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언제로 가장 돌아가고 싶어?”
얼마 전부터 동생이 과거를 묻는 빈도가 잦아졌다. 왜인지 이 질문에 ‘꽂힌’ 것처럼 꽤 자주 질문할 때도 있다. 그때마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언제로 가장 돌아가고 싶을까.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때의 나는 어땠을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내 과거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을 유난히 힘들게 보내거나 한 것도 아닌데, ‘굳이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자꾸 든다. 그 당시보다는 지금이 낫기 때문인 걸까. 생각할수록 그건 아니다. 한 가지 가설은 나에게 크게 굴곡진 사건이 없었다는 것이다. 태생이 무욕적이기도 했거니와 살면서 큰 감정의 요동을 겪은 기억도 거의 없다. 이런 태도를 유지하며 살다 보면, 비록 아직은 살아온 시간이 짧지만, 인생에 굴곡이 덜 지게 마련이다. 요컨대 크게 떠오르는 기억 자체가 없으니 당연히 회귀하고 싶은 지점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시간 여행 소설을 꽤 흥미롭게 보는 편이다. 어떤 욕망도 커다란 경험도 없이, 타인에게 긍정적인 마음을 기대지도 않고 (또는 기대하지 않고) 살아온 탓에 아직 돌아가고 싶은 시점을 만들지 못한, 어떤 사람의 관점에서. 그 때문인지 회귀 소설 속 주인공들이 과거로 시간을 돌리려는 욕망은 신기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걸고 계약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한다. 심지어는 목숨을 내놓으며 일정 시간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도 있다.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이 시도들은 모두 누군가를(또는 무엇을) 구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회귀는 인간의 간절함을 다루는 데에 최적화된 SF 장르다. 워낙 긴 시간 사랑받아서인지 유형도 여러 가지다.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 루프’와 특정 시간을 순환하는 ‘타임리프’가 대표적이다. 조금 더 매끈하게 시공간을 이동할 것 같은 ‘타임슬립’도 회귀의 한 종류다. 시간을 거스르는 방법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고전적인 타임머신부터 가장 미래적인 양자역학의 변용까지. 환상으로는 요술사와의 계약부터 현실로는 일상적인 물건들까지 주인공과 시간 여행을 매개하는 도구와 인물 들도 무궁무진하다. 그래서인지 과거로의 여행자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두 가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는 누구를 구하려는가. 그리고 그는 무엇으로 여행하는가.
이런 나름의 목적을 갖고 시간 여행 소설을 즐겨 읽는 나에게 이준 작가의 소설 〈안개로 누룩을 만들어 삼키면〉은 여타의 회귀 소설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안개로 만든 누룩을 먹으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니. 그의 소설을 한두 편 읽고 말 독자는 아니라는 점에서 분명히 하지만, 이준 작가의 소설에는 그가 지닌 잠재력이 무의식적으로 녹아 있다. 그의 이전 소설이 일관적으로 보이던 특징이 〈안개로 누룩을 만들어 삼키면〉에서도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리고 조금 더 작가의 색이 입혀졌다는 점에서 이제는 어느 정도 소설의 분위기를 이끌고 형성하는 힘까지 생겼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특정 작가가 쓴 소설이 서로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과 그의 문체가 형성되었다는 표현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다. ‘소설이 서로 비슷하다’라는 말은 자가복제를 의미한다. 어떤 소설을 읽어도 결말이 예상되는, 이미 쓸 대로 써서 닳고 닳은 플롯을 또 쓰는 작가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러나 작가의 ‘문체’가 형성되었다는 말은 큰 칭찬이다. ‘문체’는 작가에게 도장과 같다. 구병모, 김엄지 등 작가의 소설은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대충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작가 특유의 소설 속 분위기가 문장에 녹아나오는 것으로 꽤 오랜 시간 글을 연구하고 써온 작가에게 드러나는 특징이다. 이제 이준 작가는 자신의 문체를 어렴풋이 깨달아가는 중이다. 이것은 작가 스스로 알 수도, 또는 독자에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뚜렷해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이전에 읽은 그의 이야기와 달리 훨씬 환상적이고 약간은 SF 같기도 한 이 단편에서도 어김없이 발견되는 그만의 시그니처는 무엇일까. 그리고 마침내 발견되어야만 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1.독일
이준 작가는 독일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한 나라에서, 여러 명이 합을 맞춰야 할 수 있는 건축업에 종사하고 도면을 그린다는 작가 소개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그는 독일의 언어를 막힘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 중 다수의 배경이 독일, 특히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에게 독일은 거주지이자 창작의 토대로서 자리 잡는 중이다.
그러므로 독일이라는 장소를 묘사할 때 그는 더욱 섬세해진다. 베를린이라는 도시, 독일이라는 나라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하거나 그에 관심조차 없던 독자가 읽더라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작가의 세심함에 깜짝 놀랄 때도 있다. 그는 독일이라는 공간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과 그의 가치관, 성격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녀는 원래 화가였는데 비관적인 자기실현적 예언에 시달리다가 오히려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었다. 갤러리 규격에서 벗어나니 세상을 큰 캔버스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가나 도장공이나 독일어로는 똑같은 말러(Maler)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도장공 직업교육을 받았다.”
