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하승민 작가의 장편 연재소설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의 단행본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이후 언급하는 내용 중 연재분과 상이한 설명 및 인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신기한 재주를 가진 동물이 많다. 그림을 그리는 코끼리, 사람 말을 따라 하는 앵무새,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개. 영리한 몇몇 동물은 반려인의 반응을 스스로 분석해 행동으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반려견용 버튼식 음성 출력기는 이미 다양한 공유 플랫폼에서 수많은 사용자의 후기를 쏟아내고 있다. 간식, 산책, 심심해 등 간단한 음성 메시지에 해당하는 버튼을 반려동물이 누르면 반려인은 그에 맞춰 반응한다. 일종의 상호 훈련이 완료되면 사람과 동물은 이전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이런 물건들이 상용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동물들의 지혜로움에 새삼 감탄한다.
사실 동물의 이런 지혜와 능력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 특히 인간이 동물의 신체, 정신적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 동물은 인간에게 영양을 보충해주는 소비재에 지나지 않았다. 실상 ‘반려’라는 호칭이 붙은 몇몇 소수의 동물에게도 불법적으로 행해지는 포획과 살생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극소수 반려동물의 경계 바깥에 있는, 이름하여 ‘가축’이라 명명되는 것, 그리고 ‘가축’조차 못 되는 생물들은 얼마나 홀대받고 있을까. 단지 조금 더 세밀한 작업이 가능한 손과 발, 보통 이상의 크기, 정교한 언어가 가능한 입과 두뇌를 가졌다는 이유로 인류는 벌써 대부분의 동물종을 멸종시켰다.
본래 말이 통하지 않는 것들은 친근함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상대가 나와 말이 통하지 않을 때의 두려움은 생각보다 크다. 같은 나라의 사람들끼리는 언어가 통한다. 다른 나라에 떨어져 있더라도, 최소한의 몸짓 소통과 번역기를 이용한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완전히 외따로 떨어진, ‘문명화’하지 않은 어떤 부족의 집단에 홀로 고립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의 언어는 고사하고 식습관이나 기본적인 생활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한 번 더 나아가, 야생의 동물 집단에 단 한 명의 인간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자신과 함께 있는 동물들이 초식이기를 빌고 또 빌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상상에만 비추어 보아도 소통이 되지 않는 존재들은 이미 서로를 경계한다. 단지 인간에게 그 경계심이 크다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렸지만.
모종의 방법으로 모든 생물이 장벽 없이 상호 간 소통을 할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사자의 인사법을 이해하고 개미는 코끼리의 크기와 무게를 안다. 꿀벌의 사회생활이 사슴의 그것과 다르며, 타조의 걸음걸이가 지네의 것과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을 모든 생물종이 알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프랑스의 과학소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첫 장편이자, 그가 다년간 집필한 것으로 익히 알려진 소설 『개미』는 인간과 개미의 소통이 가능해진 상황을 가정해 쓰였다. 작가는 개미의 화학적 언어인 페로몬의 성질을 인간이 특정 기준에 따라 분석해 그들의 언어를 해독해내는 과정과 개미들의 놀라운 사회성을 소설에서 다룬다. ‘리빙스턴 박사’라는 소형 로봇이 인공 합성 페로몬을 통해 개미와 대화하는 과정, 인간을 보는 개미의 입장이 과학적 상상을 기반으로 묘사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양이』, 『문명』, 『행성』으로 이어지는 고양이 3부작에서 고양이와 인간의 소통을 시도했다. 고양이의 두뇌와 인간의 네트워크를 연결한다는 다소 과격한 상상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는 결국 고양이들이 그들의 ‘문명’을 이룩한다는 거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본래 인간이 다른 종류의 존재(신, 동물, 식물, 정령 등)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간이 매개되어야 했다. 그것이 무당이든, 성직자든, 마법사든, 영매든, 귀신에 빙의되었다는 사람이든, 그것을 믿을 수 있든 없든 사람들은 중개자를 신뢰했다. 일반인이 타 존재와 직접 소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인간은 과학과 언어적 지식을 기반으로 타 존재와의 직접 소통을 상상할 수는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미 외국인과는 번역기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의사 전달이 가능하니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닌가.
