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에서 표류하느니, 흐름이 끌어당기는구나 의뢰(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하그리아 왕국 (작가: 난네코, 작품정보)
리뷰어: 기다리는 종이, 23년 11월, 조회 36

이 리뷰는 의뢰를 받고 작성되었으며, 현재 시점 최신화인 51-5화까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포함시키지는 않았습니다만, 민감하신 분들께서는 본편을 먼저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보통 이야기에는 중심 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주인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물론 모든 이야기에 반드시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이 있어야만 한다는 법 같은 것은 없으며, 실제로 주인공이 없는 이야기들도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에 주인공이 있는 것은 그것이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을 주인공과의 관계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공의 친구, 이 사람은 주인공의 적, 이 사건은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같은 것들이죠. 이는 작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이라는 확실한 중심 축은,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을 쉽게 만들어줍니다. 주인공과 관련된 것을 만들어나가면 되니까요.

그리고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물론 중요한 인물들은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연’ 들은 분명히 존재하지요. 여왕 샤흐라자드, 그녀의 자식들, 불새의 꿈을 꾸는 자들… 정말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등장인물들이 정말 많고 그들은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인공’인 것은 아니고, 따라서 중심 축인 것도 아니닙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중심 축은 무엇일까요? 보통 중심 축이 인물이 아닌 경우, 대신 ‘사건’ 이 중심 축이 됩니다.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어떠한 목표, 혹은 사건이 존재하고 등장인물들은 그 사건에 얽혀들어가는 방식이죠. 예를 들자면 유명 하이스트 영화 시리즈인 ‘오션스’ 시리즈를 들 수 있습니다. 오션스 시리즈는 말 그대로 대니 오션과 그 일당의 도둑질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딱히 오션이 주인공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도둑질 그 자체이죠. 관객들은 어떤 물건을 훔치려는 것인지, 그걸 훔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그걸 막아내려는 세력은 누구인지 등에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말하자면 ‘도둑질’ 이라는 중심 축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등장인물들은 그 축에 반응하고, 영향을 미치며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죠.

그리고 이 소설에는 그러한 중심 사건도 없습니다.

물론, 당연히 중요한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하그리아 왕국의 차기 왕위를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싸움들이나, 불새의 꿈을 꾸는 샤흐라자드와 이스카의 삶 그 자체가 중요한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것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 축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하그리아 왕국’의 차기 왕은 도대체 누가 될까요? 저는 처음에는 이 질문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소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금새, 잘못된 질문을 가지고 소설을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죠. 누가 왕이 되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소설은 도대체 무엇이 이끌어나가고 있을까요? 저는 왜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을까요?

이 소설을 떠받치고, 이끌어나가고 있는 것은 탄탄한 설정과 그 설정에서 튀어나오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입니다. 제가 소설을 읽으며 느낀 바로는, 이 소설 속 세계는 거의 완전하게 전부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안에서 특정한 인물을 뽑아내서 세계의 편린을 약간 보여 주는 식으로 소설이 진행되지요. 중간에 진행되는 외전들에서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외전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더라도, 소설 자체에서도 충분히 느끼실 수 있는 수준입니다.

이러한 전개는 단순히 등장인물이 아니라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세계 그 자체에 빠져들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특정한 인물의 향방보다는,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가 더욱 궁금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세계가 궁금하기에 인물의 미래에 대해 궁금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스카의 미래가, 샤흐라자드의 미래가, 그리고 루키예의 미래가 궁금합니다.

다만 아무리 세계관이 치밀하고, 수많은 인물들로 그 세계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더는 인물을 추가할 수 없는 시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지금의 ‘하그리아 왕국’은 마치 수많은 지류를 가진 강과 같은 모습입니다. 정말 많은 인물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고, 그것도 정말로 재미있었지요. 하지만 더 이상 지류를 늘려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당연히, 이 모든 지류들이 언젠가는 한데 모여 하나의 큰 강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찾아오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세계라는 강 속에서 표류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어디론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붙잡아햐 하는지는 모르는 상태였죠. 표류하는 그 체험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표류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 속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었으니까요.

표류하며 바란 것은 그 수많은 지류들이 한데 모여 가는 과정에서 각자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 주고, 주변을 물들인 다음 본류로 합쳐지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되지 않고, 너무 급작스럽게 모든 지류가 본류로 합쳐져 버리는 것은 아닐지 우려됩니다. 물론 그렇게 합쳐진 본류도 정말 멋지겠지만요.

어떻게 보면 작가 분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점점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불새의 꿈을 꾸는 자들에게도 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니,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지리라는 예상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수많은 인물들이 한데 합쳐지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날이 올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기는 소설이었습니다. 어쩌면 하그리아 왕국이라는 흐름에 너무 푹 빠져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하그리아 왕국을 읽는 것은, 그 순간을 등장인물들과 함께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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