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생명이 발끝으로 마주 앉는 그날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 (작가: 하승민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0제야, 23년 9월, 조회 45

* 본 리뷰는 하승민 작가의 장편 연재소설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의 단행본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이후 언급하는 내용 중 연재분과 상이한 설명 및 인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신기한 재주를 가진 동물이 많다. 그림을 그리는 코끼리, 사람 말을 따라 하는 앵무새,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개. 영리한 몇몇 동물은 반려인의 반응을 스스로 분석해 행동으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반려견용 버튼식 음성 출력기는 이미 다양한 공유 플랫폼에서 수많은 사용자의 후기를 쏟아내고 있다. 간식, 산책, 심심해 등 간단한 음성 메시지에 해당하는 버튼을 반려동물이 누르면 반려인은 그에 맞춰 반응한다. 일종의 상호 훈련이 완료되면 사람과 동물은 이전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이런 물건들이 상용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동물들의 지혜로움에 새삼 감탄한다.

사실 동물의 이런 지혜와 능력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 특히 인간이 동물의 신체, 정신적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 동물은 인간에게 영양을 보충해주는 소비재에 지나지 않았다. 실상 ‘반려’라는 호칭이 붙은 몇몇 소수의 동물에게도 불법적으로 행해지는 포획과 살생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극소수 반려동물의 경계 바깥에 있는, 이름하여 ‘가축’이라 명명되는 것, 그리고 ‘가축’조차 못 되는 생물들은 얼마나 홀대받고 있을까. 단지 조금 더 세밀한 작업이 가능한 손과 발, 보통 이상의 크기, 정교한 언어가 가능한 입과 두뇌를 가졌다는 이유로 인류는 벌써 대부분의 동물종을 멸종시켰다.

본래 말이 통하지 않는 것들은 친근함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상대가 나와 말이 통하지 않을 때의 두려움은 생각보다 크다. 같은 나라의 사람들끼리는 언어가 통한다. 다른 나라에 떨어져 있더라도, 최소한의 몸짓 소통과 번역기를 이용한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완전히 외따로 떨어진, ‘문명화’하지 않은 어떤 부족의 집단에 홀로 고립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의 언어는 고사하고 식습관이나 기본적인 생활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한 번 더 나아가, 야생의 동물 집단에 단 한 명의 인간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자신과 함께 있는 동물들이 초식이기를 빌고 또 빌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상상에만 비추어 보아도 소통이 되지 않는 존재들은 이미 서로를 경계한다. 단지 인간에게 그 경계심이 크다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렸지만.

모종의 방법으로 모든 생물이 장벽 없이 상호 간 소통을 할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사자의 인사법을 이해하고 개미는 코끼리의 크기와 무게를 안다. 꿀벌의 사회생활이 사슴의 그것과 다르며, 타조의 걸음걸이가 지네의 것과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을 모든 생물종이 알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프랑스의 과학소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첫 장편이자, 그가 다년간 집필한 것으로 익히 알려진 소설 『개미』는 인간과 개미의 소통이 가능해진 상황을 가정해 쓰였다. 작가는 개미의 화학적 언어인 페로몬의 성질을 인간이 특정 기준에 따라 분석해 그들의 언어를 해독해내는 과정과 개미들의 놀라운 사회성을 소설에서 다룬다. ‘리빙스턴 박사’라는 소형 로봇이 인공 합성 페로몬을 통해 개미와 대화하는 과정, 인간을 보는 개미의 입장이 과학적 상상을 기반으로 묘사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양이』, 『문명』, 『행성』으로 이어지는 고양이 3부작에서 고양이와 인간의 소통을 시도했다. 고양이의 두뇌와 인간의 네트워크를 연결한다는 다소 과격한 상상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는 결국 고양이들이 그들의 ‘문명’을 이룩한다는 거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본래 인간이 다른 종류의 존재(신, 동물, 식물, 정령 등)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간이 매개되어야 했다. 그것이 무당이든, 성직자든, 마법사든, 영매든, 귀신에 빙의되었다는 사람이든, 그것을 믿을 수 있든 없든 사람들은 중개자를 신뢰했다. 일반인이 타 존재와 직접 소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인간은 과학과 언어적 지식을 기반으로 타 존재와의 직접 소통을 상상할 수는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미 외국인과는 번역기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의사 전달이 가능하니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닌가.

타국의 사람과 소통이 가능해진 인간은 이제 먼 미래에 있을 동물과의 대화를 상상한다. 신이나 귀신, 요정이나 정령처럼 존재가 확실치 않은 것들은 배제하더라도 실재하는 동물과는 직접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정확도를 보장할 수 없는 동물 음성 번역기가 소비자의 흥미를 끄는 용도로 출시된 것을 볼 때면 웃음이 나오지만, 일백 년 전만 해도 타국의 언어를 일상적이고도 정확히 번역한 기계가 나오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반려동물이 수백만을 넘은 시대.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기계의 발명은 언뜻 보면 크게 유용해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약간은 더 시니컬하게 바라보자. 고양이, 강아지를 비롯한 소수의 동물과 정교한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을 넘어, 이 기계가 우리의 일상을 유의미하게 바꿀 수 있을까. 하이에나, 원숭이, 거북, 늑대, 잠자리, 무당벌레 등과의 대화가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할까. “이 기계가 어떤 식으로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선뜻, 응대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스운 일이다. 하다못해 무생물인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기계가 인공지능으로 사람의 말을 분석해 알아들어도 생활이 크게 편리해지는데, 생명체인 동물의 말을 해석할 수 있는 기술에서는 어떤 유의미함도 얻지 못하다니.

하승민 작가의 장편 소설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은 이렇게 황당한 기술을 집요하리만치 연구하는 성원과 인권 활동가이자 그의 친구인 현지가 마주한 단 하나의 기묘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모든 생명의 언어를 해석하는 기계인 커뮤니케이터를 개발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아내 승희의 뒤를 이어 그것을 완성하는 데에 인생을 건 성원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한 데모데이에서 “밥 줄 시간 확인하자고 개한테 저 기계를 설치하자는 건 아니죠?”라는 모욕 섞인 말을 듣는다. 상심한 성원에게 해양 생물학자인 동료 유코가 찾아와 그것으로 자신이 아는 고래 ‘이드’를 연구해보자고 제안한다.

반려동물의 언어를 해석하는 기능을 강조해도 무시에 가깝게 대우받았던 성원의 커뮤니케이터가 고래의 언어를 해독하는 것이 유의미할까. 반신반의하는 그와 유코의 앞에 커뮤니케이터는 이드가 사용하는 문장이 특정 국가의 말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는 결과를 내놓는다. 동해 한복판의 고래가 어떻게 인간의 언어를 배운 걸까. 누구와의 접촉을 통해서? 사람이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도 오랜 접촉이 필요하다. 하물며 인간의 소통 방식을 전혀 모르는 고래에게는 어떠하랴. 수수께끼와 같은 상황에 성원과 유코가 당황한 틈을 타 커뮤니케이터는 고래 이드의 말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고래, 아프다. 고래,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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