타국의 사람과 소통이 가능해진 인간은 이제 먼 미래에 있을 동물과의 대화를 상상한다. 신이나 귀신, 요정이나 정령처럼 존재가 확실치 않은 것들은 배제하더라도 실재하는 동물과는 직접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정확도를 보장할 수 없는 동물 음성 번역기가 소비자의 흥미를 끄는 용도로 출시된 것을 볼 때면 웃음이 나오지만, 일백 년 전만 해도 타국의 언어를 일상적이고도 정확히 번역한 기계가 나오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반려동물이 수백만을 넘은 시대.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기계의 발명은 언뜻 보면 크게 유용해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약간은 더 시니컬하게 바라보자. 고양이, 강아지를 비롯한 소수의 동물과 정교한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을 넘어, 이 기계가 우리의 일상을 유의미하게 바꿀 수 있을까. 하이에나, 원숭이, 거북, 늑대, 잠자리, 무당벌레 등과의 대화가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할까. “이 기계가 어떤 식으로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선뜻, 응대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스운 일이다. 하다못해 무생물인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기계가 인공지능으로 사람의 말을 분석해 알아들어도 생활이 크게 편리해지는데, 생명체인 동물의 말을 해석할 수 있는 기술에서는 어떤 유의미함도 얻지 못하다니.
하승민 작가의 장편 소설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은 이렇게 황당한 기술을 집요하리만치 연구하는 성원과 인권 활동가이자 그의 친구인 현지가 마주한 단 하나의 기묘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모든 생명의 언어를 해석하는 기계인 커뮤니케이터를 개발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아내 승희의 뒤를 이어 그것을 완성하는 데에 인생을 건 성원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한 데모데이에서 “밥 줄 시간 확인하자고 개한테 저 기계를 설치하자는 건 아니죠?”라는 모욕 섞인 말을 듣는다. 상심한 성원에게 해양 생물학자인 동료 유코가 찾아와 그것으로 자신이 아는 고래 ‘이드’를 연구해보자고 제안한다.
반려동물의 언어를 해석하는 기능을 강조해도 무시에 가깝게 대우받았던 성원의 커뮤니케이터가 고래의 언어를 해독하는 것이 유의미할까. 반신반의하는 그와 유코의 앞에 커뮤니케이터는 이드가 사용하는 문장이 특정 국가의 말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는 결과를 내놓는다. 동해 한복판의 고래가 어떻게 인간의 언어를 배운 걸까. 누구와의 접촉을 통해서? 사람이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도 오랜 접촉이 필요하다. 하물며 인간의 소통 방식을 전혀 모르는 고래에게는 어떠하랴. 수수께끼와 같은 상황에 성원과 유코가 당황한 틈을 타 커뮤니케이터는 고래 이드의 말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고래, 아프다. 고래, 슬프다.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은 크게 두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그 한 축을 차지하는 것은 성원의 삶으로, 그는 ‘인간과 동물’의 소통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다. 승희가 남기고 간 기술을 완성하는 것이 성원의 목적지다. 모든 생물의 의사 표현을 해석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터’라는 가상의 번역기(또는 통신 장치)의 등장이 기술적인 면에서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그 ‘무엇’과도 장벽 없이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타 존재를 향한 두려움이 조금은 줄지 않을까. “과학의 발전은 인류가 공포를 줄여가는 과정”이라는 작가의 과감한 상상은 그럴듯한 기술적 설명과 함께 인과성을 얻는다.
이런 기기가 발명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누구와 소통해야 할까. 작가는 엉뚱하게도 ‘고래’를 등장시킨다. 고래는 우리와 생김새가 가장 유사한 유인원 종도 아닐뿐더러 서식지마저 바다다. 뭍에 사는 인간과 물에 사는 고래가 소통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라고 평가될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 우영우처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머리에서 고래가 펄쩍 뛸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은 이상, 우리가 고래와 소통할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
맞다. 고래는 인간과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그것이 하승민 작가가 ‘고래’라는 동물을 고른 진짜 이유다. 고래는 포유류라는 것 외에 인간과 비슷한 점이 전혀 없다. 인간은 특정한 주파수 이내가 아니면 고래가 내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그래서, 고래는 멸종 위기종이 되어가고 있다. 작은 개미 여럿이 큰 곤충과 동물을 공격하듯, 인간은 저보다 수십 배 이상 큰 고래를 단숨에 사냥할 수 있다. 그들의 움직임도, 비명도 인간의 감정에 작은 타격조차 입히지 못한다. 고래는 단지 사람과 소통할 수 없으므로 가장 크게 희생되고 있는 종이다.
