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홍대병’에 관한 설명을 들은 적 있습니다. 아시나요? 대중적인 선호가 있는 작품이나 장르를 피하고, 비주류로 뭉뚱그려지는 것에 선호나 애호를 드러내면서, 자기는 그런 ‘홍대병’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다고요.
그 말을 들은 저는 제게 한 말이 아닌데도 아니라고 할 뻔했지 뭐예요. 첫문장에서 또박. 또박 부정하는 현을 보면서 이때가 떠올랐습니다.
그 분야에 관해 잘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반대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자길 낮춰 보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과연 넓은 뜻의 시네필이 아니라 좁은 뜻의 시네필이라고 봐도 무방한 내용이 줄줄 나오는 걸 보면 현은 확실히 이쪽인 것 같았습니다. 현뿐만 아니라 승필과 수영도요. 아니면 그저 솔직하게 인정하기 쑥스러운 걸지도 모르겠고요.
종말의 날에 영화를 보거나, 보려는 사람을 시네필이라고 하지 않으면 누굴 시네필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이미 제목부터가 시네필(들)의 마지막 하루인걸요.
어쩌면 영화가 주요 소재니, 영화처럼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제목에 쓰인 마지막은 새 출발을 의미하거나, 무너질 줄 알았던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앞날이 깜깜해도 일단 새로운 하루에서 나중에 보기로 한 영화를 볼 수 있겠다고 하거나, 이때 너무 영화를 많이 봐서 당분간은 보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시네필이 아니게 되거나 하는 말장난을 조금 곁들여서요.
하지만 분홍빛으로 물든 세상에서 오늘 처음으로 폭소하고 그 여운으로 미소 지으며 돌아보는 수영을 상상하면서는, 그런 시시한 반전 같은 게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기적이나 행운을 믿었겠지만, 이미 끝을 받아들인 마당에 그런 게 찾아오면 불청객에 더 가까울 것 같기도 하고요.
승필은 가족들에게 무사히 잘 돌아갔을까요? 세상이 이런 와중에 안락사 약을 생산하고 유통한 사람은 사명감이나 보람이 있었을까요. 모든 영화 저작권을 풀어 놓은 사회를 보면서 돈을 벌지 못하면 살아가기 힘든 자본주의 때문에 많은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모든 영화를 볼 필요는 없지만, 어떤 영화는 마지막 날에 보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