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조각 케이크란 – 장편에서 이야기 보여주기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노병은 죽지 않는다 (작가: 디듀우, 작품정보)
리뷰어: 기다리는 종이, 23년 12월, 조회 21

이 소설은 83매 정도의, 그렇게 길지는 않은 단편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굉장히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단지 그 중에서 한 부분만을 떼어내서 보여 줄 뿐이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단편소설이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단편으로 기획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단편에서 보여 주는 것보다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인물과 복잡한 사건들이 미리 구상되는 것이죠. 하지만 여러 이유로, 작가는 단편을 보여 주기로 결정하고 그 구상 속에서 특정한 부분을 뽑아내어 짧은 소설로 엮어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독자는, 약간의 혼란에 빠집니다. 이미 작가가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들이 독자에게는 처음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첫 문단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포보스의 사령관실에는 벽 하나를 차지하는 창이 있다. 온갖 보안 처리를 한 탓에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뭐든 뿌옇고 희미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붉은 행성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다. 수십억 년간 녹슨 모래의 바다와 그 사이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빙하들…. 그 위를 반란군과 우리의 전차들이 짓밟고, 궤도 폭격으로 불태워버리고 있다. 제정이 시작된 지 반세기도 더 지났건만, 그와 함께 시작된 지리멸렬한 싸움은 고향을 떠나 이곳 화성에서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나도 그때부터 같은 일을 해 왔으니, 이 전쟁은 나의 동료인 셈이다. 이곳의 싸움에 3년이나 끌게 된 것도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난다면 황제께서 쓸모없어진 나를 어찌하실지 모르니까.

독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포보스가 뭐지? 내가 아는 그 위성 포보스인가? 지금은 미래인가? 반란군? 누구로부터의 반란이지? 제정이 시작된지 반 세기밖에 안 됐다고? 주인공은 황제로부터 숙청 위협을 느끼고 있는 건가?’

물론, 첫 문단이므로 이러한 궁금증이 바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다만 궁금할 뿐이죠. 그리고 조금 더 이야기를 읽어 나가면서, 궁금증은 더욱 많아지지만 동시에 이 궁금증이 완벽하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더욱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니까요.

오히려 그 과정에서 독자는 기대의 방향성을 바꾸고, 이미 주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황제가 누군지, 어떤 제국인지, 어떤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주인공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물론 독자는 아직도 작가가 펼쳐 놓은 세계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지게 된 이야기 자체에 대한 지식과 경험, 생각을 기반으로 독자는 이야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에 성공하고 나면, 소설은 꽤 재미있어집니다. 읽어 나가다 보면 컬트와의 계약이라거나, 죽음에서 돌아온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이 그리워하는 누군가 등 여러 포인트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이후 소설은 전체적으로 느리게 흘러가며 많은 것들을 살짝살짝 보여 줍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갈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주인공의 새 육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한계에 대해 암시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아주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뻔한 것도 아닙니다. 그 중간에 서서, 독자는 새로운 정보로 덮인 괜찮은 이야기를 맛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결말까지도, 아주 정석적이지만 흥미롭다고 할 수 있죠.

전체적으로, 제목에서 말한 것처럼 맛있는 조각 케이크를 먹는 느낌의 단편소설이었습니다.

조각 케이크는 당연히 사실 더 큰 케이크에서 나온 ‘조각’ 입니다. 우리는 조각 케이크만 보고 전체를 알 수는 없지요. 맛있는 빨간 색 조각 케이크가, 사실은 절반은 빨간 색이고 절반은 파란 색인 케이크에서 나왔을 수도 있는 것처럼요.

그렇지만 그 케이크는 맛있었습니다. 긴 이야기의 조각을 어떻게 떼서 보여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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