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합성에 매달리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자유와 여흥인가, 아니면 티끌과 먼지나 다름없는 일인가 공모(감상)

대상작품: 민들레주의 애가 (작가: 김밀세,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1시간 전, 조회 10

“자유와 여흥의 신이시여, 바람과 한때의 신이시여, 여기 작은 종이 있사옵니다.”

 

자유와 여흥의 신이 지었다는 애가이다. 신들이 식탁에 오른 민들레주를 마시고 진창 취했는데, 깨고 보니 술을 빚은 신을 까먹어버려 이를 애도하는 시이다.

 

민들레주에 창조의 저주 있어라, 망각의 축복 있어라. 이 구절, 오직 바람만이 뿌리네.

 

[이름을 모르는 신은 누구인가]

“나는 당신이 이름을 모르는 신, 그래서 이름을 알려줄 수 없는 신.”

‘그렇다면’

“응. 바람과 한때의 신은 아니야. 저마다 방식으로 우리는 마음에 스밀 뿐이야.”

소설은 끝내 ‘이름을 모르는 신(무명씨)’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밝히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의 대답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신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모아보면 이렇다.

첫 등장에서 신은 잿빛 머리를 하고 늙은 민들레의 꽃대를 가위로 잘라내는 존재로, 민들레들 사이에서 “늙은 민들레들을 끝내는 자”라고 수군거려진다.
두 번째 등장에서는 조르주에게 망원경으로 태양을 보여주는데, 태양이 하얗게 바래며 날개가 돋고 구(球)가 붕괴하는 장면—초신성이 되어 흩어지는 이미지와 겹친다.
세 번째, 마지막 등장에서 신은 스스로 재로 풍화되어가면서 “아직 닿지 않은 곳이 많네”라고 속삭이고, 주인 잃은 가위가 조르주의 가슴으로 날아든다.

정리하면 이 신은 소멸과 확산을 동시에 관장하는 존재다. 오래된 것을 끝내고(가위), 그 파편을 흩뿌려 새로운 것을 자라게 한다(홑씨). 이는 삼촌의 책갈피에 적혀 있던 경구 “모이면 퍼트리고, 퍼트리면 모이네”와 정확히 겹친다.

즉 이 신은 조르주가 실험대 위에서 하는 일—무언가를 잘게 부수고, 그 입자를 다시 모아 전혀 다른 것으로 조립하는 일—그 자체를 신격화한 존재에 가깝다. 삼촌의 죽음도, 결국 이 순환 안의 한 번의 ‘가위질’이었을지 모른다는 암시가 은은하게 깔린다.
그렇다면 조르주가 마지막에 이 신을 ‘티끌과 먼지의 신’이라 명명하는 것은 정체를 발견했다기보다, 자신이 붙잡고 있던 학문(합성화학) 그 자체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 가깝다. 신을 명명함으로써 조르주는 자신이 종사해온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비로소 인정한다.

 

[전합성은 자유와 여흥인가, 티끌과 먼지인가]

이 소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조르주의 동기를 되짚어보면 이는 처음부터 순수한 진리 탐구가 아니었다. 학회의 상금(천 프랑), 삼촌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오기(“삼촌이 실패했던 것은 전부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뿐”), 이리스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려는 허세, 에바예와의 결투에서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

이 모든 것은 ‘자유와 여흥의 신’에게 바쳐도 이상하지 않을 감정들이다. 실제로 조르주가 실험에 실패할 때마다 보이는 태도(허공에 삿대질하기, 혼잣말로 으스대기, 폭발 사고를 겪고도 재를 뒤집어쓴 채 낄낄대는 장면들)는 그가 냉철한 구도자라기보다는 에바예 못지않은 ‘한때의 흥’에 취해 있는 인물임을 계속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전합성 도전은 진실을 캐는 대신, 진실을 캐는 ‘행위 자체’에 도취되는 것일지 모른다.

동시에 이 도전은 문자 그대로 ‘티끌과 먼지’의 일이기도 하다. 도토리, 쓴쑥, 수은, 붕사, 그리고 마지막엔 브로치를 갈아낸 금가루등, 조르주가 다루는 재료는 하나같이 하찮고 물질적인 부스러기들이다. 그는 삼촌의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질문(별이 정말 떨어졌는가, 무명씨는 누구인가)에 답하는 대신, 그 질문을 손에 잡히는 입자의 무게 차이—회전 속도가 다르다는 물리적 관찰—로 환원해버린다.

이것이 소설이 은근히 던지는 아이러니다. 조르주는 삼촌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가 유일하게 도달하는 진실은 향의 화학적 구성 성분뿐이다. 죽음의 의미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는데, 향의 분자 구조만은 완성된다.

결국 이 소설은 두 가지를 동시에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전합성이라는 행위는 자유와 여흥의 신에게 바쳐진 허영이면서, 동시에 티끌과 먼지의 신에게 바쳐진 노동이다.

조르주가 마지막에 흠집 난 브로치를 손에 쥐고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두 신이 ‘어쩌면’ 사실 한 몸이라는 것—여흥도 결국 먼지로 돌아가고, 먼지를 만지는 노동도 결국 한때의 흥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달할 수 없는 앎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지식을 퍼트린다”는 마지막 문장의 ‘그럼에도’는, 이름 모를 신의 정체를 영영 모른 채로도 그 신에게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다는 사실—즉 앎의 불완전함과 명명 행위 사이의 간극—을 정확히 요약한다.

 

이 소설은 과학(혹은 마법)이 진실에 도달하는 고귀한 자유의 실천인지, 아니면 그저 원자들을 뒤섞는 먼지투성이 놀음인지를 묻지만, 답으로 내놓는 것은 결국 둘 사이의 경계 자체가 흐릿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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