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믹 호러 묵시록 <남극의 이방인들> 리뷰 비평

대상작품: 남극의 이방인들 (작가: 창궁, 작품정보)
리뷰어: 광 쿤, 60분 전, 조회 14

<남극의 이방인들>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된 리뷰입니다.

 

 

 

 

 

바다의 짠 내와 고래기름의 악취, 그리고 혹독한 편서풍이 몰아치는 1941년의 칠레 프랏 부두. 소설 <남극의 이방인들>은 국내에 생소한 코스믹 호러 장르를 장르 문법에 고전적으로 매우 충실하면서도 고유의 독특한 세계관을 풀어낸다. 광기에 사로잡힌 선장 아르투로 발렌수엘라, 조선에서 온 이방인으로서의 부유감을 안고 살아가는 조타수 페드로 킴, 그리고 국가주의적 명분에 사로잡힌 탐험대장 로드리고 실바와 기이한 여성 항해사 올가 안티만까지. 이들이 남극을 향해 나아가는 전반부의 서사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이 보여주었던 미지의 자연을 향한 맹목적인 탐험기를 충실히 따르는 듯 보인다. 작품 내의 풍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실감 나게 느껴지는 묘사들은 이 여정을 더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하지만 드레이크 해협의 폭풍우를 뚫고 칠레의 영유권 주장이 얽힌 남극의 빙하에 다가갈수록, 이 소설은 독자가 굳건하다고 믿었던 현실의 지반을 무자비하게 박살 내기 시작한다. 해당 작품은 모험물과 해양 스릴러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마치 H. P.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에서>처럼 우주의 불편한 진실을 서서히 드러낸다. 그러나 코스믹 호러의 거장 러브크래프트와 <남극의 이방인들>이 다른 차별점을 보여주는 지점은 그 진실을 마주하는 이정표가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향한다는 것이다. <남극의 이방인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이 세계와 나라는 주체가 과연 실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이고도 불온한 질문을 던진다. 후반부에 서사는 점차 코즈믹 호러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인간 이성의 한계를 조롱하는 철학적 묵시록으로 돌변한다.

 

<남극의 이방인들>에서 가장 독특한 서사 장치는 정체불명의 항해사 올가 안티만이 들려주는 ‘남극 신화’이다. 태초의 낙원(지구)에서 불의 천사에게 쫓겨난 거인들이 남극 유빙 속에 숨어들었고, 그들이 낙원을 수복하기 위해 흩뿌린 ‘살점’들이 척박한 환경에 맞춰 형태를 바꾼 것이 바로 지금의 생명체, 즉 인류라는 것이 이 ‘남극 신화’의 골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류 기원론은 등장인물들의 정신을 서서히 갉아먹는 불편한 진실로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존엄을 우주적 찌꺼기로 전락시키는 남극 신화는 탐험대와 선원들을 집단적인 신경쇠약과 맹목적인 남하를 향한 충동으로 몰아넣는다.

 

인류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가 인류가 우주적 관점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음을 깨닫는 서사 구조는 그것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광기의 산맥에서>나, 에이리언 프랜차이즈의 프리퀄 영화 <프로메테우스>,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익숙한 구조이지만, <남극의 이방인들>은 ‘거인’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그 차별점을 가진다. 유빙에 잠든 거인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장면은 마치 성경의 제2 경전 중 하나인 <에녹서>의 거인 종족 네피림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남극의 이방인들>은 생물학적 진화를 바라보는 인류의 상식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시선을 잔혹하게 뒤틀어버린다. 진화는 고등 생명체로 나아가는 창조주의 축복이나 자연의 경이로운 승리가 아니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 진화란, 거인들이 낙원을 침식하기 위해 흩뿌린 불경한 외계의 살점들이 살아남기 위해 기형적으로 형태를 바꾼 생물학적 재앙이자 우주적 감염에 불과하다. 인간 존재 자체가 지구라는 행성에 가해진 폭력적인 전쟁의 상흔이자, 목적을 잃고 부유하는 고깃덩어리의 발악인 셈이다.

