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개인적인 푸념을 써 볼게요. (죄송합니다!)
저는 소설을 읽을 때 가장 힘든 게 첫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겁니다.
이 소설도 그랬습니다.
‘까마득히 오래전 지도에서 사라진, 이제는 떠도는 파도만이 기억하는 작은 섬.’
워.
‘작은 섬’이 나올 때까지 그 앞의 것들을 머리 속에 담아두기가 힘들었습니다.
ChatGPT에게 물어봤습니다.
나:
다음 문장을 영어 소설에 나올 문체로 영어로 번역해 줘.
까마득히 오래전 지도에서 사라진, 이제는 떠도는 파도만이 기억하는 작은 섬.
ChatGPT:
A tiny island, long vanished from maps, now remembered only by the wandering waves from ages past.
와.
좋더군요.
먼저 ‘작은 섬’을 머리에 담고, 거기에 ‘오래 전에 사라진 (뭐로부터?) 지도로부터’ 를 덧붙이고, ‘기억되는 – (누구에게?) 떠도는 파도에게 (오래 전부터)’를 덧붙이니 전체 모양과 느낌이 머리에 부담 없이 그려졌습니다.
그에 비해 한국어 원문은 대상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수식하는지 모르는 ‘까마득히 오래전’ 을 담은 뒤, 그걸 뒤에 나오는 ‘지도’에 붙이는 걸 시도했다가 ‘사라진’을 만난 뒤 그게 아니라 ‘사라진’에 붙는 것으로 수정한 다음 (여전히 뭐가 지도에서 사라졌는지는 모르는 상태), 역시 무엇을 수식하는지 모르는 ‘이제는 떠도는’을 담고 다행히 이건 ‘파도’와 붙인 다음, 파도가 기억하는 게 뭐지? 아! 그게 작은 섬이었구나! 근데 작은 섬이 어쨌다고? 아, 지도에서도 사라졌고 파도만이 기억하는구나… 이렇게 머리 속에서 짜깁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Generic한) 대상을 우선 놓고 나서 거기에 그 대상 특유의 장식을 씌워나가면서 대상을 구체적으로 완성해 나가게 하는 게 아니라, 장식부터 늘어놓은 다음에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장식을 다 담고 있다가 나중에 대상에 모두 적용해서 한 번에 완성하게 하는 방식인 거죠.
ChatGPT에게 다시 물어봤습니다.
나:
이번에는, 영어로 말고, 한국어로, 좀더 읽고 이해하기 쉽게 바꿔줘.
ChatGPT:
아주 오래전에 지도에서 사라져 이제는 떠도는 파도만이 기억하는 작은 섬.
나:
‘작은 섬’이 주된 표현 대상인데, 맨 뒤에 있으면 독자가 앞 단어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야 돼서 힘들지 않겠어? 다시 해 봐.
ChatGPT:
작은 섬, 아주 오래전에 지도에서 사라져 이제는 떠도는 파도만이 기억하는 곳.
오. 좋다. 나름.
나:
좀더 유려하게 할 수는 없을까?
ChatGPT:
아주 오래전에 지도에서 사라지고 이제는 떠도는 파도만이 기억하는 작은 섬.
나:
아니, 작은 섬을 뒤에 놓지 말고…
(영양가 없는 대화가 이어져 생략)
…
몇 년 전인가, 한국어 번역본 단편소설 하나를 읽은 적 있는데요, 소설 첫 문장에 거의 영화 초반부 1분 정도의 정보를 카메라 이동이나 시간 흐름과 잘 안 맞게 (하지만 한국어 문어체의 어순에는 맞게) 풀어놓는 바람에 몇 번을 끊어가면서 (욕을 조금 해 가며) 다시 읽었더랬습니다.
음.
분명 영어 원문은 더 읽기 쉬웠겠지요.
문제는 한국어.
그것도 문어체 한국어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체 완결되면서도 그럴 듯한 문어체 문장을 만들려다가 오히려 망치게 되는 거죠.
아마 이 소설 (제가 전에 읽은 번역본 단편소설 말고, 이 ‘부활’ 소설) 첫 문장에 해당하는 정보를 실제 이야기꾼이 듣는 이에게 말로 들려주었다면 이렇게 했을 것 같습니다.
“섬이 있었지, 작은 섬이.
지도에서 사라진지 오래고,
떠도는 파도만이 기억하는, 그런 섬 말이지.”
영어에는 문장을 길게 쓰면서도 중요한 걸 먼저 말함으로써 중간중간 기억 부담을 털어내게 해 주는 ‘좀 있다가 추가할게’ 장치들이 있습니다. of, which, that, where 등등. 하지만 한국어는 별로 그런 장치가 없죠. (있던가요? 흠…) 그렇다면 문장을 조각내는 게 답일 것 같습니다. 무리하게 다 담으려 하지 말고요.
자체 완결되도록 하기 위해 길게 늘인 문어체 문장은 적어도 한국어에서는 나쁜 문장이다.
뭐 이런 얘기죠.
푸념은 여기까지입니다.
리뷰 – 라기보다는 그저 개인의 감상과 약간 애매했던 부분에 대해 조금 써 보겠습니다.
