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 세계를 전부 다르게 바라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때 드래스 색깔 논쟁이 유명했었죠. 같은 드레스를 보고도 일부는 흰색, 금색이 섞였다고 하고 일부는 파란색, 검은색이 섞였다고 말했습니다. 일명 흰금, 파검 논쟁. 전 이것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가 사람마다 색을 받아들이는 어떤 기능적인 면에 차이가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철저히 물리적인 어떤 차이때문에(잘 모르겠지만 눈의 조리개 기능이 차이가 난다거나 뭐 홍채나 뭐나 아무튼 뭔가 눈의 기능 차이로) 서로 다르게 본다고 생각한거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것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결국은 우리의 뇌 때문이라고 합니다. 빛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고도 뇌가 각기 다르게 해석을 한다고 하네요. 결국 우리는 하나의 색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거죠. 물이 반만 담긴 컵을 보고 물이 반밖에 없네 하는 것과 물이 반이나 남아있네 라고 하는 것과 별 다를게 없는 현상이었던 것이죠.
뭐, 그걸 흰금으로 보면 어떻고 물이 반밖에 없네 라고 느끼면 어떠냐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을 파검으로 보고 물이 반이나 남아있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애초에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인데 같은 땅을 밟고 어울려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겁니다.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 헤이트 이레이져 기능을 끄고 상대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일까? 아니면 내가 보는 세계를 다른 이에게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기능을 계속 업그레이드 해야하는 걸까? 답은 안 나왔지만(영원히 나오지 않겠지만) 어쨌든 이 훌륭한 소설은 제가 절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 역시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만드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시작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아주 적절하게 그려냈습니다. 미래에 나올 법한 장치를 이용해 서로 다른 세계를 보는 사람들의 상황을 극으로 밀어붙여 독자들이 쉽게 그 상황에 빠져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메인 메시지를 깔끔하게 전달한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덧)다만 마지막 문단에 저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다운그레이드했지만 그들이 보는 세계는 여전히 달랐을겁니다. 극으로 치닫지 않았을 뿐 설란과 시서는 여전히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겠죠. 그래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서로 다른 세계를 산다는 것을 설란과 시서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만으로도 둘은 그 서로 다른 세계에서도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