 

이러한 묵시록적 관점에서 볼 때, 남극에 다가갈수록 아르투로 선장이나 올가의 부모가 겪는 극심한 수면 장애와 알 수 없는 강박은 스트레스성 광기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체의 가장 깊은 근본에 각인된, 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맹목적이면서도 재앙적인 생물학적 퇴행 욕구로 드러난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후반부에서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선장 아르투로가 유빙 속에서 깨어난 거인을 마주하고 저항은커녕 두 팔을 벌린 채 황홀경 속에서 기꺼이 포식자의 아가리로 뛰어들어 산채로 뜯어 먹히는 모습은, 진화와 문명 속의 얄팍한 인류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태초 상태로 돌아가려는 우주적 고깃덩어리의 회귀 본능 발현이다. 인류의 역사와 생명 활동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상흔이자 외상적 잔여물 정도로 규정하는 <남극의 이방인들>의 차가운 시선은, ‘인간’ 독자 마음 한구석을 유물론적 우주로 추락시키는 불편함을 만들기도 한다. 이는 코스믹 호러 장르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장르적 문법을 충실하게 담아낸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결말부에 이르러 <남극의 이방인들>은 코스믹 호러의 장르적 문법을 살짝 뒤틀며 고유의 독특함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소설은 독자의 인식 체계마저 메타적으로 무너뜨리려는 시도와 함께 주인공이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다. 올가의 아버지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고대 문자는 사실 조선인 주인공 페드로의 모국어인 ‘한글’이었으며, 작중 인물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던 그 끔찍한 살점들의 정체는 바로 결말부에서 자아 분열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린 페드로 자신의 잔해였다. 무대 밖의 설계자이자 연출자인 올가 안티만이, 미래의 시간대에서 붕괴한 페드로의 고깃덩어리를 거두어 과거의 티에라 델 푸에고, 태평양 바다, 그리고 남극의 유빙 속에 인위적으로 파종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남극의 이방인들>이 결말부에 시도한 것은 시간 여행이나 타임 루프의 구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극의 이방인들>에서 보여준 것은 허구의 서사가 현실에 노골적으로 침투하여 자신을 실재로 직조해 내는 자기 충족적 인과율, 즉 ‘하이퍼스티션’이 작동하는 순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남극 신화는 애초 우주에 존재했던 객관적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페드로를 남극으로 끌어들여 존재론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해, 미래에서 과거로 올가 안티만이라는 존재가 ‘설치한’ 목적론적이고 인위적인 픽션이었다. 서사가 현실의 원인을 사후적으로 창조해 내고, 그 원인이 다시 서사를 굴러가게 만드는 이 사이버네틱 피드백 루프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벽하게 소거된다. <남극의 이방인들> 속 등장인물들은(올가 안티만이라는 초자연적 존재까지 포함하여) 자신들이 짠 신화의 인과율 속에 갇힌 톱니바퀴로 전락하며, 독자 역시 이 빠져나갈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동참시킨다.

 

<남극의 이방인들>이 코스믹 호러 크리처물의 경계를 뚫고 독자적인 방향성으로 나아가 형이상학적 공포의 영역에 도달하는 순간은 후반부 연출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점에 있다. 소설 속 공간이 마치 연극의 회전무대처럼 바뀌며,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손가락’이 하늘에서 내려와 물리법칙을 철저히 무시한 채 태양을 눌러 꺼버리고 거대한 배를 종잇장처럼 구겨 침몰시키는 장면들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 페드로는 평생을 거친 바다 위에서 포경선의 조타수로 일하며 육체적, 정신적 ‘균형’을 잡으며 살아왔다고 굳게 믿었다. 세계는 그가 인지하는 대로 존재하며, 그는 그 세계의 중심에서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인간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발을 딛고 있던 굳건한 세계 자체가 언제든 스위치 하나로 철거될 수 있는 조잡한 ‘무대 장치’였음이 소설의 후반부에 도달하여 폭로된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실재가 그 기괴하고 자율적인 진짜 모습을 드러낼 때,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구축된 현실의 장막, 즉 인식론적 오만은 철저하게 찢어진다.