커뮤니케이터의 개발과 연구를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지만,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홀로 갈 길을 가는 성원, 남들이 다 들어가는 안정적인 직장은 고사하고 사회 구호 활동을 하는 현지의 모습은 바다에 홀로 있는 고래 이드와 유사하다. 호시탐탐 약자를 멸종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높은 스펙을 쌓아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성원과 현지는 멸종 위기 생물이다. 무리에서 벗어나 홀로 존재하는 이드와,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승희의 유작과도 같은 커뮤니케이터는 성원을 비롯한 홀로 있는 것들의 소통을 시도한다.
성원의 인생에서 독자가 뽑아낼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는 ‘소외’다. 커뮤니케이터 기술자인 본인, 해양 생물학자인 동료, 인권 활동가인 친구. 성원의 주변에는 독특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누군가 가야 하지만, 대체로 가지 않으려는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고래 이드의 존재는 신비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드 역시 무리에서 떨어져 있다. 집단 활동을 하는 고래의 생태를 고려했을 때 상당히 특별한 개체다. 고래가 자주 내는 음이 아닌 52헤르츠의 주파수로 이드는 인간과 고래의 첫 소통을 시작한다.
소통의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선 커뮤니케이터가 고래의 음성을 해독하는 데에 서투르다. 인간과 그 주변의 동물을 기반으로 데이터를 수집했을 커뮤니케이터에게 고래의 표현을 입력했을 때, 얼마의 정확도를 보장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또한 고래 이드의 주변에는 그를 포획하려는 고래잡이배가 어슬렁대고 있다. 같은 인간으로서 유자호의 성원과 유코, 해풍호의 석기와 원구는 완전히 다른 성정을 지녔다. 이드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유자호의 배려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드를 살해하려는 해풍호의 욕망은 크게 대비된다. 하지만 이드는 자기가 해야 할 말을 오롯이 커뮤니케이터에 전달한다.
번역기는 놀랍게도 이드의 언어에서 ‘티베트어’를 포착한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이드의 발화는 티베트어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커뮤니케이터는 이드가 고래라는 사실을 배제해버렸다. 이드가 남다른 발성 기관을 가진 티베트인이라 가정하고 그동안 수집한 이드의 모든 음성 신호를 번역하는 중이었다. 분석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드는 말을 하는 고래였다.”
번역기가 해독한 고래의 음성 끝에는 수수께끼처럼 티베트의 지명과 그곳에서 흔하다는 여아의 이름이 등장한다. ‘응아바, 체텐 돌마, 돕다, 검은 천막’. 커뮤니케이터가 내놓은 이 분절된 단어들을 문법으로 연결하는 것은 성원의 친구 현지의 몫이다.
응아바의 체텐 돌마
이 소설이 단지 종 간의 소통, 즉 기술만을 다루는 테크픽션으로만 끝났다면 차갑고 이성적인 이미지를 얻었을 테지만, 제목에서부터 느낄 수 있듯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 풍부한 질감의 감정과 사랑, 우정, 동지애와 인류애까지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은 어떤 생물도 소외되지 않는 동시에 어떤 ‘사람’도 외면받지 않는 세상을 상상한다. 그것은 이 소설의 다른 한 축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기술의 축을 성원이 담당하고 있었다면, 인간성과 사람의 마음을 담당하는 것은 현지다.
성원이 기술을 사랑하듯 현지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래서 인권을 위해 활동한다.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한 사람을 구하는 데에 보람을 느끼는 현지의 성정은 고래의 구조신호를 정확히 포착해 낸다. 응아바가 어디인지, 체텐 돌마가 누구인지, 성원이 알아낼 수 없는 정보를 현지는 스스로 캐낸다. 원활하지도 않은 성원과의 통신에서 그가 남긴 몇 건의 메시지는 현지가 돌마를 찾아야 할 이유를 만든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현지는 동물과 대화를 할 줄 아는 여자아이 돌마를 만나자마자 어떤 운명적 직감을 느낀다.
