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에 대한 낡은 생각들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소녀전선 팬픽] 404 Not Found (작가: 골목길냥이, 작품정보)
리뷰어: BornWriter, 17년 7월, 조회 363

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팬픽을 싫어한다. 싫어하다 못해 조금은 깔보는 경향도 있다. 이러한 편견의 까닭을 알 수 없어서, 꽤 오랫동안 곤혹스러웠다. 지금이라고 마땅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짧은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몇 자 적어본다.

 

1. 명확한 독자층, 공유된 세계관

한국 고등학생의 장르문학이라면 판타지와 무협으로 양분된다고 봐도 무방할 터다. 나는 톨킨 옹 등의 클래식 판타지에 심취해 있었지만, 대여점 표 무협지를 하루에 대여섯권씩 읽는 애들도 있었다. 그 녀석들을 따라 대여점에 발 디뎠을 때 내가 놀랐던 것은, 무협지가 몇 개의 책장에 걸쳐서 빼곡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몇 권의 무협 시리즈를 읽어보았다.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적다고도 말 할 수 없는 분량의 책을 읽었다. 그런데 비뢰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모든 무협지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제갈세가가 어떻고 무당파가 어떻고. 거의 모든 작품이 이러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근현대의 판타지가 톨킨으로부터 촉발된 것처럼, 무협 역시 중국의 김용으로부터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친구 녀석이 내게 말했다.

다만, 판타지가 공유하는 ‘설정’에 비해 무협에서 공유하는 ‘세계관’은 그 규모부터다 다르다. 판타지는 엘프나 드워프에 대한 설정의 유사성을 보이지만, 각자의 세계관 자체는 같다고 볼 수 없다. 타자의 ‘드래곤 라자’는 에루와 아이누의 노래로부터 탄생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무협은 시대적 배경과 지리적 배경까지도 장르의 일부로서 작동하고 있다. 이 점이 내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팬픽은 그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내 주제에 문자를 써보자면 팬픽은 ‘2차 창작물’ 중 하나이다. 2차 창작물이라는 것은 1차 창작물(원작)으로부터 파생되어나온 작품이다. 이러한 연유로 2차 창작물은 많은 부분에서 1차 창작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2차 창작자가 하고싶은 대로 막 떠들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팬픽은 2차 창작자로 하여금 1차 창작물의 굴레에 굴종하게 만들지만, 굴종의 댓가는 달다.

팬픽의 주요한 독자층은 1차 창작물을 향유하는 팬층이다. 이들은 이미 세계관과 캐릭터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어서, 2차 창작자는 세계관에 대한 설명이나 캐릭터에 대한 묘사에 집중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분은 팬픽의 확장성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이다.

 

 

2. 그들만의 리그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가령 캐릭터의 이름이 그러했다. 소녀전선 팬픽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HK416은 H&K 사의 총기류일 테지만, 최전방의 자주포 사격지휘병으로 근무했던 내게는 총기류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숫자 열네 자리로 된 지정좌표의 식별 코드가 더 먼저 떠오른다.

니어 오토마타의 2B가 그렇듯, 이름 자체가 숫자와 알파벳으로 된 건 ‘그 자체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게 더 끔찍했던 것은 이 작품 내에는 세 인물이 등장하는데, 단 한 번도 이들의 묘사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소녀전선을 하는 유저라면 이 세 캐릭터가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인지 알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이 어떤 캐릭터인지 알지 못하다. 만약 작가가 소녀전선 팬카페에 이 글을 올렸다면 지금과 평가를 달리 했을 터다. 그렇지만 여기는 브릿ㅉ다.

나이도 덜 먹은 주제에 꼰대처럼 ‘얌마 여긴 브릿ㅉ야 색햐, 그 정도 수준으로는 국물도 읎어!’ 같은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는 브릿ㅉ다’라고 말한 까닭은, 여기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소녀전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작가가 브릿ㅉ에 팬픽을 올리고자 했다면 팬카페에 올리는 식으로 소설을 작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차 창작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자에게 2차 창작물을 읽게 만들고자 한다면, 2차 창작물은 1차 창작물에서 소개하는 세계관과 캐릭터 설정 등에 대하여 충실하게 분량을 할애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았기에 이 작품은 소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렸고, 브릿ㅉ 독자에게는 상당히 불친절한 작품이 되어버렸다.

