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마녀를 처단한다고요? 아낌없이 앗아가고픈 소설!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 (작가: 리체르카, 작품정보)
리뷰어: 이유이, 1월 29일, 조회 24

‘슐러에게 바치는 찬가’라는 제목을 보고 나는 잠시 슐탄을 떠올렸다. 소설의 한 줄 소개글에 <니르젠베르크 성에는 괴이한 소문이 있다. 바르지 못한 문을 통해 그곳으로 들어간 자들은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는…>이라고만 적혀 있었기에 나는 소설을 읽기 전에 멋대로 상상했다. 어쩌면 세헤라자데가 한 왕이가 1천일 동안 들려준 천일야화와 같은 이야기일까, 젊은 슐탄이 무사이던 시절에 마녀나 빌런을 처단한 그러한 이야기일까 들뜬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던 소설, 나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슐러가 마녀를 처치하는 내용은 맞았고, 슐러는 슐탄이나 무사가 아닌 그저 한 명의 그림쟁이일 따름이었다.

아주 평범한, 실은 궁핍하게 구르던 일생을 살던 노숙자이자 탈영병 출신의 슐러는 그림솜씨 하나로 구원 받는다. 제대로 된 붓이나 물감 하나 없이 거리에서 그림이나 그리던 그의 재능을 아늑한 성 안에서 펼치게 된 것이다. 따스하게 목욕하고, 그림만 그려도 밥이 나오고, 무료로 그림을 그리는 법이나 물감 만드는 법을 배우던 그는 ‘이 모든 환대’에 대가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다름 아닌, 성의 동편에 봉인되어 있는 마녀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도록 ‘그림’으로 처단하는 것이다.

자, 여기까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칼도, 무기도 아닌 ‘그림’으로 마녀를 어떻게 처치한다는 걸까 궁금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단지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건가.. 하고.

그 의문은 이 소설의 섬세한 설명과 묘사가 해결해주었다. 어렸을 때 그림을 그렸지만 수채화 물감으로만 그렸기에 이 소설에서 사용하는 물감을 만드는 법이나 빛깔을 내는 방식의 어디까지 사실에 기반한 것이고, 어디부터 판타지를 가미한 건지 모르겠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이 소설에 나온 내용이 이 세계관 안에서만큼은 탄탄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녀의 그릇된 힘이 담긴 그림을 마녀의 마술에서 자유롭고 탁월한 재능을 가진 화가가 ‘성화’로 덧칠한다면 마녀의 힘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이 납득이 갈 만큼 이야기가 풍성했다.

 또 하나, 슐러가 마녀를 처치한다는 외부적 서사 외에 슐러의 ‘성장담’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이는 어쩌면 내가 어린 시절 약 7년 동안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어서 더 공감갔을 수도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 무언가에 몰두해 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는 그림이 좋아서 그리기 시작했지만, 서서히 그림에 잠식된다. 타인의 기술을 그대로 베끼고 기술적으로 골몰하면서 스킬은 높아졌지만 정작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을 잊어간다. 있어보이는 그림은 그리게 되었지만 화폭이 두려워지는 순간을 작가는 이렇게 짧게 잘 표현해냈다.

– 기술을 얻고 마음을 잃은 기분이 이러할까.

무엇이든 시작할 땐 너무도 재밌다.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점차 배워나가면서 끝없는 좌절을 경험한다. 종국엔 재미마저 잃어버린다. 그때 멈추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 모든 번민을 겪고 ‘단 하나의 작품’을 내가 만족할 만큼 제대로 완성해나가고 나면 ‘다음’이있다. 그 ‘다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상이다. 내가 그리는 것이 최고의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 아니 ‘최고’나 ‘순위’가 더는 중요하지 않아진 세상이다. 그저 나의 길을 걸어갈 따름인… 수양의 경지라고 할까. 그 경지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말한다. “그저 재밌게 그릴 뿐”이라고.

이 소설이 나에게 특히 좋았던 건 그 과정을 잘 표현해 줘서다. 마녀를 처단한다는 외부적 목표 외에 슐러는 ‘나의 그림을 완성한다’라는 내적 목표를 갖고 한 걸음씩 걸어나간다. 마지막 순간에 슐러는 그림을 완성한다. 그 순간에 나는 잠시 멈추었다.

–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델 것처럼 뜨겁다. 마지막 한 번. 연백색을 찍어낸 뒤에 슐러는 고개를 숙였다. 그림이 완성되었다. 하룻밤 안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림이 완성되었다라는 짧은 문장에 많은 감정이 오갔다. 독자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건 이 소설 안에서 슐러라는 캐릭터가 잘 직조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슐러가 겪은 사건, 마주한 사람, 내외적인 갈등을 다 지나온 뒤에 마지막 터치를 찍어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했다. 몹시도 지쳤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자 다음 문장에 슐러가 지쳐 쓰러져 버린 게 나왔다.

