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들고,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만든다. 시간의 역설, 타임 패러독스. 타임머신이 등장하고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면 반드시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처럼 말이다. 시간이 선행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어느 쪽이 원인이고 어느 쪽이 결과인지 그 인과관계에 대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지점에서 아주 매혹적이고 기발한 타임리프 물을 만났다.
어머니의 오십 번째 생일을 맞아, 나는 임신 8개월차에 접어든 아내와 함께 시골 부모님댁으로 향한다. 작가인 아버지와 여전히 지나가던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어머니는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살아왔다. 외딴 시골에서 은둔자처럼 사는 부모에게는 친구는 물론 친척도 없었다. 그렇게 모인 네 식구는 어머니의 생일 파티를 시작했고, 초의 불을 끄고 소원을 빌어야 하는 순간, 어머니는 다들 눈을 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어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흔적도 없이, 그 어떤 기척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이유를 아는 것처럼 그저 엄마를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뒤 쇠약해져 손자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신다. 아내의 출산예정일을 겨우 일주일 앞두고서. 나는 장례를 치르고 유품 정리를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갔다가 아버지의 자전 소설을 발견한다.
‘이 소설은 나의 인생, 단 한 명의 독자는 나의 아들일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버지가 쓴 소설, ‘미래의 여자’에서 시작된다. 무명 소설가인 윤이 첫 번째 아내를 잃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가 시간 여행의 허점을 통해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50년 후 미래로 가게 된 그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달라지게 된다. 가사도우미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되어 있고, 곤충 로봇이 상용화 단계에 접어 들어 있고,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타임 트래블사가 존재하는 시대라는 흥미로운 배경에서 개인이 비용을 들어 시간 여행을 할 경우 벌어질 수도 있는 타임 패러독스를 이용한 이 이야기는 판타지이지만 로맨스처럼 읽히기도 한다. 선녀와 나무꾼 같은 우화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세련된 현대물로 풀어내어 뻔하지 않게 보이는 것 또한 작가의 능력일테고 말이다.
“걱정하지 마요. 당신이 비록 이 우주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나와, 우리 아들과 함께 한 시간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사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는 SF액션과 스릴러에 가장 적합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보다 더 끝내주게 어울리는 장르는 바로 로맨스가 아닐까 싶다. 만약 당신이 시간 여행자라면, 그래서 과거나 미래로 가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어떨까. 어차피 당신은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야만 한다. 각자가 뒤에 남기고 온 전혀 다른 시간대의 현실 세계를 두고, 한 낮과 한 밤을 보내는 남자와 여자, 라는 설정만으로 누군가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이 작품이 로맨스인 척 하지 않는 로맨스라서 더 여운이 남고, 좋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