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나는 작품이 너무 떠들어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야 말로 정말 잘 쓰여진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수작이다. 이 작품은 ‘자살’에 대해서 곱씹게 만든다.
자살이란 무엇인가. 스스로를 살해하는 행동이다. 이 작품은 이미 자살한 인물이 자살예방센터에 전화를 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 상담원에게 인물은 ‘나는 이미 자살하여 도움이 필요 없다’고 대답한다. 나는 이 질의와 대답 사이에서 대단한 간극을 느꼈다. 그리고 이 간극이 극대화되는 지점은 자살한 인물의 이러한 발언이다. “그래요, 나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생각해보면 꽤나 충격적이다.
왜 사람은 자살을 하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자살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것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가끔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게임 캐릭터 리셋하듯, 혹은 좋은 아이템을 받고 시작하고 싶어서 ‘리세마라(리셋 노가다)’를 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죽고나면 조금 더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늘 불교 신도임을 부정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윤회에서 나왔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
사후세계는 늘 미지의 영역이었다.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조차도 불분명하다. 만약 사후세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자살이 어느정도는 권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타자의 작품 ‘드래곤 라자’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축제를 앞둔 농부는 몇 배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된 휴식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다. 따라서 몇 배로 맹렬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100세 시대이다. 축제를 앞둔 농부는 몇 배로 열심히 일할 테지만, 농번기 내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일하는 시간 만큼이나 쉬는 시간도 중요하다. 나는 내 10대 20대를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100살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자연적인 죽음’이라는 약속된 휴식은 너무 멀다.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시 ‘Invictus‘는 이러한 두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라면, 운명의 결말을 정하는 것은 주인인 나의 몫일 터다. 내가 내 영혼의 선장이라면, 조류를 따라 그저 흘러가게 놔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 나는 내 운명의 주인도, 영혼의 선장도 아니다. 운명이 정해주는 대로 죽어야 하고, 내 영혼이 어디를 떠돌든 관여할 수 없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라는 작가가 있다. 글쟁이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고, 책 한 자 안 읽는 사람들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아주 유명한 미국의 작가이다. 헤밍웨이는 권총자살했다. 그의 아버지가 자살하는 데 사용했던 바로 그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헤밍웨이의 자살을 두고서 다양한 이야기로 해석하려 하지만, 널리 알려진 이유는 글쓰기에 대한 집착과 도청∙감시 등을 당하고 있다고 믿는 등 정신착란 기질을 보였기 때문이다.
말년의 헤밍웨이는 더이상 자신이 젊은 날처럼 글을 쓰지 못함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두려워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려워한 끝에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이것을 두고서 ‘더이상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한다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라 나는 짐작하고 있다. 자신이 자신의 기준에 미달한다면 삶을 끝낸다. 박수칠 때 떠난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인 셈이다. 나는 이러한 자살을 두둔하고 싶다.
그렇지만 두둔치 못할 자살도 있다. 가령 거대한 빚을 지고서 채권추심을 당하다가 도피의 수단으로서 자살을 택하는 경우. 그런 식으로 생에 미련을 남기고 죽는 경우다. 타자의 장편 ‘퓨처 워커’에서는 그것을 Hjan 이라고 표현한다. (자이펀 어에서 j는 묵음에 가깝다.) 내가 질의와 대답 사이의 간격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살에 대해 떠들어댄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자살한 인물은 도움이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다가, 결국에는 도움을 청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여한(餘恨)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한을 남기는 죽음은 결국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더욱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본 작품에서 전화 받는 상담원은 우리네 사회와 같다.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뭐라도 하소연 하고 싶지만, 사회는 내게 그럴 시간 있으면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말한다. 사회라는 것은 분명 사람의 모임으로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사회의 반응은 곧 거기에 속한 사람의 반응과 동일할 것이다. 분명 초등학생 때는 한국 사회가 정이 넘친다고 배웠던 거 같은데, 왜 지금의 우리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까지도 ‘생산적’이기를 바라는 걸까.
우리는 왜 그리하여 마음이 병든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걸까. 사회비판이 통렬하여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호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나는 죽은 채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야 도움이 필요하다고 사실을 털어놓는다. 사실이 그런 것이다. 여한을 가지고 죽으면 죽어서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죽어서도 도움을 구하고자 할 정도로, 마음이 상처받은 사람을 우리는 껴안아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여 몇 자 더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