1. ‘웬만한 집채보다 커다란 배’ – 가 큰 배일까요, 작은 배일까요? 저는 별로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문장에서 ‘큰 성처럼 보이기도’라고 보충이 되어 해결이 됐지만요.
2. 아내가 그렇게 죽은 게 …좀 올드해 보였습니다. 옛날 이야기이긴 하지만요. 아내가 직접 복수를 하는 게 요즘 트렌드에 맞았겠지요. 오히려 진부해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요. 암튼 저는 아내가 그렇게 죽은 게 좀 그랬습니다. 바흐만은 성주에게 복수하기 보다는 아내가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는 규율(?)을 만든 사회 전체 – 바흐만 자신도 포함해서! – 에 복수해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3. 큰 배를 만든 특별하게 생긴 여자. 그 정도로 특별하게 묘사했다면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묘사는 맥거핀이 된 것 같아요.
4. 여러 해(약 20년!)를 상륙 없이 버틴 배. 배가 아무리 커도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물이 모자라서. (이건 제 지식이 부족한 걸지도) 설정을 closed ecosystem이 가능한 우주선으로 (장르를!) 바꾸거나, 아니면 뭔가 특별한 설명이 있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5. 배에 탄 여자. 여자는 배에 안 태울 거예요. 재수 없다고. 소설 속 세계에서는 그런 터부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소설의 다른 부분을 보면 실제 세계의 중세와 별 다를 것 없는 세계처럼 보이기 때문에, 좀더 부연설명을 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주선이었다면 괜찮았을지도. (자꾸 SF로…) 아니면 카바드 일당이 이미 초기에 죽고 유령선 상태로 떠돌았다든지. 이건 나중에 용서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기가 힘들겠네요.
6. 수십년을 헤매다 상륙한 곳이 바흐만이 있는 곳. 엄청난 우연이예요! 소설에서는 보통 이런 우연은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 되죠. 바흐만이 인도했다는 식으로 설명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7. ‘그’. 따옴표. 제가 웹소설을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다른 소설도 별로 안 읽지만…) 이거 아마도 웹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기술 방식이 아닐까 하는데요 (인터넷 신문 기사에서도 책임 회피 등등을 위해 꽤 그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지문이나 묘사 문장에서 쓰는 것까지는 넘어가도 대화에서까지 쓰는 건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은 따옴표 붙여서 말하지는 않잖아요. (말하면서 센 소리를 내는 걸까요?) 그런데 이 따옴표 붙이기, 혹시 일본 만화나 소설에서 문장 일부를 카타카나로 쓰는 걸 한국 현지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8. 용서. 아, 그럴 리가 없어요. 호모 사피엔스가. 바흐만이 집단 최면술을 배웠다는 설정을 하거나 카바드가 바흐만 등짝에 칼을 꽂는 결말로 가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읽으면서 계속 뭔가 사고가 터질꺼야… 하고 생각했는데, 그냥 끝나버려서 어? 그랬습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네요.
9. 바흐만의 수많은 삶. 이 부분이 독특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바흐만의 결론과는 상관 없이요. 그가 수많은 삶에서 미움받는 장면들이 좀… 불필요하게 너무 나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요. 그리고 바흐만만이 어떻게 그런 특별한 경험을 했는지 세계관 수준에서 약간의 설명이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살짝, 간접적으로라도요.
** 추가 **
(리뷰 부분에 빠트린 것이 있고, 달아주신 답글을 보니 생각나는 게 있어 추가합니다.)
10. 섬 꼭대기에 있는 큰 배. 카바드의 배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배가 어떻게 섬 꼭대기까지 올라갔는지는 알 수 없네요. 배를 섬 꼭대기에 놓는 것은 특별한 일이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답글을 보고 나서.
중동이었군요!
그러고 보니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중동 쪽 같네요. 하지만 그걸로 배경을 유추하기에는 제가 무뎠던 것 같습니다. ‘성’, ‘성주’라는 단어가 저에게는 너무 강력하게 중세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궁전’, ‘술탄’, ‘하렘(…)’ 같은 단어가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합니다. 주인공 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 중에 ‘알’이 들어간 게 있었어도 저에게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추가: 악! 있었네요. 맨 처음에…) 아, ‘사막’이라는 단어가 나오긴 했는데, 너무 뒤쪽에 나와서 저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중동이라고 하니… 제가 쓴 애매한 점 몇 개를 (제 멋대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배에 탄 여자는 술탄이 하렘을 배에도 만들어 둔 걸로 하고, 여러 해를 버틴 배는… 사막을 항해하는 (환상의) 배로 하는 겁니다! 그런 배를 만드는 사람은 틀림없이 특별하게 생겼겠지요. 그리고 그 배를 타고 성경 출애굽기 시절의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사막 또는 광야를 떠돈 거죠. 가끔씩 오아시스를 만난 거고. 바흐만은 바다 대신 사막을 걸으면서 천 번의 꿈(또는 환생 체험)을 꾼 것이고. 그리고 땅 끝 바닷가에 정착한 거죠.
아, 그냥 제 멋대로의 상상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