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궁 사변>과 <제2차 시린골 미궁 구출 작전>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 작품을 읽고 오신 분들이라면 미궁의 ‘출현-수색-답파’로 이어지는 <미궁 사변>을 작품의 ‘창작-독해-비평’으로 어렵지 않게 치환할 수 있으실 텐데요. 출현/창작 이후 주체가 바뀐다는 공통점도 있어 저는 자연스레 이 이야기를 읽기와 쓰기에 관한 글로 읽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의 완결을 앞에 두고 두 가지 문제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첫째는 야이샤가 자기 자신까지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미궁 사변의 발생을 특정 시점에 고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물음이 심중에 남았을까요. 야이샤의 자기 비평을 중심으로 <미궁 사변>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 출현
대륙 북서부, 늘파란평원에 미궁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둘 이상의 인물이 관여하여 ‘야이샤’라는 인물이 만들어졌죠. <제2차 시린골 미궁 구출 작전>(이하 <시린골>)에서 라카바는 “살아서 심판받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영수림은 미궁 설계자를 죽이는 대신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요. 야이샤의 감정을 포식함으로써 기억을 잃게 했습니다. 설계자와 야이샤를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수준으로요. 그렇게 6년 동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야이샤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라카바의 말과 달리, 중앙으로 돌아온 야이샤는 처벌받지 않았어요. 처벌받기는커녕 새로운 사건의 수사관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라카바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겠죠. 이어서 야이샤는 영유기의 서약자가 됩니다. 함께 일하려면 필수적인 지식을 제공해야 하고, 이를 발설할 수 없도록 제약을 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영수림이 판단한 것입니다. 영수림이 요구하는 것은 “발칙한 상상력”이었어요. 범죄자 샤를이었던 야이샤를 아직까지 신뢰할 수 없지만, 적어도 “미궁을 향한 욕망”만은 믿을 수 있다고 하네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건 그대도 인정하지 않았소? 이때 필요한 것은 발칙한 상상력과 과감한 결단이오. 과감한 결단은 본관이 가지고 있소. 하지만 본관에겐 상상력이랄 게 없소. 그것은 그대의 몫이오.
마궁을 연구하고자 미궁석 7개를 훔친 사람이니까요. 복수심에 사로잡히긴 했으나 기저에 “미궁을 향한 욕망”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어요. 앞으로 마주하게 될 미궁은 평범한 미궁이 아닙니다. 영수림이 상상하지 못하는 영역을 대신해줄 인물이 반드시 필요해요.
이러한 영수림의 판단과 ‘미궁 답파’ 속 라카바의 대사, 그리고 에필로그 격인 ‘미궁 사변’에서 드러난 “만물의 그림자”를 토대로 라카바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그림자”는 왕국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만물의 그림자가 모이는 이곳에 약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미증유”의 현상일 것입니다. 전에 없던 인물 혹은 사건이 나타났을 때 그 그림자를 바로 확보할 수는 없으니까요. 기존의 것만으로 새로 나타난 현상을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을 테고요. “미증유”의 현상이 충분히 ‘가치’ 있다면, 라카바는 그것을 제거하는 대신 거두어 살피려 할 것입니다. 그림자를 더 깊게 만들고, 추후 발생 가능한 “미증유”에 대처하기 위해서요.
야이샤 양에겐 가능성을 봤으니까요. 그리고 이번과 달리 야이샤 양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도 아니었고요. 당신이 지혜자로 만든 걸 보면 제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죠.
라카바의 진의와 그가 판단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뤄질 이야기에서 드러나겠지요. 적어도 당장은 야이샤가 ‘가치’ 있는 “미증유”로 보입니다. 분명한 건, 6년 전 연구 논문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 자체로 유일무이하고 중대한 사건이었다면 진작 라카바가 접근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더 중요한 건 야이샤가 계획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연구를 진척시키고자 무려 미궁석을 훔쳤으니까요. 이때의 야이샤는 분명 “미증유의 인간”입니다. 왕국에 도움이 될 가능성은 시간을 들여 검증하려 했겠으나 늘파란평원의 미궁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판단을 보류했지만 아직까지 신뢰할 수도 없지요. 일단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영수림의 손에 맡기고 라카바는 사태를 조사하러 떠납니다.