현지의 직업은 ‘활동가’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언뜻 생각하면 모두가 활동가처럼 보이지만, 직업으로서의 활동가가 되기는 매우 어렵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먹고, 숨 쉬고, 걷는 것 이상의 활동. 구조하고, 외치고,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은 멋있지 않아요. 굶어 죽는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과 죽은 이들의 가족을 영상에 담는 건 절대 재미있는 일이 아니에요. 불어 타는 사람, 총에 맞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 매달린 사람, 그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과 울분과 허탈함을 담은 건 끔찍한 일이죠.”
이 소설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존재들의 연대다. 죽은 아내의 업을 이어가는 성원과 활동가 현지, 동물과 대화하는 돌마, 인간과 대화하는 이드.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은 넷이 똘똘 뭉쳐 전하는 건 연결(connection)이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다.
응아바의 체텐 돌마는 바다를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바다를 상상할 수 있는 환경도 되지 못하는 티베트의 깊은 내륙 지역에 산다. 돌마가 동해의 고래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직선거리로 2500킬로미터”를 넘는 물리적 거리감과 ‘바다, 고래, 가청범위 밖의 음파’ 등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줄 수밖에 없는 심리적 거리감을 모두 극복해야 했다. 성원과 현지처럼 ‘다 큰 어른’이 보기에 작은 여자아이에 불과한 돌마는 어떤 매개도 없이 고래를 비롯한 타 동물과 소통한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 발전의 집합체인 커뮤니케이터가 절반은커녕 열 개 중 한 개도 겨우 해석해 내는 고래 언어를 돌마는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돌마의 등장은 분명 이 소설의 큰 변곡점이다. ‘돌마’의 존재는 서로 평행한 것처럼 보이던 소재를 집합하는 하나의 지점이기도 하다. 기술자로서의 성원과 활동가로서의 현지, 인간도 육지생물도 아닌 이드와 호시탐탐 고래를 노리는 해풍호의 석기와 원구까지. 십수 명의 삶의 궤적이 이름도 낯선 타국의 체텐 돌마라는 한 아이에게서 교차한다. 고래 이드가 말하고자 했던 것. 고래, 아프다. 고래, 슬프다. 이 고통과 괴로움의 근원은 헤아릴 수 없는 거리를 지나야 있는 작은 꼬마 친구가 처한 위험이었다.
“간절한 것들은 모두 이어져 있대요. 겨우 열 살짜리 아이가, 그렇게 말을 했어요.”
어른들은 돌마를 ‘겨우 열 살짜리 아이’라고 했지만, 아이들이야말로 연결감을 가장 잘 느낀다. “어린아이의, 흐리지 않은 눈으로 보면 연결은 그냥 보인다”1 . “그러나 사회는 아이들에게 타자화를 가르치면서 타고난 연결감을 말살해버린다”.2 체텐 돌마에게는 아직 동물과 연결될 수 있는 감각이 살아 있었다. 그것도 다른 보통의 아이들보다 훨씬 비상하게. 돌마의 특성을 현지는 알아챈다. 현지 역시 사람들과의 연결감으로 일을 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이다.
돌마를 구하는 과정에서 하나 이상의 목숨이 희생된다. 손익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거 손해 아냐?’라며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 중국에 의해 탄압받는 티베트에서 돌마가 희생되는 것과 돌마를 구하기 위해 희생된 여럿의 생명. 그들의 무게를 감히 가늠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 ‘계산’을 하기도 전에 이미 행동하는 사람들이 ‘활동가’이다. 발과 말로 사람을 구하고 깨우치는 일. 그것이 현지의 직업이므로 돌마는 그녀에게 필연적으로 발견될 아이였다. 이드와 성원과 동료들이 홀연히 현지를 돌마에게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돌마는 ‘록빠’라는 이름의 고래를 짧게 소개한다.
