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이름이 숫자로만 되어 있는 노말시티 님의 이 단편은, 개인적으로 제게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준 작품입니다. 연인이 되기 직전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밀당과 달달한 고백이 생각치도 못한 방식으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원주율이나 네이피어 상수 같은 다소 이질적인 단어들 때문에 어떤 분들에게 거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수학을 전혀 못하시는 분도 이 글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 글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달달함을 저만 알고 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저는 이 작품에 대한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마치 수능 공부 때, 작품을 한줄한줄 해석해 밑줄을 쳐 가며 공부했던 그런 마음으로 리뷰를 한 번 써보겠습니다.
스포일러 뿐만 아니라 거의 작품 전체가 다 리뷰에 포함되어 있으니, 리뷰를 읽기 전에 먼저 작품을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작품은 두 남녀 (동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문단이 대사 하나를 이루는 아주 간결한 구조입니다. 덕분에 큰 따옴표나 불필요한 서술없이, 한번에 쭉 읽어내려갈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지금 강의실에 있는지, 카페에 있는지, 아니면 공원에 있는지 기타 정보는 전혀 주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대사들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리뷰의 편의상 마음이 원주율인 쪽을 주율이, 네이피어 상수인 쪽을 자연이 (자연상수)라고 부를게요. 두 사람의 대화는 아름다움에 대한 선문답 같은 말들로 시작합니다.
주율 : 끝이 없어야 아름답기 때문이야. 정해지면, 아름다움은 사라지거든.
(중략)
자연 : 그럼, 왜 끝이 없어야 아름다운데?
주율 : 그래야… 정확하지 않으니까.
(중략)
자연 : 이해가 안 돼.
주율 :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좋아. 그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이것은 이 소설 내에서 주율이 정의한 원칙입니다. 이로서 이 대화에서는 끝이 없는 것 = 정확하지 않은 것 = 이해가 안 되는 것 = 아름다운 것 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이 정의가 향후 대화를 읽어낼 때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음 대화를 지켜봅시다.
주율 : 그럼 넌,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니? 아름다움을 해석할 수 있냐고.
자연 : 그야… 잘 모르겠네.
주율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위에서 말한 원칙을 강화합니다. 아름다움을 수학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 때부터 있어 왔지만, 그 본질적인 것을 설명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자연은 반박하지 못하고, 그 원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율 : 거봐. 이해가 안 되고, 해석할 수 없으니까 아름답잖아. 내 마음처럼.
주율이가 슬슬 사심을 내비치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름다워질 때는 언제일까요. 여러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 아마도 마음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지 않을까요. 그 때는 온 세상이 핑크빛 따스함으로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자연이가 여기까지 눈치를 챘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연이는 놀랍니다.
자연 : 응?
주율 : 내 마음처럼.
자연 : 네 마음이 어떤데?
주율 : 내 마음은 원주율이야.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주율이는 자신의 마음이 원주율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원주율은 끝이 없고, 정확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기에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것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즉, 엄청나게 돌려서 말했지만,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을 그냥 처음부터 던졌다면 아무 의미 없는 선문답이 되었겠지만, 주율은 이 순간을 위해 이미 앞에서 저 원칙을 밑밥으로 깔아두었습니다.
자연 : 이해가 안 돼.
주율 : 고마워.
자연의 말은, 주율의 원칙에 의하면 ‘아름답구나.’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율은 고맙다고 대답합니다.
자연 : 뭐가?
주율 : 이해하지 않아 줘서. (=내 마음을 아름답게 봐 줘서.)
자연 : 이해를 못 해서 고맙다고?
하지만 자연은 아직까지 주율의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니, 실제로는 이해했으면서 괜히 설레발치는 게 아닐까 싶어 조심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율 : 내 맘이니까, 내 맘대로지. 그래도 내 마음은 정의되어 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
자연 : 뭘로? (=그게 누군데?)
주율 : 비밀이야.
마치 숫자로 적으면 정해져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 값이 정의되어 있는 원주율처럼, 주율의 마음도 정의되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표현하기는 어려워도 자신의 마음은 확고하다는 의미죠. 결국, ‘좋아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 또는 ‘좋아하는 마음은 확고하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이상한 대화를 캐치해 내고 묻는 것을 보면, 자연도 주율의 대화 방식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묻는 자연의 물음에 주율은 대답하지 않아요.
자연 : 비밀이면 정의되어 있다고는 뭐하러 말했어? (비밀이면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는 뭐하러 말했어?)
주율 : 내가 말하고 싶으니까. 나, 그만 말할까?
자연 : …아니, 뭐라도 말해 줘. 궁금하니까.
시큰둥한 자연의 반응에 주율은 자신이 없어집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이성이 누군지 관심을 가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누굴 좋아하든 별로 관심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곧 상대가 자신에게 별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자신에게 마음이 없단 걸 확인하고 상처를 받을 것이 두려웠는지, 그녀는 대화를 그만둘지 여부를 묻습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자연은 주율의 마음을 계속해서 묻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주율 : 내 마음이 궁금해?
자연 : 난 뭐든지 궁금해.
주율은 자신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자연의 속내가 궁금해서 (즉, 자연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지 궁금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자연은 주율의 마음이 궁금한 것이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것과 관계 없는, 보편적인 호기심이라고 얼버무립니다.
주율 : 너도 네 맘대로네. 자기 맘은 하나도 안 말해주면서.