영수림, 라카바는 이렇게 야이샤라는 이름의 “미증유의 인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자신들과 협력할 대상으로요. 겨우 사흘 전부터 기억이 시작된 야이샤는 미궁 연구자로서 미궁 비평을, 동시에 “잃어버린 과거를 회수”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게 됩니다.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탐색이 시작된 것이지요.
— 수색
여기서부턴 야이샤의 자기 비평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미궁 수색이 아닌 야이샤가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는 장면 위주로 보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잃어버린 과거의 흔적을 마주한 그녀는 심히 당황했다.
야이샤는 기억을 잃었지만, 정확히는 영수림이 삼킨 것은 감정 뿐입니다. 감정이 인위적으로 제거되며 감정의 원인이 된 기억 또한 제 위치를 벗어난 것이지요. 야이샤는 현재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이해하고 있지만 과거와 단절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6년 동안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지 못해요.
그 생생함이 6년의 간격을 두고 있단 걸 생각하면, 야이샤는 어딘가 모르게 섬뜩해졌다. 6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던 걸까?
늘파란평원 미궁을 조사하던 중 야이샤는 바이로드라는 인물을 만납니다. <시린골>의 1차 조사대였고 야이샤의 미궁에서 사망한 미궁수사관 바이류드의 동생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 야이샤는 <시린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립니다. 바이류드는 야이샤를 미궁에 데려가지 않았어요. 그때의 원망과 분노가 되살아나며 기억을 떠올리게 했지요.
자기 죄를 정당화하기엔 너무나도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바이로드의 일도, 자기 자신과의 일도.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여정으로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기억이 일부 떠올랐는데도 야이샤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다는 감각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도, 자신의 것을 되찾았다는 충족감도 없어요. 이 여정은 기억을 되찾는 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여전히 샤를이 야이샤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제 야이샤의 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샤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죄를 다시 범할 것인가. 야이샤는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샤를이 마궁을 연구했던 이유는 복수와 증명이었어요. 미궁학도 야이샤를 무시했던 모든 이들에게 그가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려 했어요. 두 가지 모두 지금의 야이샤에겐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이샤는 “샤를이었던 야이샤”가 아니기로 마음먹어요. 미궁 비평은 그대로 이어갔고요. 샤를의 연구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눈앞에 실현된 “미궁의 가능성”을 연구하기 위해서요. 복수의 수단이 되었던 미궁이 다시금 야이샤의 열정의 대상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복수에 연연하지 말라는 식으로 교훈을 주기 위한 게 아닙니다. 야이샤가 얼마나 미궁을 좋아하는지, 미궁 연구를 간절히 원하는지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했어요.
적어도 지금은 단절을 겪은 야이샤일 수 있었다. 야이샤는 기꺼이 그러기로 했다.
샤를과 “단절”된 야이샤는 우선 늘파란평원의 미궁이라는 목표에 집중합니다. 설계자가 어떤 인물일지 반복적으로 궁리하며 비평했는데요. 미궁 비평 끝에 야이샤가 발견한 인물은 놀랍게도, 그러나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물론 이번 미궁의 설계자는 모사꾼 카르엠이었지요. 하지만 시린골과 늘파란평원의 미궁을 설계한 것은 야이샤, 정확히는 “샤를이었던 야이샤”였던 것입니다.
— 답파
설계자의 정체를 밝히고 미궁석을 회수하였건만 야이샤의 ‘수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궁 비평의 결과로 샤를과의 “단절”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특히 미궁이 무너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야이샤의 힘만으로 막을 수 없었다고 해도 여전히 무거운 감정으로 남는 일이지요. 결과만 놓고 본다면 샤를이 만들었던 미궁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미궁을 설계한 건 “샤를이었던 야이샤”이고요. 샤를의 일이 자신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야이샤는 샤를이 아니기로 했지만, 그는 여전히 샤를이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그는 샤를이었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야이샤는 “학살자였던 영웅”이 되기로 결심하는 대신, 자신의 의지로 “지혜자”가 될 것을 각오합니다. 여기서 “미증유의 인간”이 가지는 의미가 확장되는데요. “미증유의 인간”은 처음에 ‘미증유의 범죄자’를 의미했어요. 라카바와 영수림의 개입 이후로는 ‘미증유의 인간’이 되었지요. 자신의 과오와 감정을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 되찾아간다는 의미에서 전에 없는 경험을 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결말에서 야이샤는 ‘미증유의 지혜자’가 될 것을 선언합니다.