록빠는 ‘친구’라는 뜻의 티베트말이다. 성원과 유코가 연구를 위해 부르던 고래의 이름은 ‘이드’. ‘그것’이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기원했다. 낯선 존재로서 유코와 성원의 연구 대상이던 이드는 돌마에겐 ‘친구’였다. 바다에서 낮고 깊고 넓은 음성으로 돌마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 육지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푸른 바다와 광활한 수평선, 인간으로서는 평생 알 수 없을 고래의 감각이 돌마에게 직접 전해진다. 이런 아름다운 친구를 어떻게 ‘이드’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동해의 고래의 외침이 티베트의 여자아이에게 닿는 것. 한국의 성원이 현지를 응아바로 보내는 것. 연결과 또 다른 연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 ‘connection’은 단순히 존재와 존재의 물리적 접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과 마음의 접속이 돌마를 구했다. 화상(火傷)과 같은 동상(凍傷). 눈앞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자연의 위대함을 보면서도 한 아이를 위해 온 세계가, 인간과 동물과 기술의 세계가 시작한 도전은 무사 탈출로 끝을 맺는다. 그 모든 것이 힘을 합해 구한 것은, 간절한 것들의 목소리를 잊지 않은 한 여자아이다.
“돌마는 앞으로 무수히 많은 록빠가 나타날 거라고도 했다. 52헤르츠의 주파수로 이야기하는 고래가 하나 둘 인간을 향해 손을 내밀 거라고, 인간은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컴퓨터도, 트래커도, 커뮤니케이터도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매개하지 않은 채 인간과 동물이 연결되는 그날. 52헤르츠의 대화가 커뮤니케이터 없이 가능한 그날. 고래와 인간은 비로소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오지 않아도 우리는 할 수 있다. 동물과 인간, 지구상의 생물은 본래 하나의 생명에서 출발했다. 이미 많은 것을 해쳤으니, 그것을 복원하는 것 또한 사람의 일이다. 고래, 강아지, 고양이 밖의 생명이 각자의 주파수로 인간에게 이미 말을 걸어오고 있다. 그것을 포착해 듣는 것은 우리의 일이며, 연결되기에 늦은 때는 없다.
맺으며
아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자 했던 기술자 성원. 그가 갈 곳을 알지 못하고 허우적거릴 때 손을 내밀어준 고래 이드는 짧은 시간의 교류를 통해 성원의 발걸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천 점에 가까운 성적을 내야 하는 토익 시험의 문턱에서 3점도 채 미치지 못하던 학점을 생각하며 숨이 턱턱 막히던 현지는, 역시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신념이 틀리지 않았음을 몸소 체험했다. 단지 무리에서 고립된 멸종위기종 고래에 불과했던 이드는 2500km가 넘는 곳에 있는 여자 아이를 소리 단 몇 마디로 구했으며, 그로부터 시작된 모든 노력과 투쟁이 모여 체텐 돌마라는 한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상은 도착점을 알지 못한 채 뻗어가는 소리로 가득하다. 모든 음성의 주파수와 음역대를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시끄러운 소음에 파묻혀 미쳐버릴 것이다. 때로는 나와 통하는 단 하나의 가느다란 소통구만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가끔은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라는 한 항공사의 광고처럼 아예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소리를 한데 모아 시끄러운 소음으로 밀어 놓고 선택적으로 내가 원하는 상대와만 소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때로 그렇게 시작된 가느다란 소통이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곤 한다는 것을. 대책 없이 내달리던 소통의 흐름이 별안간 우리를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고래의 몇 마디가 한국의 기술자가 개발한 커뮤니케이터를 타고 티베트말로 번역된 것처럼. 그 티베트말이 어떤 활동가에게 한 돌마라는 여자 아이를 소개한 것처럼. 티베트인 돌마와 고래 이드, 아니 록빠의 초월적 사랑을 우리가 감히 엿볼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나를 부르는 곳에 있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나는 있어. 네가 부르면 내가 있을 거야.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 나는 널 만날 거야.”
인간과 동물의 소통을 가늠하는 세상에서 나와 당신의 세계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몇 가닥의 음성이 필요할까. 그 소리는 몇 단계의 해석과 번역을 거쳐야 할까. 오역이 필수인 번역을 몇 번쯤 거친다고 내 진심이 당신에게 왜곡되지는 않을까. 이런 걱정을 하기 전에 이드의 마음을 읽던 돌마처럼 눈을 감고 나를 향해 내달리는 소리에 집중해 본다.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 같은 소리 중, 태초부터 목적지가 나로 정해졌던 음성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을까 의심하던 차에 귀에 꽂히는 주파수가 있다. 한 자릿수의 정확도를 자랑하는 내 마음이 해석하기로 그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원한다, 당신과,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