 

 

3. 압축적인 캐릭터, 당위성의 실종

이 작품에서 대다수의 캐릭터는 매우 압축적인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전투 상황을 제외하면 언제나 겁이 많고 게으른 G11이 속이 시커먼 자신의 직속상관을 무서워한다는 건 HK416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 한 문장 속에 G11과 UMP45(직속상관)라는 캐릭터의 설명이 다 들어있다. G11는 전투 상황을 제외하면 언제나 겁이 많고 게으르며, 자신의 직속상관을 무서워한다. UMP45는 속이 시커멓다. 캐릭터에 대한 이러한 단편적인 ‘설명’은 작품의 몰입도를 떨어트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품 내에서 이러한 캐릭터 설명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겁이 많은 녀석이 G11이 무서워하는 직속상관의 무릎을 베고 잔다는 걸 강조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UMP45가 속이 시커먼 건 스토리와 무슨 상관일까.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보였다. 그리고 독자는 압축적인 성격 묘사로부터 캐릭터의 겉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나는 여리여리한 소녀(G11)와 와이셔츠가 잘 어울리는 커리어우먼(UMP45)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대단히 낡은 것일 뿐만 아니라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떠올려주었으면 하는 외형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지난번에 자유게시판에서 인물 묘사에 대해 논했던 적이 있다. 나는 인물 묘사의 필수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많은 분들이 인물 묘사의 생략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요는 ‘많이 쓰는 것 만큼이나 많이 생략하는 것도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생략은 생략함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략 그 자체가 무언가를 목적하고 있다. 가령 어느 분께서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캐리’를 예시로 들어주셨는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소녀의 외양에 대해 묘사하지 않더라도, 캐릭터가 소녀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느냐고. 이 작품에는 그런 것마저 없다.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여기는 소녀전선 팬카페가 아니라 브릿ㅉ이다.

또한 주인공(인 거 같은) 캐릭터 ‘HK416’의 성격은 괴상하다. 일단 이 작품 내에서 유일하게 입체적인 캐릭터가 ‘HK416’이다. 그렇지만 입체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좋다는 뜻은 아니다.

주인공 격 캐릭터의 성격이 너무 래디컬하다. 개머리판으로 사람 팬다는 다분히 5공 때 병장같은 말투로 짜증을 내다가도, 후임(?)을 위해 무릎을 내어준다. 그리고 즉시 후임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이러한 일련의 감정 변화가 원고지 한두 장 안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아마도 작가는 이 캐릭터를 전형적인 츤데레로 만들고자 했던 거 같은데, 내가 느끼기에는 대단히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고자 시도한 점은 높이 사지만, 이렇게 과격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은 권장할 수 없다.

 

 

4. 모호한 스토리와 이해할 수 없는 제목

UMP45가 전장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이 작품은 끝을 맺는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냐면 작품 내에서 이러한 결말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9를 부르는 UMP45의 모습이나, 전장으로 떠나는 모습은 많이 뜬금없었다. 만약 이러한 결말을 적고자 했다면 이 작품의 시점은 HK416가 아니라 애시당초 UMP45였어야 한다. 왜냐하면 UMP45가 HK416에게 G11를 맡기는 것이 ‘전장으로 떠나기 위해서’인데, 그것을 다 읽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UMP45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전장으로 떠나기 위해 G11을 맡기는 그 자체에 스토리를 집중했으면 보다 괜찮아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서 이 작품의 스토리는 대단히 모호하다.

제목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이 작품의 소개란에 작가는 ‘404 소대의 일상’이라고 밝혀두었다. 대한민국 육군 소대에 404부대나 404대대도 아니고 404 소대가 있으려면 1소대부터…, 따위의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404 소대의 일상과 404 Not Found 사이의 연관점을 이 작품 내에서는 찾기 어렵다. 구글에 검색을 하고 나서야 404 Not Found가 소녀전선에 등장하는 소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04 Not Found 소대를 줄여서 404 소대라고 부른다고. 작가가 이러한 의도로 제목을 지었다면 (세 번째 이야기하지만) 여기는 소녀전선 팬카페가 아니다. 브릿ㅉ이다. 기반지식(1차 창작물에 대한 이해)이 없는 독자에게 2차 창작물을 읽게 만들고 싶었다면, 이보다 몇 배는 더 공들여 설명했어야 옳다고 본다.

 

 

 

이 작품을 빌어 팬픽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의 낡은 생각들을 조금 풀어보았다. 내가 팬픽을 좋게 생각지 않는 이유는 돌이켜보니 간단했다.

 

1. 1차 창작물에 대한 이해가 없는 독자에게 특히 매우 불친절하다.

2. 2차 창작물이 1차 창작물보다 뛰어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물론 모든 2차 창작물이나 2차 창작자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비뚤어진 예시를 들어보자면, 나는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플레이해본 적 없지만, 몬헌의 에로책은 재미있게 읽었다(다시 생각해보니까 이 예시는 정말 비뚤어져있다. 몬헌의 에로책 같은 작품의 경우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굳이나 보고 딸이나 친다는. 그렇기에 몬헌의 에로책은 2차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자체가 새로운 원작이 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듣기로는 Fate 시리즈의 ‘Fate/strange Fake’도 일종의 팬픽적인 면모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분명 이 작품도 더 좋게 개선될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원작을 모르는 사람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2차 창작물을 쓰시길 바라는 마음에 말이 많았다. 이 작품의 작가는 이 단편 하나 올리고 다른 활동이 없지만, 이 리뷰를 읽으면서 씁쓸함의 까닭을 곱씹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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