지혜자는 침착하기만 하는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나침반이 도덕과 윤리라는, 시대에 휘둘리고 환경과 인간에게 휘둘리는 잣대여야 하는가? 바이로드가 웃을 일이었다.
다시 한 번 바이로드를 떠올리고 있어요. 기억을 되찾은 직후에도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바이로드와의 만남이 어떤 형태로든 야이샤에게 상흔을 남긴 것은 분명합니다. 야이샤가 “발칙한 상상력”으로 영수림, 라카바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기 위해선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미궁은 인간의 욕망이 증폭되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지혜자로서, 지식으로만 인간의 감정을 알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미궁의 위험을, 희생될 이들을 고려하지 않았던 샤를의 전철을 밟게 될 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야이샤는 말합니다. ‘미증유의 지혜자’는 침착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렇다면 감정에 초연한 것을 넘어서 지혜자는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적어도 “도덕과 윤리”를 “나침반”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야이샤는 생각합니다. 샤를 스스로가 도덕과 윤리를 외면했던 인물이기도 하고, 그런 이들로부터 소외된 당사자였으니까요. 그리고 야이샤는 미궁수사관의 유가족과 미궁병 환자들을 만나면서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일들을 숱하게 보았습니다.
아직 야이샤는 무엇이 ‘미증유의 지혜자’를 만드는지 확언할 수 없어요. 그러나 미궁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지혜자로서 전에 있던 것들을 답습하기만 해선 안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남은 미궁석을 회수하는 과정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비평을 이어나가야 할 테지요. 저는 야이샤가 진심으로 후회하는 순간이 오기를 바랍니다.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경험하기를, “도덕과 윤리”를 지고의 가치로 믿는 이들과도 만나기를 원합니다. 야이샤가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거나 샤를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시린골>과 <미궁 사변>에서 아직 만나지 못했던 인물들을 만나 더 많이 흔들리고, 더 깊이 자신을 바라보길 원하니까요. 언젠가 야이샤가 “단절”에서 그치지 않고 샤를까지도 자기 자신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야이샤의 자기 비평이 어디까지 깊어지고 확장될 수 있을지 진심으로 궁금해요. 결국 “미궁을 향한 욕망”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요.
— 저자의 죽음
미궁 설계자는 통상 2주 이내 자신의 미궁 안에서 사망한다고 해요. 전례 없는 미궁을 만든 카르엠조차도 이 징크스를 피하지 못했어요. 전능감에 도취되어 다른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지요. 카르엠과 야이샤의 대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당신의 가능성을 믿고 있습니다. 증오는 절대 쉽게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타의에 의해 빼앗겼을지라도, 야이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야이샤는 속으로 뜨끔했다. 시린골 미궁에서의 기억을 되찾았을 때의 감정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거리감이 있을 뿐, 여전히 그 감정은 자기 자신의 감정이었다.
“증오는 쉽게 뿌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순순히 인정한다고 누그러지는 것도 아니죠. 증오야말로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감정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걸 당신은 보란 듯이 기만하고 있죠. 그 기만이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카르엠이 더이상 모사꾼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모사꾼은 타인의 외피를 흉내낸다고 해요. 외피를 통해 내면을 묘사한다고요. 다시 말하면 내면이 외피에 투사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행동과 감정이 분리될 수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야이샤가 증오를 “기만”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이후 미궁석을 잃기 전까지 카르엠의 행동을 보면, 그가 느끼는 전능감이 있는 그대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가 디렉에게 심문 받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실까요.
아! 평론가들이란. 품격의 가치를 몰라보고 그저 자기의 잣대로만 연극을 재단하기 일쑤죠.
창작자의 의도를 그렇게나 강조하던 그가 미궁에 들어온 이후로는 자신의 말을 망각했어요.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고양감”에 취해 자기 자신을 잊은 것입니다. 욕망에 먹히고 감정과 일체가 된 카르엠은 이미 그가 모사하던 인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과 기억으로부터 (강제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야이샤와 대조되는 부분입니다.
