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외에도 다양한 지성체가 나오는 판타지는 많다. 그래도 주인공 및 조연이 되는 건 엘프, 드워프 정도로, 드래곤은 그 강력함 때문에 캐릭터보다는 변덕으로 인한 일시적인 도움, 혹은 주인공의 성장을 돋보이게 해 줄 무시무시한 보물상자 쯤 된다.
다른 종족은? 마족으로 묶이거나 그냥 괴물이다. 퇴치의 대상이자 그저 피해만 주는, 이를 테면 좀비물의 좀비처럼 죽이고 찢어도 어떤 죄책감도 없는 대상. 아예 생물체조차 아닌 세계관도 있고, 고함과 비명 외에는 대사로 칠 수 있는 게 없을 때가 많으며, 설령 다른 말을 한다고 해도 그다지 의미심장하지도, 생각이라는 게 있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1권에 등장해서 힘은 없고 정의감만 있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양아치 정도나 될까.
그런 종족 중 개인적으로 자주 등장한다고 느끼는 고블린, 오크, 오우거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점이 신선했다. 그들도 배가 고프고, 일을 하고, 더 배우고 싶으며, 가족을 꾸리고 내일을 꿈꾼다. 더 나은 내일을.
하지만 덩치부터 수명, 신체 구조까지 다른 그들을 오로지 ‘하등종족’으로 묶는 제국은 너무도 거대해서, 그렇게 일컬어지는 이들은 구조적 착취와 교묘한 선동으로 이용당하고 버려지기를 반복해왔다. 이야기는 그 중 하나인 오크이자 국선 변호사인 다밀렉을 주인공으로 시작한다.
그치만 이거 변호사 얘기 아니잖아요~~!! 애초에 판결을 내리는 쪽에서 덮어씌우겠다고 작정을 했으니 그들에게 유리하게 쓰인 법으로 이길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씌워준 가짜 감투와 그들이 만든 법으로, 힘 외엔 어떤 치졸한 변명도 할 수 없게 만들길 내심 기대했으나… 생각해 보면 도박판에서 거액을 따도 살아서 그 돈을 쓰기까지가 더 어려운 마당에 다밀렉에게 신문 부고 기사가 되어 달라는 청탁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걸, 멈춘 회중시계를 전당포에 넘기고 빵을 사 먹은 외전까지 다 읽은 지금은 이해한다. 아쉽지만… 정말 아쉽지만.
그간 ‘변호사’는 전쟁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과거에서 벗어나고도 좀처럼 승리하지 못했던, 그렇지만 이제 그 지식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라 도울 수 있음을 피력하는 직함이라고 생각해왔기에, 다밀렉이 후련하게 내던진 명함을 나는 괜히 아쉽게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롱이 총독이 된 게 제국이 힘으로 찍어누른 것과 뭐가 다른가 싶었는데, 애초에 지도자가 없는 환경을 겪어 보지 않은 세계관이니 오로지 내 욕심에 불과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여러모로 다른 환경과 상황, 사고 방식을 봐서 즐거웠고, 거의 매화 죽기 직전까지 구른 다밀렉과 동지들의 안녕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