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동경국에 아들 아홉 형제를 둔 버물왕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위로 삼 형제와 아래로 삼 형제가 시름시름 앓다가 하루아침에 모두 죽었습니다.
남은 세 아들도 어린 나이에 죽을까 하루하루가 불안하던 버물왕에게 어느 날 웬 스님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세 왕자님의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왕궁에 계속 머물면 열다섯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미 왕자 여섯을 잃었소. 어찌 살릴 길이 없겠소이까?”
“내일이라도 왕궁 밖으로 내보내 3년 동안 세상을 떠돌게 하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광양 땅에 과양각시라는 요물이 살고 있으니, 그곳엔 절대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송언, 『저승사자가 된 강림도령』, 한림출판사
저승사자 강림이 차사가 된 이야기, 작자 미상의 제주 신화 『차사본풀이』에는 위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경국에 살던 버물왕에게 아들이 아홉 있었는데 모두 단명하고 셋만 남았다. 남은 아들들에게 주어진 목숨도 본디 짧다는 걸 알게 된 버물왕은 스님의 권유대로 아들을 집 밖으로 보낸다. 그러나 배가 주려 금기를 어기고 과양각시의 집에 들어간 세 아들은 각시의 꾐에 넘어가 잔인하게 목숨을 잃는다. 그들의 시체를 모두 연못에 던진 이후 과양각시는 태몽을 꾸고 세 명의 아들을 낳지만, 한날한시에 과거 급제를 한 아들들은 각시에게 인사를 올리던 중 모두 돌연사한다. 알고 보니 그녀의 아들들은 버물왕 아들들의 환생이었다. 염라대왕에게 사람을 죽였다는 걸 들킨 과양생이 부부는 몸이 찢기고 빻아지는 형벌을 받게 된다.
전형적인 신화 구도이지만, 지금 읽어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차사본풀이』의 과양각시 설화는 이야기 자체가 대중에게 익숙하지는 않으나,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자극성과 환상성, 신비성을 모두 갖춘 민담이다. 한날한시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버물왕의 세 아들들이 살인자의 집에 환생해 같은 나이에 죽는다. 그들의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 권선징악을 상징하며, 지금 콘텐츠 창작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인 ‘환생’ 모티프에 부합한다.
과양각시 설화는 충분히 다양한 서사, 특히 공포, 추리, 스릴러 장르로 재창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에 기름을 붓는 방식으로 버물왕의 세 아들을 죽여 연못에 빠뜨리는 과양각시의 계략이나, 염라대왕에게 살인을 들킨 과양생이 부부의 몸이 빻아져 가루가 된 것, 그 가루가 모기와 각다귀로 환생했다는 등의 상상은 극단의 잔혹함과 함께 묘한 선악의 인과 관계를 드러낸다. 이쯤 되면 원형 설화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과양각시 설화가 대중에게 왜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하기도 하다.
이처럼 생소하지만 흥미로운 민담은 그것을 발굴한 창작자에게 무한히 확장되는 상상의 폭을 선물한다. 아직 거의 시도되지 않은 이야기, 낯선 원형 설화는 그것 자체로도 충분한 매력이 있다. 대중적인 설화를 택해 새로운 글을 쓰기는 쉽지 않지만, 아무도 몰랐던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은 비교적 수월하다. 조금만 비틀어도 이미 독자에게 새롭기 때문이다.
김은애 작가의 단편 〈과양각시의 아들〉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과양각시 설화에서 시작된 소설이다. 짧은 분량 안에서 현대를 배경으로 발생하는 살인과 환생, 그리고 빙의는 과양각시 설화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두 이야기가 완전히 같은 구조는 아니다. 오히려 제목이 밝혀주지 않는다면, 이제 막 도입부에 선 독자는 아무도 이 단편이 과양각시 설화를 바탕으로 했음을 알 수 없다.
기괴하게 잘린 채로 동네 뒷산에서 시신의 손목이 발견된다. 그걸 발견한 아이는 남들보다 조금 어리숙한 성격인데, 사리 판단이 불가능해서인지 자신이 가져온 손목을 산삼인 줄 알고 우걱우걱 씹어먹는다. 사람들은 아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경악한다. 이후 아이는 크게 앓는다. 기도로 지극정성인 아버지의 마음이 닿았는지, 아이의 몸은 점점 회복된다. 사람의 손을 씹어 먹던 아이의 모습이 생생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성격이 본래 그렇다는 것을 안 친구들은 다시 창식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마을에 하나의 충격으로 끝이 날 법했던 ‘손목 사건’은 이후 아이의 성격이 종종 완전히 남처럼 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며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후 독자는 이 소설이 과양각시 설화의 ‘빙의’ 소재를 바탕으로 하였음을 알게 된다. 빙의된 아이를 통해 사람들 앞에는 완전히 경악할 만한 사건과 그것의 진실이 펼쳐진다. 작가는 이야기의 후반에, 그리고 제목에 한 번씩 과양각시 설화의 내용과 인물을 인용한다. 창작된 단편 소설이 과양각시 설화를 바탕으로 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선, 설화를 소설에서 떼어 놓고 이야기해 보자.
