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가 팍팍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무지출 챌린지니 거지방이니 하는 것도 바로 그 일환.
특히 거지방은 혼자서는 약해질 수 있는 의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으쌰으쌰하며 다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면이 있다. 자칫하면 우울할 수 있는 거지방이라는 이름도 타인과 같이 소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위안과 안도감을 얻을 수 있기도 하고.
그러나 여기 존재하는 거지방은 약간 다르다. 2학년 V반의 거지방의 공지사항부터 의미심장하다.
1.자기가 쓴 금액은 빠짐없이 여기에 공유한다!
2.자기가 쓴 금액만큼 이름 옆에 누적액을 적는다!
3.매달 말일마다 소비액을 비교하여 소비왕과 거지왕을 뽑는다!
4.소비왕은 거지왕의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
겉으로만 보았을 땐 문제가 없다. 4번 항목도 그러하다. 거지방의 취지가 돈을 아끼자는 것이니만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사람이 착실하게 수행한 사람에게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법도 하지 않은가? 그러나 늘 소비왕으로 뽑히는 지현이와 거지왕으로 뽑히는 미정이의 관계는 뭔가 좀 다르다. 소비왕인 지현은 거지왕인 미정을 은근히 돌려서 깐다. 겉으로는 말리는 척, 감싸주는 척하지만 찬찬히 대화를 뜯어보면 오히려 미정에게 면박을 주도록 유도하거나 하는 식으로 교묘하게 괴롭힌다. 겉으로 보이던 학교폭력이 온라인 상으로 옮겨가며 괴롭힘과 압박의 수위는 올라가고 한층 더 지능적이 되었는데, 이 단편에서 여과없이 그대로 살펴볼 수 있겠다. 오히려 현실보다 훨씬 순한 맛이라 봐도 될 것 같기도 하고. 경제력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니만큼 아이들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데, 절약을 위한 거지방을 만들어 소비왕에 랭크되는 식으로 돌려서 자신의 경제력을 과시하는 지현의 행동은 영악하다고 말할 수밖에.
그러나 대학을 가면서부터는 상황이 역전된다. 집이 망하면서 지현은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활을 유지하게 되는데, 옛 친구였던 유나와 미정이를 만나면서 그 둘에게서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느낀다. 예전엔 자기에게 빌빌거렸던 주제에, 나한테는 욕했던 주제에.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지현을 서서히 갉아먹으면서 조여오는데, 여기서 벗어날 수단으로 지현은 과거와 똑같은 행동을 선택한다. 바로 새로운 절약방에서 소비왕으로 등극하는 것.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지현을 보면 자업자득이라거나 한심하다는 생각을 넘어 오히려 안쓰럽기까지 하다. 미정을 새로 만났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사과를 했다거나 하면 차라리 정신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시간은 흐르는 것이니 현재의 위치는 어떻게든 과거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지현처럼 파멸로 한발짝씩 걸어들어가는 수밖에.
돌려서 본인의 재력을 자랑하는 어린 사고방식과 자신이 괴롭혔던 미정에게마저 뒤처진다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현은 결국 신용카드 리볼빙 서비스까지 이용하게 되면서 금전적으로 막대한 빚을 지고 사라진다.
묵묵히 지현의 괴롭힘을 참고, 지현이 스스로를 옥죌 수 있도록 비슷한 방법으로 되돌려줬으며, 이제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미정의 인내심에는 그저 박수를 보낸다. 빚쟁이가 된 지현에게 메세지를 보내며 미정은 과거에 상처받았던 자신을 훌훌 털어내었으리라 생각된다.
sns가 활발한 시대이니만큼 상대방과 나의 재력이 확연하게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가 상승률에 비해 임금 상승률은 높지 않으니 거지방, 절약방 등을 만들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시대가 이렇다고 해서 본인이 남들보다 재력이 좀더 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우월감을 느껴도 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라진 지현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스스로가 만든 지옥에 걸어들어가서 고통받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