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브릿G 사이트에서 작가는 태그를 통해 글의 종류나 주제 등을 정리해둔다. 글을 다 읽은 독자에게 작가가 보내주는 일종의 요점정리이자 글의 모범답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리뷰에서는 그러한 작가의 뜻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다. 작가가 글을 읽을 때 사용하기를 의도한 ‘코스믹 호러’라는 설명서를 제쳐두고 글을 해체해서 다시 조립해볼 것이며, 이를 통해 글에서 다른 모습이 드러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작가에게는 불경한 독서법이지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이 글에서 압드 알 카디르는 세상의 끝까지 여행했다가 돌아온 인물이며, ‘나’와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하지만 코스믹 호러라는 장르를 고려해볼 때 이 대화에는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진다. 압드 알 카디르는 너무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 보통의 코스믹 호러에서 등장인물은 인간에게 악의가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관심이 있는지도 알 수 없으며,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한 존재와 마주하고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 버린다.
하지만 압드 알 카디르는 그렇지 않다. 그는 비록 매우 끔찍한 것이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고, 그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종복과 친우들이 한 선택의 이유를 댈 수 있고, 심지어는 ‘그들’이 왜 자신을 내버려 두었는지에 대한 나름의 이론도 가지고 있다. ‘나’와 압드 알 카디르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 구조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그의 설명은 소설 전개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 압드 알 카디르가 실제로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어떨까? 더 나아가 그의 종복과 친우들 또한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이해했다면 어떨까?
논의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게임 이론이다. 문제를 단순화시키기 위해 두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가정하고, 협력과 배신이라는 두 가지 선택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가장 이상적인 게임 결과는 두 사람 모두 협력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게임에서는 두 사람 모두 배신하는 것이 각자에게 가장 논리적으로 옳은 선택이 된다. 다른 사람이 협력을 선택하든, 배신을 선택하든지 간에 배신을 선택하는 것이 나에게 더 유리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다른 사람과 협력하기를 선택한다. 이는 죽고 나서 천국에 가고 싶다는 이유일 수도 있고, 또는 협력을 통해 다 같이 무언가 더 위대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공동체적인 의지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비록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배신하는 것이 더 유리할 지라도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을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끝이 모두의 파멸, 즉 모두가 모두를 배신하는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압드 알 카디르와 그의 종복 및 친우들에게 더 이상 다른 사람과 협력할 이유는 없어진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해도 천국에는 애초에 갈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인류가 무엇을 이룩하더라도 결국은 파멸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었던 도덕, 법, 종교적 교리 등은 세상의 끝에서 그들이 목격한 압도적인 이미지에 그 힘을 잃어버린다.
그 후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 모두 똑같은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머릿속에서 게임이론에 따른 협력과 배신의 결과를 검토해볼 것이며, 배신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가장 알맞은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이들 또한 똑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것 또한 깨달을 것이다. 모두가 모두에게 배신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답을 안 이상, 남은 것은 실행뿐이다. 본문을 그대로 옮겨 보겠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연인이 연인에게, 자식이 어머니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노예가 주인에게,..
그들은 이것을 ‘자비로운 광기’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선택은 완벽한 논리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펼칠 근거를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는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그저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된 불쌍한 인간들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비로운 광기’에서 벗어난 인물이 한 명 있다. 압드 알 카디르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 게임을 제대로 진행하고 있지 않다. 그는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배신으로 일관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에게 배신을 할 수 없다. 그는 게임 이론에 숨겨져 있는 한 가지 허점을 발견한 것이다. 게임 이론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규칙에 맞게 게임을 하는 것을 가정한다. 즉, 게임을 제대로 하지 않는 플레이어는 게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압드 알 카디르가 세상의 끝에서 보고 온 ‘그들’은 게임의 규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 즉 게임의 규칙으로부터 영원히 도피하고 있는 압드 알 카디르는 게임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압드 알 카디르는 글의 제목처럼 게임을 ‘초월’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왜 압드 알 카디르처럼 게임을 초월하지 못했을까? 압드 알 카디르는 시종장이 시종장의 약혼녀에게 행하는 폭력의 동기를 자신의 연인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지킨다’와 ‘보호한다’라는 개념은 ‘통제한다’라는 개념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압드 알 카디르 외 다른 이들은 통제할 수 없는 미래의 파멸로부터 잠시 동안일지라도 벗어나기 위해 게임에 참여하고, 게임 속의 규칙을 따르면서 자신이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얻는 것이다. 게임의 규칙은 이를 허락해 줄 정도로는 자비롭다. 따라서 그들이 행하는 것은 ‘자비로운 광기’가 된다.
이렇게 글을 다시 조립하면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광기가 사실은 보다 고차원적인 논리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을 지배하는 이 논리는 평범한 인간은 부정할 수도, 교섭할 수도 없으며 논리로부터 도피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코스믹 호러에 맞지 않는 등장인물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논의는 가장 코스믹 호러다운 결론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이것이 코스믹 호러 장르로 쓰인 글을 논리적으로 파헤쳐보겠다며 달려든 인간에게 보내는 ‘그들’의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용한 어구로 리뷰를 마친다.
“Learn from me, if not by my precepts, at least by my example, how dangerous is the acquirement of knowledge, and how much happier that man is who believes his native town to be the world, than he who aspires to become greater than his nature will allow.”
— Victor Frankenstein, Frankenst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