌게 보내기 위한 것’인데, 작품은 독자에게 충분한 ‘즐거운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위의 던전 요소들 중 하나인 ‘롤 플레잉 공간’은 단순히 ‘몬스터 사냥’을 의미하지 않고, ‘던전’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제공하는 요소이다. 예를 들면 ‘고블린 병영’이 던전이라 치면, 단순히 ‘고블린’들만 아니라 ‘고블린들의 공간’에서 ‘고블린들이 어떻게 지냈을 지’를 추리하게 만드는 것이 ‘롤 플레잉 공간’으로서의 요소이다.
캐릭터들의 ‘타이트함’ 또한 아쉬운 요소다. ‘던전’은 ‘캐릭터의 개성’이 극도로 표현되는 공간이다. <다키스트 던전> 같은 경우엔 ‘캐릭터의 멘탈 붕괴’를 수치화해서 그려내기도 하고, <버민타이드 2> 같은 게임에서는 직업 분배 뿐만 아니라 종족, 개성까지 부여된 캐릭터들이 쥐 인간들을 토막내며 캐릭터화된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는다. 이 작품에서는 캐릭터들이 그저 ‘클래스’로만 존재하니, 서로가 정말로 ‘역할 수행’만 하고 끝나버리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랬으면 또 결말이 완전히 달라졌겠지. 분량도 좀 늘어났을테고 말이다. ‘좋은 시간’ 보내려는 작품을 쓴다는 건 작가 본인에게도 ‘좋은 시간’ 보내려는 목적이었을 테니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음 ⋯ ⋯ . 너무나도 ‘게임’의 감각에 충실한 소설이다 보니, 역시 동전 하나 더 넣고 싶다. 이번엔 ‘성직자’ 넣어서 막판 보스까지 깨보자. 아, 동전 하나만 더. ‘위쳐에게 동전 하나만 던져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