그러니까, 동네 바보 창식이가 산에서 잘린 손목을 가지고 내려온 사건부터 시작하자는 말이다.
심 봤다! 심 봤다!
〈과양각시의 아들〉은 동네에서 바보 취급을 받는 창식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의 진실을 찾아가는 일종의 추리 미스터리 소설이다. 그 과정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차사본풀이』 내에서 신비로운 잔혹성이 두드러지는 과양각시 설화를 차용했고, 덕분에 독자는 하나의 이야기를 다방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소설의 특징은 ‘창식’이라는 인물이다. ‘창식’은 어딘가 어수룩하고 동문서답을 일삼는다. 이름자를 쓰지 못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건 예사고, “욕구와 행동이 제어”되지 않는다. 창식은 흔히 ‘시골에 사는 어눌한 아이’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창식의 캐릭터는 한순간 소설의 분위기를 서늘하게 만든다. 상황 파악이 늦는 성격 탓에 삼인 줄 알고 사람의 손목을 캐온 장면에서 으스스함은 시작된다.
공포 소설에서 사리를 제대로 판단할 줄 모르는 인물은 종종 이성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조성하곤 한다.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는지 인지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누군가에게 잔혹한 행동을 배우거나, 그런 장면을 본다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한 채 모방할 위험도 있다. 어른의 몸이더라도 유아처럼 행동하거나, 잔인함의 단계를 조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1
사리 분별이 어려운 인물의 잔혹성은 독자에게 충격을 준다. 사람이 사람의 손목을 캐서 산삼을 먹듯 씹어먹는 행위는 일반적인 판단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욱 큰 공포감을 준다. 창식의 어수룩한 면모는 그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후 그에게 손의 주인이 빙의되었을 때, 평소처럼 ‘순수하게’ 행동하지 않는 창식의 모습은 또 다른 섬뜩함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은 인물의 캐릭터가 명확하다. 서술자 ‘나’는 관찰력이 뛰어나다. 그는 창식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며 곱씹는다. 그가 창식을 보는 눈은 매우 꼼꼼하다. 독자는 다른 사람보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서술자의 시선에 따라 더욱 세심하게 창식을 관찰한다. 그러나 창식의 친구들은 창식의 행동 변화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음으로써, 그가 귀신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신 썼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여전히 창식이 바보인 줄로만 안다.
한편 이런 ‘나’와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창식은 위에서 말했듯, 어수룩한 한편 잔인하고, 무모하다. 그런 창식을 통해 밝혀지는 건 아버지의 더 잔혹한 살인이다. 소설의 초반에는 창식의 잔혹한 모습이 부각되지만, 후반부에서는 창식 아버지가 충격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죽인 전말이 밝혀진다. 창식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다른 아버지들처럼 평범하다. 그러나 그가 아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든 행동은 자신의 범죄를 들킬까 하는 두려움의 표출이다. 창식의 어수룩함을 보는 시선이 폭력적이지 않고, 악인을 악인답게 그린 이 소설은 인물이 탄탄히 잡혀 있다.
결말이 밝혀지는 후반부에서는 창식의 실종이 발생한다. 이 실종은 과양각시 설화와 조금 다르다. 창식도 죽은 아이처럼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하지만 귀신에 빙의된 창식이 사라졌다는 내용은 이후 어떤 사건이 이어질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원한이 있는 귀신, 그것이 깃든 몸은 복수를 하려 할까, 아니면 새로 얻은 몸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까. 확실한 것은 아마 이 마을에서 다시는 창식을 볼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이 소설은 인물, 사건, 배경의 구성은 완성도가 매우 높다. 암시와 복선 또한 인과성을 지닌 채 이어진다. 원형으로 삼는 ‘과양각시 설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플롯과 인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화의 재창작 과정은 양날의 검과 같다. 원전이 있는 소설의 경우, 그 내용이 원전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지는 않은지, 단순히 원전과 재창작에 시간의 경과만 있을 뿐,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와 진행에 유사성은 없는지를 면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김은애 작가는 설화의 재창작에 남다르게 새로운 시각을 가진 작가다. 남들은 잘 모르는 원형 이야기를 찾는 눈,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기술, 인물과 사건과 배경의 균형을 이루는 감각이 보통 이상이다. 그런 작가의 장점이 이야기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원전 이상의 신선함만 더해지면 된다. 〈과양각시의 아들〉은 아직 원전의 경계 안쪽에 있다. 민감한 독자는 이 소설의 제목과 내용이 과양각시 설화에 과히 기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원전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소설, 그런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원전과 각색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얘, 너 과양각시의 아들 이야기를 아니?
