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뱀을 위한 변명’ 이었네요! 의뢰(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뱀을 위한 변명 (작가: 해도연, 작품정보)
리뷰어: Ello, 17년 7월, 조회 79

1.

아하, 그래서 제목이 ‘뱀을 위한 변명’이었군요!

한 번 읽고는 이해를 못해서 두 세 번 읽은 뒤에 실제로 그런 감탄이 나왔습니다. 제목이 잘 지어졌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면서도 글을 열면서, 글을 닫으면서 모두 쓸 수 있는, 일부러 흘려도 될 스포가 되네요. 깨닫고 나니 이렇게 기쁜 것을! ‘뱀’을 주제로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나올까 생각을 해봤었는데 기독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저라도 이런 글이 한 편 쯤은 나올 것 같았습니다. 다만 사전 지식 없는 사람도 즐기며 읽을 수 있도록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모르고 읽으면 모르고 읽는데도 색다른 맛이 있습니다.  세 번 째쯤 읽을 때엔 일단 에덴의 동산에 대해 검색하고 다시 읽었기 때문에 대강 매치가 되긴 하더군요.

왜 주인공이 첫 번째가 아닌 에베에게 더 관심을 가졌을까? 에베와 구분하기 위해 첫 번재에게 이름을 지어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과연 에베가 자신과 닮아 있기 때문에 에베에게만 관심과 애정을 더 쏟은 것일까? 같은 첫 번째와 에베에게 쏟는 애정의 차이에 대해 궁금증이 많았었는데 그 부분도 해소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에게 아담을 연상 시킬 수 있는 이름을 지어서 불러줬다면 이미 상징적인 요소가 가득한 작품 내에서 보다가 좀 지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다 알고(!) 저만 궁금해했던 첫 번째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어쨌거나 창세기에서도 뱀은 이브에게 더 집중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에베가 에바로 오타난 곳이 한 곳 있습니다. 거의 마지막 부분이에요. )

 

2.

여러분은 청개구리가 왜 비오기 전에 우는지 알고 계시죠? 그리고 왜 닭이 지붕에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는 지도 알고 계실 겁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해가 어떻게 생기고 달이 어떻게 생겼으며 산과 바다는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생겼으며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와 같이 나를 둘러싼 큰 자연부터 앞서 언급한 개구리가 우는 이유, 닭이 하늘을 쳐다보는 사소한 이유까지도 모두 궁금해 했을 거예요. 그런 궁금증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창세신화에서는 미륵이나 석가가 대결을 하는 경우도 있고, 대별왕 소별왕이 대결을 하는 경우도 있고, 당금아기가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있는 김쌍돌 본을 살펴보면 미륵과 석가의 대결에서 석가가 거짓으로 대결을 이기고 인간세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엔 악이 횡행하다고 하죠. 물과 불의 근원을 알려준 공으로 쥐가 천하의 뒤주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성경의 창세기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라는 물음이 핵심입니다. 왜 인간은 옷을 입게 되었나, 왜 부끄러움을 알게되고, 왜 고통 받는 곳으로 내쫒기게 되었을까 와 같은 물음에 답을 내놓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인거죠.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리진 이야기에 ‘교활함’을 상징하는 뱀만은 대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브를 꼬셔서 타락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던 사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단지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완벽했던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당하게 만드는 것이 뱀의 진정한 목적이었을까요?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한치의 의심도 없었던 그저 선악과 나무를 감싼 채 이브를 향해 유혹의 눈짓을 보내던 뱀의 목적을 드디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려서 든 의심이었네요. 이런 거대한 발상의 전환을 했다는 점에서 아낌없이 갈채를 보냅니다.

 

3.