–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해 슐러는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짐승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서글픈 울음소리는 계단을 타고, 복도를 타고 동쪽 건물을 메아리치며 울렸다. 그다지 큰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내내 그 소리뿐이었다. 니르젠베르크의 저주가 끝났다.

참으로 와닿은 구절들이었기에 몇몇 문장들을 소개해 보았다. 니르젠베르크가 무엇인지, 슐러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리뷰를 읽기 시작한 분들이라면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니르젠베르크의 저주가 끝났다는 게 대체 뭔데… 라고.

바로 그, 호기심을 일으켰다면 나는 만족한다. 그 궁금증에 머물러 있지 말고 첫 회를 읽어보도록. 분량이 길어 단숨에 읽긴 어렵지만 차근차근 결말을 만나보라. 단순히 저주가 끝난 그 이상의 이야기가 이 안에  잠들어 있다. 기묘하게도 한 회마다 머물러 잠들어 있는 이야기를 깨워내는 기분이었으니까.

마지막 화를 보고 난 뒤에 나는 오랜 만에 들떴고, 글을 쓰고 싶어졌다. 신묘하게도 나도 2년째 그림과 관련한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다. 초고를 완성해서 묵혀두고 있는 상탠데 그 소설 역시 판타지다. 물론 내용은 이와 완전히 다르지만… 그림으로 이렇게 역동적인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하나의 힌트를 얻은 기분이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아쉬운 점은 하나 남아서 써보려 한다. 슐러도 중요하지만 그의 대척점에 서있는 마녀는 매우 중요한 캐릭터다. 이런 서사에서는 빌런이 매혹적일 수록 결말이 더 빛나게 마련이다. 마녀가 일생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내의 목숨줄을 제 손 안에 가둬놓기 위해 수많은 희생양을 만들어내다가 봉인되었고, 오랜 세월을 거쳐 제 힘을 되찾아가고있으니 그녀를 소멸시켜야 한다는 서사는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그 마녀가 대체 어째서 ‘그 사내’에게 그토록 집착하는지에 대해서는 납득되지 않았다. 모든 캐릭터, 이야기가 ‘납득’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마녀의 입장도 ‘공감’ 혹은 ‘납득’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사내에게 홀릭하던 ‘순간’ 마녀의 감정이나 그때의 에피소드가 조금 더 보완된다면 어떨까. 지금 이 소설에도 나와 있긴 한데, 반드시 ‘너’여야만 한다는 ‘강렬한 욕정’ 그리고 ‘욕망’을 느낄 만한 서사인가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물음표 상태였다.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고, 마녀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 사랑인지 사랑이 아닌지 모를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으니 요 부분만 조금 더 풍성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잔잔하게 남는다.

사내에게 홀릭하기 전엔 예술품을 탐닉하던 탐미주의자가 바로 마녀였으니, 더 아쉬웠던지도 모른다. 많은 것도 필요없다. 그에게서만 나는 체취가 어땠다던가, 그의 귀가 어떤 모양이었다던가, 그도 아니면 그의 말버릇이 어땠다던가 하는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다른 사람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것에 우리는 마음을 빼앗기곤 하니까.

며칠 동안 이 소설에 마음에 빼앗길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풍성한 묘사, 전지적 작가시점에서도 잘 느껴지는 인물의 서사와 마음까지 오래도록 고심한 흔적이 느껴져서 더 좋았다.  그림이란 건 참으로 재미있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까지 만족시켜주니까. 때론 오래도록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입 안까지 물감 내음이 배서 미각까지 ‘단 하나의 행위’가 오감을 만족시켜준다는 건 쉽지 않다. 바로 그래서 나는 예술 중에서도 그림을 참 좋아하고, 지금껏 본 중에 가장 흥미로운 그림 소재의 소설이라 나 역시 손이 근질거린다.

이 소설에서 슐러는 잘 그리는 선배 화가들을 보고, 그들을 따라하면서 많은 것을 습득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색채로 재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모든 창작은 모방과 관찰에서 시작된다. 나는 좋은 글을 만나면 몹시도 가깝다. 아낌없이 앗아가고 싶다. 그러한 감정을 느낄 만한 글은 흔치 않다. 바로 그래서 더욱 반가웠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차근차근 읽어보려 한다. 한때는 천재를 동경했고 동시에 질투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천재가 있다는 건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재밌는 소설은 그 자체로 즐겁다. 슐러가 재능이란 것, 신이라는 존재와 무관하게 자신만의 걸음을 묵묵히 걸어나가는 것처럼… 즐기는 상태에서 이야기란 세상 가장 중독적이다. 이 소설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읽어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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