전술하였듯, 〈과양각시의 아들〉은 과양각시 설화에 크게 기대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직접적인 언급이 잦다. 창식이가 산에서 삼인 줄 알고 캐온 사람의 손가락이나, 그것을 먹고 환생한 귀신이 창식의 몸에 깃들었다는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이 장면은 과양각시 설화 속 내용과 거의 같다. 달라진 것을 찾자면, 현대적으로 설정된 인물과 배경으로 인한 사건의 진행 정도다. 과양각시가 연못에 핀 세 송이 꽃을 꺾어 처마에 매달았더니 손 모양이 되었다. 그것을 화톳불에 넣어 생긴 구슬을 먹어 버물왕의 세 아들이 환생한 아이 셋을 낳았다. 소설에서는 꽃과 구슬이 삼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내용들은 원작에 기대고 있는 것이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설화가 작가의 시선이라는 렌즈를 통과해 나름의 재해석을 거쳤기 때문이다. 물론 좀 더 신선한 인물이나 사건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 작가가 좀 더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원형 설화가 필요 이상의 빈도로 자주 인용됨으로써 내용의 신선함이 반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설화의 언급은 직접적이다. ‘과양각시’라는 단어를 매번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과양각시’에 대한 정보는 크게 세 번 등장한다. 제목과 인물의 대사, 행동을 통해서다. 셋은 모두 직접적이다. ‘과양각시의 아들’이라는 제목을 보고 내용을 읽자마자 독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보’를 검색하게 된다. 그리고 원전을 읽으며 그것과 이 소설의 내용을 비교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이다. 세 번의 반복은 완전하다. 마치 독자에게 원전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제목에 이미 쓰인 설화의 이름을 창식의 입을 통해 재발화하고, ‘나’의 행동으로까지 반복할 필요는 없다. 사실 제목에도 쓰지 않는 게 좋다. 이미 존재하는 설화를 재사용한 제목은, 독자에게 원형 민담을 소설보다 먼저 제시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민담을 현대식으로 각색할 때는 원형 설화를 새로운 이야기에 얼마의 비율로 반영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과양각시 설화를 아는 독자들은 제목과 내용에서 여러 번 원전을 언급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 ‘과양각시’라는 단어가 자주 반복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독자가 과양각시 설화에 익숙하지 않을 것을 작가가 의식했기 때문이다. 대중적이지 않은 설화로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설화를 독자에게 단순히 ‘설명’하려는 실수를 범하기가 쉽다. 그러나 원형 설화와 무관한 것처럼 이야기를 쓴다면, 독자에게는 소설을 기존 설화와 비교하여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조차 없잖은가. 이런 딜레마가 있을 때, 소설에 설화는 얼마나 삽입되어야 할까.
원전은 소설의 제목과 내용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최대한 피하고 이야기의 도입이나 끝에 짧게 인용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게 하면 독자는 재창작된 소설과 원전을 자연스럽게 분리하며, 각각의 내용에 온전히 집중한다. 제목은 작가 고유의 감각으로 새롭게 정함으로써 설화의 메시지가 소설보다 앞장서지 않게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다시 쓰면 원전에 기반해 소설을 해석할지 결정하는 것은 이야기를 끝까지 다 읽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 경우 독자는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볼 것인지, 설화에 기대어 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사실 설화를 소설 안에 재배치하는 것은 온전한 작가의 몫이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 역시 창작에서 매우 중요하다. 읽는 사람에게 이미 익숙한 특정 주제와 메시지, 또는 비슷한 내용이 같은 이야기 안에서 높은 빈도로 반복되는 것은 소설의 약점이 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넣거나 덜어낼 부분은 무엇인지를 치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김은애 작가에게는 하나의 설화를 독창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눈과 빛나는 감각이 있다. 문장의 완성도 또한 높고 비문과 오문이 적다. 이미 매력적으로 설정된 이 소설의 배경에 인물과 사건이 추가로 배치된, 그것들을 개연성 있게 이어낸, 무게감 있는 분량의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바람도 벌써 있다. 전반적인 구성과 세부 요소 배치에 신경 써 수정한다면, 〈과양각시의 아들〉은 충분히 독자에게 사랑받는 소설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더 나아가 대중에게 익숙지 않은 다른 설화를 발굴해 꾸준히 이런 단편을 써내는 것도, 작가로서 독자에게 각인되는 방법이다. 설화의 창작에서 장르는 무수히 갈릴 수 있지만, 특히 김은애 작가에게는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내의 사건을 기묘하게 비틀어 짜내는 안목이 있으니, 어떤 설화를 가져오더라도 비범한 이야기가 탄생하리라 믿는다.
그 옛날 각시가 삼킨 손가락 꽃 구슬은 시골 마을 창식이가 씹어 먹은 아이의 손이 되었다. 짧지만 확실한 인상을 주는 이 소설을 발판 삼아 더 확장된 상상력이 발현되기를 바란다. 경계와 한계가 없는 이야기가 과거에서 현재로 끌어올려지길, 시간과 역사를 뛰어넘은 서사의 상호작용이 작가의 손끝에서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짧은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