자연 : 너도 말 안 해 줬잖아.
주율 : 말했잖아. 원주율이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그래서 주율은 자연이 자신에게 마음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토라집니다. 자연은 너도 제대로 말해준 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지금까지의 대화가 자신이 이해한 것과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원주율의 아름다움을 논의한 건지 아직 확신이 없거든요. 그러자 주율은 한 번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대사로 자연은 주율의 마음에 좀 더 확신이 생기게 되고, 자신의 패를 꺼낼 용기가 생깁니다.
자연 : 좋아. 그럼 내 마음은 네이피어 상수야.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고 그건 너야.))
주율 : …정말?
자연 : 왜 그렇게 놀라?
주율 : 네 마음을 말해 줬으니까.
뒤에 설명이 나오지만, 네이피어 상수는 원주율과 오일러의 식으로 묶여 있는 상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원주율인 주율과는 꽉 묶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사는 고백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주율은 자연의 마음을 알고 놀랍니다. 아마 이 때 주율이의 심장은 마구 쿵쾅거리고 있었을 것 같네요. 물론 자연이도요.
자연 : 내가 뭐라고 했는데?
주율 : 네이피어 상수라고. (=네가 날 좋아한다고.)
자연 : 그게 말해준 거야? 너 이해했어?
자연이는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조마조마한 반응을 보입니다. 아까와는 반대로, 이제 주도권은 주율에게 넘어갔습니다.
주율 : 아니. 이해는 안 할래.
자연 : 내 마음을 이해하기 싫어?
주율 : 응. 그냥 이해하지 않고 보고 싶어 (=그냥 아름다운 채로 두고 보고 싶어).
자연 : 왜?
주율 : 그래야 끝이 없으니까. (=그래야 아름다우니까.)
자연은 자신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해진 건지 알 수 없어 애가 타지만, 이미 주율에게 그 메시지는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백은 아름다운 것이고, 이해하는 순간 아름답지 않게 되어버리니까요.
주율 : 근데, 네 마음은 정의되어 있니?
주율이가 묻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대화로는 아직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확인한 건 아닙니다. 자연의 마음이 확고하게 정의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율이 자신의 마음이 정의되어 있다고 대답한 것처럼요.
여기서 조금 혼란스러우실 수도 있는데, 정확하지 않은 것과 정의되지 않은 것은 서로 다른 개념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전자는 아름다운 것, 후자는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요. 저는 이를 목성형 행성의 이미지로 받아들였는데요,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대기 순환에 따라 바뀌는 목성의 표면처럼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렵고 안개처럼 자욱한 느낌이고, 정의되었다는 것은 행성 안쪽의 단단한 부분이 확고하게 존재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애매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실제 그 자체는 확고한, 그런… 설명이 어렵네요. 뭐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독자 여러분마다 달라질 것 같습니다.
자연 : 어… 잘 모르겠는데.
주율 : 그럼 왜 네이피어 상수라고 했어?
자연 : 그야… 네 마음이 원주율이라고 해서.
위 대화에서 약간 애가 타는 입장이 된 자연은, 살짝 밀당을 하는 것처럼 대답을 피합니다. (아, 쫄깃하네요.) 그러자 주율은 왜 그렇게 대답했냐고 내처 묻습니다. 네이피어 상수라고 대답한 이유가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라면, 방금 전까지 고백이라고 생각하고 아름답게 여겼던 모든 게 다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니까요. 그녀의 물음에, 자연은 잠시 고민하다 본심을 털어놓게 됩니다.
주율 : 네이피어 상수하고 원주율은 서로 유도될 수 있는 거 알고 있잖아?
자연 : 응.
주율 : 오일러의 등식으로 묶여 있으니까.
자연 : 응.
지금까지의 대화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이 맞는지 맞추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율은 결정적인 묵직한 돌직구를 던집니다.
주율 : 그래서 네이피어 상수라고 했어? (=내 마음인 원주율과 오일러의 등식으로 묶여 있어서 네 마음이 네이피어 상수라고 대답했어? = 내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싶어서 그렇게 대답했어?)
자연 : …응 (=널 사랑해)
이 대사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합니다. 사랑의 빵빠레가 터지는 순간입니다.
자, 그 다음은 에필로그 느낌으로 이어집니다. 고백이 끝나고, 어색하지만 달달한 분위기에서 자연은 부끄러워 한 뿐 별 말을 안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율이 말합니다.
주율 : 너도 뭐라고 좀 해봐. 그렇네만 하지 말고.
(중략)
자연 : …아이가 있어야 수식이 완성되니까?
주율 : 너… 너무 나갔다. 그건 못 들은 걸로 할께.
자연 : 여전히 자기 맘대로네.
주율 : 내 맘은 원주율이라니까.
오일러의 등식에는 원주율과 네이피어 상수도 있지만, 허수 i도 함께 묶여 있습니다. 자연은 이 i를 생각하다 주율과 결혼해 아이를 갖는 상상까지 한 모양입니다. 등식을 이용해 고백 정국을 주도해 온 주율이 자연의 생각치도 못한 한 방에 당황하는 장면으로,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위 대화를 저와 다르게 해석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고, 그 분들은 또 어떻게 읽으셨는지도 궁금하네요. 아무튼 굉장히 설레는, 달달한 작품이었습니다. 주율이와 자연이 커플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