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요약하자면, 작은 사건을 해결해보려고 작은 범죄를 어설프게 계획했던 B급 감성의 남고생 3명이 어쩌다 납치한 게 하필이면 여자를 납치하려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라서 이중납치 우당탕탕 악인들이 서로를 등치는 피카레스크 소동극으로 갈 줄 알았는데…아무리 기운 넘치는 10대 남고생 3명이라도 경험 많은 성인 남성 살인마에게는 상대가 안 되는 법이라 고립된 별장(살인마의 나와바리)에서의 연쇄살인극(분위기가 영화 ‘퍼니게임’을 연상케 하는)이 될 줄 알았는데…희생양이 될 줄 알았던 여자가 살인마를 죽여 버리고(물 속에서는 마동석도 물주먹이니 여자가 수영 실력으로 남성의 완력을 제압 가능) 무사 탈출할 줄 알았는데…왕따 취급 받으면서 여자와 연합하던 남고생이 여자를 죽이고 이 서바이벌의 최종 우승자가 되어 나가는…반전의 반전의 반전입니다.
작가가 고심해서 영리하고 치밀하게 설계한 작품입니다. 반전에 놀랄 준비가 된 ‘반전주의자’라면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초반의 B급 감성이 좋아서 끝까지 B급 감성이 MSG처럼 첨가되었다면 어떤 분위기가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휴대폰의 활용
‘CCTV가 깔린 세상에 수사물이 가능한가’는 작가들의 새로운 고민이죠. 특히 누구나 스마트폰을 갖고 다니는 세상에서는요. 여기서도 휴대폰을 제대로 휴대하고 다니는 인간이 없습니다. 차 안에 두고 내리고…하기야…어떻게든 인물들을 하룻밤 동안 밀실에 고립시켜야 하는데 “내일 은행에 가서 돈을 인출해야 하니까 오늘밤은 이 별장에 머물자.”->”아 그냥 지금 카톡 익명송금해 주거나 모바일상품권 깡 하면 되는데요.”이러면 시작하자마자 끝나겠죠. “친구 스마트폰 화면이 잠겨있다고? 갤럭시폰은 화면이 잠긴 상태에서 긴급전화할 수 있어. 살인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아 일단 112에 전화걸고 나서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면 112에서 문자신고할 수 있는 링크를 보내 줘.”하면 경찰 출동해서 시작도 하기 전에 철컹철컹 쇠고랑…하지만 제가 스마트폰 검색만으로 알아낸(믿어 주세요. 진짜로 검색으로 알아낸 겁니다. 저는 범죄와 먼 건전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런 정보를 MZ세대인 등장인물들이 모를까요?
‘신입사원 연수원이니까 보안을 위해 전자기기 다 제출해라’는 설정으로 인물들의 휴대폰을 압수하고 시작하는 호러소설도 있었고요(제목은 기억이 잘…누가 아시면 제보 좀…) 드라마 <시그널>처럼 스마트폰도 없고 과학수사도 없는 레트로 쪽으로 가는 수사물도 있고, 아니면 스마트폰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소설은 아니지만…연극 <2시 22분>에서는 AI스피커가 아내의 말에만 대꾸하고 남편의 말은 철저하게 무시하는데요. (연극을 안 보신 분은 스포를 읽지 마세요.) 사실 남편이 귀신이라서 AI스피커는 인간의 말에만 반응했던 거였습니다.
여성 인물의 활용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성인 남성 병주는 어린 시절 여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아마 그 트라우마를 핑계로) 여자를 죽이고 (방해가 되거나 자신을 엿먹이면 남자도 죽이지만 표적은 여자) 왕따였던 남고생은 그런 사이코패스가 여자를 죽이는 걸 보고 ‘남자다움’을 동경해서 자신도 여자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는데…
아니 여자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면죄부(?)를 주기에는…그 현장에서 범죄에 가담, 방조한 남자들에겐 복수하지 않고 여자에게만 복수하고 여자를 죽이고 다니면 공포스럽다기보다는 ‘루저’로 보입니다. 현실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에 여자들이 공포를 느끼기는 하는데 소설은 허구의 세계이고, 이 세계에서 ‘공포’와 ‘불쾌’를 가르는 경계는 아슬아슬합니다. 그리고 남자 중에서도 자기보다 약한 10대 애들에게 분풀이(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아무리 10대 애들이 자기를 납치했어도 일단 제압을 했으면 경찰 불러서 법적인 처벌을 한 다음 부모한테 민사소송을 걸어서 금융치료를 하고 SNS에서 바이럴로 개망신을 줘야지 살인을 하면 어쩔…)를 하면 좀 지질해 보이긴 합니다.
소설 <어느 사형에 관한 기록>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본성이 악한 매력적인 사이코패스가 여자들을 죽인다’는 사이코패스의 클리셰를 가져 오지만, 사이코패스에게 마이크를 주지 않고 그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여자 경찰, 그를 의심해 온 처제, 그의 ‘구원’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나 자신의 판단을 믿고 가는 그의 여자 조카 등등 그의 주변의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들이 이 소설만의 매력이 됩니다. <크리스마스에는 납치>에서 욕조 속에 잠긴 시신의 목소리가 궁금합니다.
