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리뷰 글을 써봅니다. 평소 브릿G에서 리뷰 글을 즐겨 읽으면서도 제가 직접 쓰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요.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다시 책을 가까이하며 글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아직 부족하다고 느껴서입니다. 굳이 또 다른 변명 하나를 덧붙여 보자면 브릿G에서는 조금만 기다리고 나면 멋진 리뷰를 써주시는 분이 언젠가 나타나더라고요. 항상 기다렸다가 제가 받았던 느낌을 정갈하게, 가끔은 제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정리한 리뷰 글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곤 했습니다.
이 글도 처음엔 그럴 거라 예상했습니다. 이전에 읽고 감명받아 댓글까지 남겼는데, 어제 별생각 없이 리뷰 공모를 클릭했다가 이 작품과 눈을 마주쳐버렸습니다. 눌러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리뷰 글이 이미 여럿 올라와 있어서 클릭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불교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던 만큼 타인의 해석이 정말 궁금했던 작품 중 하나였거든요. 그리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해석도 있을 수 있었구나! 그리고 동시에 제가 느낀 감상 또한 너무 적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렇게 이 리뷰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설이 작가를 떠나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독자가 마음대로 그 글을 해석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번엔 부족하지만, 마음껏 오독해 보려 합니다. (물론 정답은 없어도 오답이 있다는 말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쓰고 싶은걸요! 틀리면 틀린 거죠, 뭐.)
서론이 길었네요. 하지만 짧은 단편인데도 여러 감상을 줄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글의 매력이기에 꼭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뒤 내용은 소제목부터 내용까지 전부 스포일러라 가렸습니다. 글이 길지 않으니, 원문을 읽고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 욕망에 대하여 서론에 살짝 언급했지만, 사실 저는 불교에 대해 아는 바가 적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아는 바가 완전히 틀렸을 수도 있죠. 하지만 원래 무엇이든 외부인의 시점으로 보는 해석이 재미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외부 관측자의 시선으로 불교에 대해 알고 본 감상을 적어보려 합니다. 개인적으로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려 부단히 애를 쓰는 종교라 인식하긴 했지만, 찾아보니 옛 가톨릭이 그랬듯이 많은 종파로 나뉘어 다양한 해석이 있는 모양이더군요.1 다만 호감을 느낀 이유 중 하나는 현실 세계를 지나치게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그 안에 살면서 이상을 추구한다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너무 어렵고 심오하고 어딘가의 교수님이나 선배가 폼을 잡으며 할 법한 질문이네요. 저는 이 글에 나오는 인간에 한해서는 짧게 정의해보려 합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아래쪽에 나올 테지만 여기서 지칭하는 ‘욕망’은 글에 짧게 언급되었던 맥락의 ‘라가(Raga: 욕망)’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려고 합니다. 욕망이 없는 인간이란 없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신생아 시절부터 배가 고프거나 불편감을 느끼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아이는 울음이라는 수단을 써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합니다. 때때로 다른 이들보다 욕망이 적어 보이는 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그건 욕망을 억누르거나 다른 부분에 초점이 간 것일 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결국 부단한 수행을 통해 고통을 제거하려 듭니다. 그리고 많은 고통은 이런 욕망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나오죠. 하지만 인간이라면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모순이 존재하죠. 그렇다면 수행자는 어떤 방식으로 이 욕망을 대할까요? 글의 첫 장면에서 무염은 팔뚝에 붙은 비늘을 봅니다. 그러나 비늘을 뜯지도 거기에 시선을 둔 채 집착하지도 않고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듭니다. 눈을 떴을 때 비늘은 사라졌죠. 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수행자의 기본 중 기본인 것을. 어차피 모든 것은 허물어져 가는 것. 탐진치를 버려야 옳음이다. 그는 몸에 돋아난 비늘을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명상하고 나면 사라질 것처럼 어차피 모든 건 허물어지는 것이라 칭합니다. 실제로 그가 비늘을 보고 나서 명상(수행)하니 비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립니다. 무염은 노인이기에 몸에도 병이 들어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이런 비늘과 다르지 않은 욕망이라 여기기에 그는 병원 대기실에서조차 명상하길 멈추지 않으며 마음의 욕망을 비워 내려 애를 씁니다. 무염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열반의 길에 이르는 것. 