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관련된 가벼운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법칙이죠. 그 정확한 비율까지 지켜지는 일은 흔치 않겠지만, 중요한 건 사소한 일에 무신경하고 관행적으로 대응한 결과가 큰 파국을 낳는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적사각님의 <레코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작중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은 잘 뜯어보면 비어켄 사건의 징조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던 불법 침입 알람, 안수가 겪고 있는 루나 드링크 금단 증상, 자판기에서 다 떨어진 루나 드링크, 에너지 배선 할당 문제와 소프트웨어 문제, 그날따라 유독 심하던 생리현상, 그리고 열려 있던 문과 사라진 CCTV 기록까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징조들이 모여 거대한 비극을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보면, 연구소의 자잘한 문제와 평소 안수의 생활 습관, 그리고 약간의 미스터리 정도가 원인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대형 사고와 그 징조를 방치해온 원인이, 그렇게까지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무신경과 관행 너머에는 항상 정치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지구연합과 루나시티의 정치적 갈등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비어켄 사건 이전에도 해당 지역에 연구소가 세워지는 것에 대해서 갈등이 있었습니다. 비어켄 사건 그 자체도,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도 역시 두 세력의 정치적 갈등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징조라도 지구연합과 루나시티의 정치적 갈등에 쓰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주인공 안수의 습관마저도, 일종의 신호나 암호라고 생각할 정도가 됩니다. 첨예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 개개인은 갈등을 굴러가게 하는 톱니바퀴이자, 게임에 쓰이는 카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소중하거나 필수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그저 언제든지 교체가 가능한, 사소한 것에 불과하죠.
사회, 국가, 이념, 정치 앞에서 개인은 사소화됩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와 집단이 개인에게 벌이는 구조적 폭력과 더불어, 우리는 약간 결이 다른 부분도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무대의 장치로도 쓰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주목받는 소수라도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합니다. 사실 안수가 아니었어도 상관없었을 겁니다. 작품 수정 전의 이름인 알렉스여도 상관이 없었을 겁니다. 저의 미숙함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알렉스에서 안수로 이름이 바뀐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그 위치에는 누가 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개개인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정작 우리의 입장은 어떤가요? 주목을 받지 못하는 개인이든, 주목을 받게 된 개인이든, 또 주목받기를 원했느냐 원하지 않았느냐와 상관없이, 거대한 구조가 일으키는 폭력은 너무나도 거대합니다. 안수는 물론이요, 비어켄 사건으로 인해 비가역적인 피해를 본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모두 이용당하고 침묵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 책임소재와 피해보상보다 지구연합과 루나시티 사이의 실험 통제권으로 싸움이 넘어간 것은,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그 거대한 구조 덩어리들의 노골적인 의도가 보입니다.
안수는, 어쩌면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비어켄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을 정말 제공했을지도 모르지만,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거대한 구조적 폭력에 휘말렸습니다. 평화를 잃고, 이름을 잃고, 가족과 헤어지고, 원하지도 않는 곳에서 숨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자신을 찾아낸 암살자가 나타나서 자신을 죽여줬으면 하는 바람까지 생겼을 정도로요. 하지만 그런 바람도 무색하게 아침 해는 다시 떠오릅니다. 사소한 개인의 소원 따위를, 세상이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으므로.
그 대신 서쪽으로 저무는 달과 달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눈이 계속 안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레코드>라는 제목은 단순히 안수가 놓쳤던 CCTV 레코드만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는 안수에 대한 거대한 시선들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적사각 작가님의 <레코드>는 지구와 달이라는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쓰고 있습니다. 사실 거대한 정치세력 간의 갈등 안에서 사소화된 개인을 다루는 데에 우주를 배경으로 삼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계관이 확장되면, 자연스럽게 구조는 그에 맞춰 거대해지기 마련입니다. 개인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말이지요. 어찌 보면 과장법과 대비의 극대화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더욱 안수에게 공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구조의 폭력은 본래 교묘한 법이라, 방관자 입장에서는 눈치채기 힘든데, 그러한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도 이러한 과장과 극대화 덕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적사각 작가님의 세계관 설정이 탁월하게 작용했다는 것이지요.
적사각 작가님의 루나시티 이야기는 <레코드> 외에도 더 있다고 하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저도 시간 날 때마다 한 편씩 읽어나가며, 이렇게 비대해지고 불균형이 더욱 극대화된 세계 안에서 개인은 어떻게 생존하는지 지켜보고자 합니다. 이것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레코드>가 될 테니까요.
좋은 작품을 써주신 적사각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