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이 스스로 태엽을 감는다고요?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태엽은 언제나 돌아간다 (작가: 뽐이에, 작품정보)
리뷰어: 이유이, 2월 26일, 조회 19

인형 놀이를 할 때마다 생각했다. 밤중에 이 인형들이 일어나서 혼자 노는 것 아닐까 하고. 내가 어리던 당시엔 그런 내용을 담은 영화들도 많았다. 토이스토리나 박물관이 살아 있다와 같은… 인형을 갖고 놀지 않게 되고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태엽은 언제나 돌아간다>가 잘 읽힌 건 과거의 상상들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태엽은 언제나 돌아간다>의 주인공은 인형들이다. 태엽이 다 풀리고 나면 죽을 운명에 놓인,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던 인형 중에서도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이는 잊기 마련. 병정 인형 텔로는 ‘태엽만 다시 감으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음에 순응해야 하나’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때마침 인형 세계를 만들고 가꾸어주던 주인의 할아버지가 죽게 되면서 텔로의 발칙한 상상은 생존의 ‘답’이 된다.

이 소설이 흥미로웠던 건 단순하게 이 인형 세계의 주인인 어린 아이를 따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인형들이 마치 ‘신’을 대하는 듯한 태도로 그를 대하는 데 있다. 태엽을 다시 감아달라고 한다거나, 태엽이 다 풀려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에 의문을 가지는 게 모두 다 ‘불경죄’인 것처럼 이야기 되는 인형 세계를 보면서 나는 종교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의 진리가 있고 그에 단지 의문을 제기하기만 해도 ‘불경’한 자가 되어 쫓겨나거나 배척되는 걸 우리는 많이도 봤다.  재밌는 건 종교라는 것의 결속력이 오늘날에 와서는 과거와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여전히 굳건한 믿음을 지닌 이들도 있지만 ‘신은 존재하되 운명은 우리의 것’이라 묻는 이들도 많다. 혹자는 신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 우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태엽은 언제나 돌아간다>는 인형들이 태엽이 풀리면 죽는다는 걸 순응하는 풍경에서 시작해 인형 세계가 모조리 사라져버릴 위기에서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 주인 아이(신적 존재’)를 보고 스스로 살아 남을 길을 모색하는 데서 끝난다. 인형들은 ‘절대 금기 시’ 여겼던 행동을 해내고야 마는데… 단지 서로의 태엽을 돌려주는 행위만으로 죽은 자도 살고, 죽을 예정이었던 자도 살아난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뭉쳐 거대한 인형 군단을 이뤄낸 그들은 아름답지만 갑갑했던 인형 세상을 떠나 스스로의 살 길을 찾아 떠난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저 어떻게든 잘 살아가길 바랄 뿐… 나는 이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해선 안 되는 것이나 여러 종류의 믿음들이 참 많다. 그것이 정말 믿을 만 해서라기보다는 이제껏 ‘믿어왔던 것’이기 때문도 크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매력적인 설정과 여러 생각을 하는 열린 결말, 아기자기한 인형들의 세상으로 잘 짜여져 있고 그 안에 ‘깊이 있는 질문’도 던져 넣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소간 아쉬움이 있었다.

병정 텔로가 ‘발칙한 의문’을 던지자 때맞춰 인형 세상이 붕괴될 위기로 흘러가는 구성이나 주인 아이와 인형들이 ‘직접 소통하는’ 부분이 그러했다. 의문을 토대로 저들끼리 부딪히는 형태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있고 붕괴 위기에 놓이거나, 주인 아이와 ‘직접 소통하며 문제 제기’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형태였다면 이야기가 좀 더 다채로웠을 것 같달까. 인형은 우리와 똑 닮았지만 우리와 이야길 나눌 수 없다는 데서 신비로움을 발생시키는 존재기에 더욱 그러했다. 물론, 이야길 나누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이 소설 안에선 ‘서로 소통되지 않는 것’이 더 매력적일 거라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 반영되어 있기에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언제나 믿어 의심치 않는 ‘진리’가 없는 세상에서도 해는 뜨고 또 지고, 아침은 오고 또 밤이 찾아든다. 우리는 그렇게, 또 그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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