야이샤는 “거리감이 있을 뿐”이라고 단순히 치부했지만 사실 거리감이야말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카르엠이 모사꾼으로서 잃어버린 것, 야이샤가 지혜자로서 얻게 된 것이 바로 감정과의 거리감이니까요. 야이샤가 증오를 ‘기만’하고 있다고, 눈앞의 야이샤를 자신의 믿음대로 “재단”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보았다면 카르엠에게도 다른 결말이 가능했을까요. 처음으로 모사꾼이 아니게 된 카르엠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요.
처음 ‘야이샤’를 만들어냈던 이들 또한 야이샤에 대한 영향력을 부분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는데요. 영수림과 라카바는 그들 각각의 필요에 의해 야이샤를 샤를과 “단절”시켰습니다. 영유기가 야이샤를 서약자로 만들면서 그 과정을 완성했고요. 그러나 이들은 이제 야이샤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야이샤가 야이샤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대신 정할 수 없으니까요.
샤를은 복수와 증명을 위해 현실을 “재단”했고, “자기 자신으로 재구성”해 왜곡된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샤를과 거리를 두게 된 야이샤는 지혜자의 눈으로 샤를의 “세계”를 다시 접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다시 쓴다는, 인간으로선 ‘미증유의 사건’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학살자도, 영웅도 아닌 지혜자로서 그대의 길은 매우 흥미롭소. 누구에게도 이해받길 포기했단 뜻이 아니오?
따라서 영수림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습니다. 왕국의 인간들, 영수림과 영유기, 라카바와 만물의 그림자는 분명 ‘미증유의 지혜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궁 사변>에서 해왔던 것처럼, 야이샤 자신만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테지요.
— 시작
야이샤는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자신은 여전히 야이샤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북부에 자기 이름이 알려지는 걸 상상했다. 바이로드가 자기 집을 찾아온 여자의 정체를 알게 되는 날을 상상했다.
<미궁 사변>은 늘파란평원의 미궁을 답파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야이샤가 ‘지혜자’로서 자의식을 구축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던 두 가지 문제 가운데 첫 번째가 이렇게 정리되었습니다. 아직 두 번째 문제가 남아 있었지요. 미궁 사변은 언제 시작되었나? 이 부분은 간단히만 짚어보겠습니다.
야이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미 미궁병이 창궐한 지 1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도 늦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에필로그나 다름없지만 ‘미궁 사변’이란 이름의 회차가 단독으로 이어졌어요. 그리고 야이샤의 의문은 중대한 문제를 시사하고 있지요. 미궁 사변은 언제부터 미궁 사변이 되었을까요. 늘파란평원에 미궁에 생겨난 날? 시린골에서 미궁이 만들어진 날? 아니면 그보다도 먼저, 가시물레 미궁으로부터 미궁병이 시작되었던 날? 신천마궁이 조직된 날이나 야이샤가 미궁석을 훔친 날도 떠올릴 수 있겠군요. 마치 마궁처럼, 여러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연루되었습니다. 미궁 사변의 발생 시점을 특정 장면에 고정하기는 어려워 보여요.
특정한 사건 혹은 의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더듬어가는 과정은 독해-비평과도,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와도 맞물립니다. 출현-수색-답파라는 세 개 시점을 오가는 것 역시 어려운 현상을 어려운 그대로 들여다보고 재현하려는 시도처럼 느껴지는데요. 어려운 것을 쉽게 “재단”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서는 미궁 사변의 복잡한 다면성이 충분히 담기지 않았을 거예요. 여기서 고백하자면 저도 한 번 길을 헤맸습니다. (진짜)라카바와 카르엠의 대결 장면이 어디에 놓이는지 잠시 혼란스러웠거든요. 그래서 불편했느냐면, 전혀요. 복잡한 세계를 재현하려는 부단한 노력 속에서 잠시 길을 잃는 게 대수인가요. 저는 오히려 즐거웠어요.
저는 야이샤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미궁 사변>이란 작품을 멋대로 “재단”했는데요. 미궁과 욕망, 잠재의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감정갈귀와 모사꾼이 미궁과 맺는 관계에 집중하는 것도 즐거운 독해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관점을 찾아내는 분들도 많을 것 같고요. 여기서 다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이어질 야이샤와 영수림의 모험에서 다시 고민하게 될 것 같아 설레는 마음이 커요. 기쁘게도(영수림과 야이샤에겐 안타깝게도) 아직 미궁석이 다섯 개나 남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