통증을 느끼고 기침하며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도 무염은 고고한 구도자의 길을 걷고자 합니다. 그는 돈이 없어 곤란해하는 여인을 도왔습니다. 욕망을 버려야 하는 길을 가는 이기에 선뜻 건네준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자비심에 나눠준 걸 수도 있죠. 그는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에 조바심이 들어 일을 그르칠지 두려워하지만, 다른 욕망이 그의 구도를 방해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그런 무염의 노년에 찾아온 욕망과 마주치고 대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룹니다. 2. 치매와 망상에 대하여 이 글의 마지막에서 거대한 반전 요소 하나로 무염, 아니, 사람 이태천이 앓고 있는 질병이 언급됩니다. 그건 바로 치매죠. 그것도 꽤 중증인지라 환각, 환청을 듣고 가끔은 현실 감각이 사라질 수도 있을 정도라고 의사가 말할 정도로 상태가 이미 심각합니다. 바로 직전 장면에 실재할 리 없는 파순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팔에 돋았다가 사라지는 비늘을 보기까지 할 만큼요. 의사의 이 한마디로 인해 그가 수행하며 나타났던 모든 종교적 상징이 단순히 그가 앓던 병의 증상이 되어버립니다. 세상에 슬프지 않은 질환이 어디 있나 싶지만 치매는 엄연히 슬픈 질병입니다. 본인이나 사랑하는 이들에게 치매가 온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꽤 복잡한 감정이 들게 됩니다. 당사자에게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고 주변에 있는 이들도 괴롭게 하는 질병이지요. 치매가 진행되면서 많게는 절반 가까이 되는 치매 질환자가 망상에 빠지고 일부는 환청과 환각까지 경험하게 됩니다.2 망상, 환각, 환청의 가장 괴로운 부분 중 하나는 당사자에게는 그게 진짜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오감으로 느끼고 마주하는 모든 것을 당연히 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걸 기반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느끼는 모든 것 중 일부가 거짓이라고 한다면요?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거짓이 되는 걸까요? 현실의 기반이 무너지는 건 매우 고통스럽고 세상이 흔들리는 기분일 겁니다. 동시에 끝없는 의심이 들겠죠. 치매뿐만 아니라 조현병과 같이 망상 및 환각을 보는 이들의 보호자에게 전문가는 이렇게 지도합니다. 그들의 망상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라고. 다만 그 안에서 그로 인해 그들이 얼마나 고통받을지에 대해 공감하고 들어주라고요. 맞습니다. 이 망상 속 세계를 부정하는 건 당사자의 치료에 긍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이 느끼는 모든 게 거짓이라고 말을 건네는 이를 그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이렇게나 생생한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나오면 혼란이 가중될 뿐이죠. 이 소설의 대부분은 무염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가 보고 듣고 만지는 세계가 우리에게도 전해집니다. 독자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비늘이나 파순의 목소리처럼 명백한 환각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글의 반전을 보고 우리는 그게 치매에서 나왔던 환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옷을 건네 달라고 한 아가도 고추를 따자고 말하던 아가도 그의 환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생생한 것이 환각이니까요. 최소한 무염에겐 이 모든 세계가 명백한 진짜 세계인 겁니다. 3. ‘아가’와 ‘라가(Raga)’에 대하여 이때 세 딸은 따나(Thana: 탐욕. 집착), 아라띠(Arati: 성냄. 악심)와, 라가(Raga: 욕망)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파순의 세 딸이 붓다를 유혹해 구도의 길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했다는 설화를 소개하며, 이 소설에서 무염은 아가를 라가라 칭하며 화를 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무염에게 찾아온 이가 라가였어야만 하는 걸까요? 이야기를 구성할 때, 뒤늦게 가지지 못한 것을 탐내도록 만드는 따나가 나올 수도 있고 절에 찾아온 옛 인연을 통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르게 할 아라띠가 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염이 느낀 것은 명백한 성적 욕망이었고 그로 인해 아가를 라가라 칭하며 진노하게 됩니다.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위 설화에서 따나와 라가는 모두 탐욕과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읽을 때는 막연한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리뷰를 쓸 때는 정확해야 했기에 찾아보니 확실히 두 단어의 의미가 달랐습니다. 따나가 상징하는 탐욕은 영어로는 greed라 칭하며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에 가까운 것이며, 라가가 상징하는 욕망은 lust라 불리는 성적인 욕망에 가까운 것이더라고요.3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이 글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성적 욕망에 대해 논해볼 예정입니다. 성적인 욕망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모로 불편한 소재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죠.