 

페드로가 자신이 독립된 인격체나 주체가 아니라 철저히 짜인 각본 속의 ‘배역’에 불과함을 자각하는 대목은 제4의 벽을 부수고 무대 밖에서 자신을 관람하는 ‘독자’와 눈을 마주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 시선 교환은 페드로에게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의 시작이다. 페드로는 자신이 관객에게 소비되기 위해 무한히 고통받고 붕괴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도망치다 끝내 이성도 자아도 상실한 본래의 고깃덩어리로 전락한다.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관람하던 텍스트가 역으로 독자의 현실마저 집어삼키려 드는 이 메타픽션적 붕괴는 독자들에게 다소 난해할 수도 있는 전개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심연적인 공포를 선사한다. 메타-존재론적 붕괴가 불러온 무대로 축소 되어버린 세계가 <남극의 이방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페드로 킴(엘 꼬레)의 정체성은 이 거대한 철학적 우화의 완벽한 주인공이다. 그는 1940년대 칠레에 정착한 동양인 이민자다. 칠레 국민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사회에 섞이려 하지만, 결코 주류 사회나 거친 칠레 선원들 사이에서 온전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모호한 경계에 서 있다. 그는 끊임없이 낯선 땅과 낯선 바다 위에서 부유하며 심리적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인물이다. 올가가 낸 수수께끼 중 ‘어둠의 균형’이 바로 페드로 자신을 가리키는 이유도, 그가 일평생 빛과 어둠, 소속과 배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극의 이방인들>은 이 사회적, 정치적 층위의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남극 신화를 통해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한다. 거인의 살점으로부터 기원한 인류 전체가 사실 이 지구라는 낙원에 기생하는 불법적인 이방인이자 외계 종양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 페드로 개인이 겪던 디아스포라적 소외감은 인간이라는 종 전체가 우주 속에서 겪는 근원적인 존재론적 소외감으로 치환된다. 백야라는 짧은 빛이 우주의 압도적인 어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듯, 페드로의 자아 역시 그 거대한 우주의 심연 앞에서 무력하게 와해한다. 결국 그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어둠 속의 균형은, 자신의 기원과 마주하여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순간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다.

 

<남극의 이방인들>은 메타픽션의 방법론을 코즈믹 호러 서사에 녹여낸, 국내에서는 그 사례를 찾아볼 수도 없는, 대체 불가능한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결말부에서 올가 안티만이 남극, 태평양, 푼타 아레나스에 페드로의 살점을 정성스럽게 심어두고 ‘완독’이라는 비상구로 우아하게 퇴장하며 막이 내리는 연출은,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닫힌 원환 속에 영원히 갇혀 있음을 시사한다. 독자가 이 소설의 첫 화(혹은 정식 출간을 통한 첫 페이지)를 다시 펼치거나, 해당 텍스트에 대해 사고하는 그 순간, 페드로는 또다시 맹목적인 충동에 이끌려 파멸을 향한 항해를 반복할 것이다. 주인공 페드로에게 <남극의 이방인들>이라는 작품 자체가 카타르시스가 없는 영원한 절망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절망감은 주인공 페드로에 그치지 않는다. <남극의 이방인들>을 읽은 독자는 서늘한 의심을 품게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소설을 읽으며 발을 딛고 굳건하다고 믿는 이 현실 역시, 누군가 관람하고 있는 어두운 무대 위가 아닐까?” <남극의 이방인들>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비웃으며,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기이한 실재의 그림자를 독자의 뇌리 가장 깊숙한 곳에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박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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