‘사이코패스 비긴즈’를 만들어내는 ‘여성이 가해자인 성범죄’라는 참신한(?) 소재는 ‘사이코패스가 훼손된 남성성 때문에 여자를 죽인다’는 ‘핑계’로만 활용되고, 납치되었음에도 겁이 없고 어떻게든 빠져 나가려 하는 ‘똘끼있는’ 여자 인물은 연쇄 살인마를 죽이는 ‘반전’ 이 있음에도 허무하게 ‘남고생 살인마 비긴즈’를 위한 희생자(‘냉장고 속의 여자’가 떠오릅니다.)가 되고 맙니다. 저는 이 여자 인물에 작가가 많은 공을 들인 게 보이고, 이 소설의 ‘숨통’ 역할을 하는데도 ‘한 방’이 없이 퇴장하는 게 너무 아깝습니다. 연쇄살인마도 죽인 이 여자가 한 순간의 방심 때문에 초짜 살인자에게 당했을 것 같지가 않은데 당해 버려서요. ‘최후의 생존자’가 남고생이 되고, 그가 또 ‘연쇄 살인의 바퀴’에 타기 위해 별장에 남은 인물이 없어야 해서 이 여자가 죽어야 한다면 여자는 최소한 마지막 발악, 저항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약체가 알고 보니 끝판왕’이라는 반전을 위해서라면 ‘사이코패스를 죽인 여자도 죽인 진짜 무서운 놈’이 되기 위해 이 끝판왕과 여자의 ‘목숨을 건 결투’가 한 장면 들어가면 딱 분량이 좋을 것 같은데요…
‘남자다운 연쇄 살인마’가 되기 위해 여자를 죽인다니 갑자기 하찮아 보이는 새끼 사이코패스…진짜 ‘분노조절불가능’은 마동석(자꾸 소환되는 마동석 배우님 죄송합니다.)에게 달려드는 놈이고 만만한 상대한테 화풀이하는 놈은 그냥 성격파탄자일 뿐인데요…소설 <종의 기원>이 뮤지컬로 각색될 때, 사이코패스가 성인이 되고 나서 첫 살인을 하는 장면에서 소설에서는 여자를 죽이지만 뮤지컬에서는 밤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취객 아저씨를 단번에 죽여 버립니다. 소설에서는 ‘최상위 포식자 사이코패스가 첫 살인은 겨우 여자’ 느낌이지만 뮤지컬에서는 ‘야 저 새끼 진짜 아무나 막 죽이는 리얼 사이코패스구나 ㄷㄷㄷ’가 됩니다. 만약 남고생 무리를 죽이는 게 성인 남성이 아니라 ‘내가 니네 친구라고? 그럼 나한테 좆같이 굴지 말았어야지’하는 남고생이었다면 느낌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아니 불만은 친구들한테 있는데 각성은 왜 여자를 죽여서 하냐고요. 여자를 죽이는 ‘강한’ 사이코패스 아저씨처럼 되고 싶고, 그 아저씨를 죽인 여자를 죽인 더 센 놈이 되고 싶은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선배를 답습하기보다는 더 발전이 있어도 될 것 같은데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작가들이 여자 인물을 다룰 때 주저해서 끝까지 가지 않는 작품들이 있는데, 여자도 남자처럼 사람입니다. 남자 인물이 가는 곳까지 갈 수 있어요. ‘이래도 되나?’싶을 때까지 좀 더 과감해져도 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근력이 달리지 지력이 달리는 게 아니니까(운동한 여자는 운동 안 한 남자보다 강합니다.) 여자가 남자를 액션으로 당할 수 있겠냐…는 고민이 되면 여자가 머리를 쓰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 해결하면 되고요.
돈의 활용
피바다로 끝난 이 납치극의 시작은 사실 ‘푼돈’인데요. (이 정도 규모의 살인극이라면 목숨값만 해도 억 단위일 것 같으나…) 복리이자처럼 불어난 이 사태의 불씨가 된 돈은…돈은요??? 사람이 몇이나 죽어 나갔는데 이제 와서 돈이 무슨 상관이냐…싶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마지막 편을 읽었을 때 ‘그래서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 된 돈이…얼마였더라? 겨우 이 돈 때문에(아니 크다면 큰 돈이긴 한데) 이 난리판이 난 건가? 허무하다…’싶어서 다시 초반으로 돌아가 액수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맥거핀으로 활용되긴 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수미상관 구조를 좋아하기도 하고, (이미 살인이 벌어진 후부터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긴 한데) 남고생 무리에게는 처음으로 계획범죄를 할 정도로 의미 있는(?) 돈이었으니 이 모든 상황이 끝난 다음에도 돈 생각이 나긴 할 것 같습니다…이게 다 제가 자본주의의 노예라서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을 적었는데, 이 작품은 피카레스크+펄프 픽션+군상극+서바이벌로 읽으면 재미는 확실합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이 집에서 나가는 사람은 누구?로 따라가시면 됩니다.)한정된 공간 안에서 하룻밤 새 벌어지는 사건치고는 등장인물이 많은 편인데도, 살아 있는 인물이라면 지나가는 단역도 캐릭터가 있습니다. B급 쌈마이 양아치물(?)에서 스릴러, 액션으로 장르가 왔다갔다 하는 복합장르를 바느질하는 노련함도 보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납치를 당한다면요? 저는 이 작품에 골드코인을 주고 납치범들에게 풀어 달라고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