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굉장한 불쾌감을 주기 쉬우며, 애매하게 들어갈 바에는 다루지 않는 게 나을 정도로 낫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건 소설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공장소나 공적인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쉽지 않고 심지어 부모와 자녀 간에도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꺼려집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걸까요? 처음 본 이에게 자신이 먹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괜찮지만 성적인 걸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걸까요? 저는 그 이유가 성적인 욕망의 특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적인 욕망은 음식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 대상이 되는 ‘타자’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보통 이 ‘타자’는 우리와 똑같이 살아 숨 쉬고 욕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물론 극히 일부 예외가 있긴 합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건 괜찮지만 남의 접시에 있는 음식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식욕’이 아니라 ‘식탐’이 되는 것처럼 내 욕망에 다른 이가 엮이면 일이 복잡해지는 것이죠. 시대가 달라져서 이제는 창작물을 보면서 그런 욕구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그런 창작물을 들여다보면 결국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의 그림자를 따서 만든 형태를 하고 있게 되는 법입니다. 결국 나의 욕구이지만 엄연히 타인이 엮여 있으며 그걸 표현하는 행위는 일종의 개인 영역으로의 침범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꼭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연인이 되어 이런 욕구를 공유하게 되는 건 좋은 의미의 침범이고 서로의 세계가 섞이는 것이라 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와 상황을 가려야 하고 쉽게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더군다나 무염은 노인입니다. 노인의 성욕은 터부시되며 쉬이 논이 되지 않은 것 중 하나지만, 엄연히 존재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그들도 때때로 그런 욕구를 느낍니다. 욕구 자체를 느끼는 건 죄가 아닙니다. 본인의 이런 욕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풀어내는지가 중요한 거죠. 실제로 긍정적인 성 태도를 가진 노인들이 문제 해결적 태도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는 연구 내용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4 하지만 동시에 무염은 구도자입니다. 평생을 바쳐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며 해탈에 이르기 위해 나아가려 하는 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욕망은 물리쳐야 하는 대상이자 그를 길에서 끌어내려 하는 파순의 유혹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부정하고 또 부정합니다. “낙담하지 말아라. 중생은 다 그러한 것을. 네가 유별남이 아니고, 네가 특출남도 아니니라. 인간은 본디 쾌락을 쫓고, 생각을 잠재울 수 없느니라.” “…아니다, 아니야. 그래, 이제 보니 네가 파순이로구나!” 그에게 들리는 의문의 목소리가 하는 말은 사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죠.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고 유별난 건 아닙니다. 그러나 무염은 끊임없이 부정합니다. 왜?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구도의 길을 걸어온 세월은 어떻게 되는 거죠? 인정하는 순간, 앞으로 그리고 위로 나아갔다고 생각하여 걸어간 길이 모두 모래알처럼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는 부정하고 또 부정합니다. 눈을 뜬 순간 경련하는 그의 몸을 끌어안은 아가를 보았을 때, 자기 욕망의 대상이자 타자를 보았을 때, 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합니다. 아마 그런 의식의 흐름이었겠죠. 수행자로서 평생을 바쳐 살아온 무염이 삿된 마음에 이토록 사로잡히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건 분명히 나를 방해하는 고난이자 시련이자 파순의 짓이다. 그래서 그는 그를 붙잡은 아가에게 그 모든 걸 쏟아냅니다. 이건 너의 탓이다. 그러니 너는 ‘라가(Raga)’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국 무염은 무시무시한 분노를 아가에게 폭력이란 형태로 가합니다. 사실 그 욕망을 가진 주체는 무염 본인이었음에도 말이죠. 아가가 정말 라가(Raga)였을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있어 무염에게 그런 마음이 들도록 유혹했을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오랜 기간 홀로 살아왔던 무염이 홀로 삿된 마음을 품은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중요한 지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이어진 장면에서 밝혀진 치매 사실로 인해 그가 마주한 상황이 어디까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어쩌면 아가가 정말 기댈 곳이 없어 절에 의탁한 게 아닌 병원에서 그의 치매 소식을 듣고 은혜를 갚을 겸 돌보기 위해 온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미 알고 있던 이인데 무염이 그 존재를 까먹었기에 그렇게 접근했을 수도 있고요. 