사실 기독교적인 요소를 모르고 봐도 충분히 또 하나의 ‘창세신화’를 보는 것 같아서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목이 나온 이유와 창세기의 어떤 부분에 집중을 해서 궁금증을 유발 시켰는가에 대해 알고 나자 감탄이 나왔기 때문에 마이클도, 에베의 주인도 아들이라는 사람도 모두 정확히 알고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대강 짐작이 가는데 에베의 주인은 누군지 잘 모르겠네요. 그가 하나님인 걸까요? 그렇다기엔 너무 자신의 잣대로 거침없이 잔인해 질 수 있어서 하나님이라기 보다는 제우스를 연상케 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처럼 질투하고, 잔인하고, 흉폭하기까지한 신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어떤가요. 주인공은 선악과(빨간 포도알)를 권하기도 하고, 동물을 창조하는 연구원이기도 하죠. 관리하러 출장도 나오고요. 그는 창조주임과 동시에 사탄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식견이 짧아 물음으로만 끝내야겠습니다. 어쨌거나 팔다리가 잘리고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채로 살아가는 걸 보면 최고의 지위에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 원인은 사랑에 있었다는 점이 너무 아이러니 했습니다. 마이클이 구해주려면 끝까지 제대로 구해줬으면 좋았으련만. 결국엔 에베의 자식들 까지 서로 죽이게 만들 때는 이걸 속죄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에베의 주인은 성경에 나오는 누군가가 맞긴 한걸까란 의심이 들었습니다.

 

4.

궁금증만 한 보따리인 내용은 일단 미뤄두고 에베가 빨간 포도알을 먹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 에서도 느꼈지만 힘주어 그리고 싶은 장면을 잘 그리시더라고요. 그 순간에 대해 아무리 늘여뜨려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그릴 수 있는 재주가 있다고 전하고 싶네요. 면발이 넘어가는 그 순간, 에베가 빨간 포도알을 입에 문 순간 같은 장면이요.

에베가 갈구하던 포도알을 입에 넣었을 때 온 몸이 달아오르면서 첫 번째에게 달려가죠. 그리고 첫 번째가 포도알에 대한 탐색을 할 시간도 주지않고 얼굴에 박아버립니다. 그리고 빨간 포도즙이 둘 사이를 흐르면서 몸이 얽혀가는 그 장면이 너무도 관능적입니다. 이제껏 에베와 첫 번째를 가로막고 있던 생에 대한 환희를 일깨우면서 눈을 뜨는 행위가 아름다웠습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진실로 뱀을 위한 변명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만 아끼고 사랑하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요. 에베에게 삶이 무언지, 살아있다는 것이 어떤 건지를 알려주고, 또한 내가 너에게 자유를 주고 이유를 주고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예요. 주인공도 분명 에베와 같은 희열을 느꼈을 거라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걸 다 줬으니까요.

 

5.

리뷰가 앞 부분에 대해서 치중 된 느낌이 드네요. 아무래도 ‘속죄’ 이후의 삶이 조금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팔 다리를 자르는 것까지는 동물에게도 있던 다리를 자르고 다른 걸 붙이는 기괴한 설정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마이클이 이 또한 그 분의 뜻이라고 했을 때에는 역시 다시 그 분이란 하나님이 아닌가보다?!??라는 의심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묘하게 잔인한 구석이 있어요.

게다가 자유의지를 박탈 당하고 황무지로 쫓겨난 이후에는 흐릿하게 흘러가서 몰입도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졸졸 흐르다 바다를 만나 넓고 잔잔하게 흩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저 역시도 주인공처럼 ‘주인공의 죄가 이렇게 큰건가? 이렇게 에베의 주인이 하자는 대로 계속 하는 건 옳은건가? 옳지 않은 행위를 하는데 어떻게 참회고 속죄지?’ 이런 생각이 자꾸 들기도 했고요.

그래서 주인공이 에베 주인의 명령으로 행할 수 밖에 없었던 일들은 스스로에게 주는 벌이었고, 마지막에 용서를 빌러가는 장면이 진정으로 참회의 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돌고 돌아 바른 길을 찾았으니 아마도 주인공은 용서를 받을 수 있겠죠.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네요.

이번 리뷰를 준비하면서 덕분에 저도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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