애초에 아가가 정말 존재하는 사람인 건 맞을까요? 하지만 치매 사실이 마지막에 밝혀지고 이에 따라 환청, 망상을 듣고 있다는 게 알려진 장면이 나타나면서 이 모든 가정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미 현실 인지 능력이 손상된 무염의 시점에서 펼쳐진 이야기를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어디까지가 진짜 현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중요한 건 무염이 그 욕망을 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어진 현실이 망상 속의 세계든 아니든 무염의 욕망만은 뚜렷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죠. 흔히 통 속의 뇌로 불리듯이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세계가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세계 안에 있는 이상 세계가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짓된 세상을 보고 생긴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 인해 생겨난 그 욕망과 우리가 품은 생각만큼은 진실이 됩니다. 이 리뷰의 제목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지은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색즉시공의 ‘색’은 성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의 실체가 있는 것들을 지칭한다고 합니다.5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구도의 길을 걸으며 욕망을 떠나 해탈에 이른다는 목표를 듣고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과연 현실 세계에서 느낀 욕망을 초월하는 것과 무염의 망상 세계 속에서 느낀 욕망을 초월하는 게 그리 다를까요? 저는 같다고 봅니다. 그가 해온 수행과 다르지 않았으나, 결국 그는 부정하고 묻어두려 한다는 선택지를 고른 것뿐이지요. 그렇다면 무염은 어떻게 해야 한 걸까요? 인간이니까 욕망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고 말하면서 아가에게 그 마음을 표현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이건 해탈에 이르는 게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는 방향이니 오답으로 보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이미 생겨난 그 욕망을 부정하는 건 옳은 방향이 아니란 겁니다. 인간의 욕구라는 것은 참 신기하게도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그 덩치가 커지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돌아오는 법입니다. 그러면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작은 가정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만약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욕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면 어떨까요? 불교의 수행 방법 중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는 명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올라오는 욕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걸 마주하고 나 또한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고 보고 있었다면? 신기하게도 이 감정과 욕구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순간 얌전해집니다. 그리고 연습이 조금 필요하지만, 이 연습을 잘 해온 사람이라면 그 욕구를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그사이에 공간을 둘 수도 있지요.6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생깁니다. 이 욕망을 그대로 분출하는 게 아니라 바른 방법으로 해소하거나 할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쏘아붙이는 파순에게 “그래, 나 또한 인간에 지나지 않고 네 말 대로 그런 욕망을 품고 있다.”하고 담담히 인정한다면,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 모든 욕망을 그저 팔뚝에 돋았던 비늘처럼 대하며 명상에 잠겼다면 다르지 않았을까요.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제가 감히 추측해 본 답은 이 정도겠네요. 우리가 해탈에 도달한 적은 없기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진짜 정답은 알 길이 없습니다. 언젠가 구도자의 길을 걸어 열반에 이른 이만이 알게 될 일이겠지요. (번외) 만약 글의 말미에 나왔던 의사가 이 모든 무염의 일화를 본다면 냉정하게 중증 치매 노인이 이 병으로 인해 이미 전두엽에 상당한 손상을 입은 바람에 벌어진 일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본 환각에 넘어가 인내하고 분노를 참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바람에 젊은 시절 맑은 정신으로 깨달음을 추구하였던 무염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런 일까지 저질러 버린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해 버리고 싶지는 않네요. 결국 우리는 무염의 시야로 인간 이태천의 세계를 엿보았기에 그의 관점에서 글을 보고 이해해 보려 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글을 처음 읽고 지나갔다가 다음날 또 생각이 나서 찾아 들어간 작품이었기에 댓글도 달았는데 이렇게 리뷰까지 쓰게 되네요. 리뷰 할 기회가 생겨 다시 글을 꼼꼼히 뜯어보고 제 사견을 풀어내다 보니 다시 한번 새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