〈안개로 누룩을 만들어 삼키면〉의 주인공 박원(프라우 파크)은 도장공이지만 본래 화가였다. 도장공과 화가라는 직업을 우리말로 쓴 소설에서는 예술과 접해 있는 분야라는 정도로만 연관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어로 그것들을 소개한다면 ‘말러’라는 단어의 동일성까지 언급 가능하기에 더욱 유사한 느낌을 준다. 자신의 본래 직업과 발음이 같지만 다른 일을 하는 주인공은 독자에게 자신이 화가로서 실패한 것이 아닌, 연장된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상황을 은유한다.
언어에 있어 작가의 이중정체성은 큰 장점이다. 이준 작가는 이를 소설에 충분히 융화하여 인물의 대사에 ‘레이디’,‘프라우 파크’ 등의 이국적 어휘와 발음을 그대로 쓰거나 독일인만 발화할 수 있는 문장을 곳곳에 삽입한다.
“DDR(옛 동독)가 좋았어.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세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 (…) 지금 이 더러운 베를린을 봐. 개나 소나 들어와서 독일을 더럽히고 있어. 모든 게 잘못됐다고.”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작업반장의 말은 “투명한 고백”이다. 그는 동독 시절을 그리워하며 통일 후 함께 살게 된 서독 사람들을 ‘개나 소’에 비유한다. 작가는 독일과 한국의 역사·정치적 유사성, 그리고 자신이 충분히 독일의 통일 이후 문화를 경험했음을 토대로 한국 독자에게 기시감을 줄 수 있는 장면을 만든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한국은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박원은 작업반장의 말을 “오해 없이 해석하기 위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애쓰다 결국 속에 든 모든 걸 게우고 만다. 과잉된 것처럼 보이는 그의 행동은 어쩌면 한국 사람, 내지는 분단을 경험한 나라의 사람에게만 이해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분명히, 이 울렁거림이 무엇인지 감지될 것이다.
이처럼 독일은 이준 작가의 삶과 글을 구성하는 하나의 큰 축이다. 그렇다면 독일과 함께 그의 소설에서 다른 쪽의 균형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큰 기둥은 무엇일까.
2.건축
이준 작가는 도면을 그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번 소설은 주인공 박원의 직업이 도장공이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작업장을 전면의 배경으로 내세운다. 그래서인지 〈안개로 누룩을 만들어 삼키면〉에는 건축가들의 일상적 대화와 은어, 축약어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현장에 없어서는 안 될 작업반장 플로리안을 소설 내 주요 적대자로 설정하기도 했으니 일반인 독자들이 보기에는 더욱 흥미롭다. ‘건축’이라는 분야는 의식주 중에 하나를 책임지는 만큼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일상적으로, 또는 보편적으로 눈에 띄는 직업은 아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준 작가는 독자에게 가려져 있던 건축 분야의 베일을 소설을 이용해 조금 걷어낸 것이다.
소설 안에는 ‘건축가’, ‘도장공’ 등 현장에 필요한 직업의 이름이 종종 등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단편을 읽다 보면 건축업 종사자로서 작가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높은 빈도로 들린다는 점이다. 특히 인상적인 문장은 소설의 말미에 나온다.
“이전처럼 누룩 만들다가는 건축가들이 죄다 여기로 몰려올 거예요. 그들은 시간과 체력을 무한으로 쓰고 싶어 하니까요.”
시간 여행 장르는 최근 독특한 유행을 맞이하고 있다. 자신의 시간이 모자란 현대인들은 시간 여행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어떤 소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에 갇혀 기계적으로 루프를 도는 주인공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타임머신에 큰 감정의 욕망 없이 올라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중이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건축가뿐인가. 이제는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보편화된다면 누군가를 살리거나 복수하는 종류의 사람보다 그저 그 안에서 내 하루를 무한히 늘리려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이준 작가에게 건축가란 그런 시간 여행에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다.
요컨대 건축가는 보통의 독자에게 매우 생소한 직업이다.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이준 작가의 관점을 투영해서 간접 경험한 바에 따르면 매우 바쁘고 정신없으며, 많은 이와의 협업을 요하기 때문에 그 와중에 대인 관계도 좋아야 한다. 그러니 만약 시간을 되돌리는, 안개의 누룩이 발견된다면 왠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들을 향한 작가의 절절한 마음에 독자들은 이 낯선 땅에서 일하는 한 명의 건축가에게 공감하게 된다.
그 건축가는 소설 속 박원일 수 있지만, 실상은 작가 자신이다. 살풀이를 하듯 유감이 없이 건축가의 한과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이준 작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무인巫人이다. 하늘하늘 풀려 오늘도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건축’이라는 분야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중개자다.
3. 사랑
이준 작가는 여러 소설에서 많은 경우 여성 인물 간의 사랑을 그렸다. 트랜스젠더와 같은 퀴어 캐릭터도 높은 빈도로 등장한다. 퀴어프랜들리(queer-friendly)한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애정의 결이 그의 단편들에서는 만져진다. 〈안개로 누룩을 만들어 삼키면〉 또한 마찬가지다. 이 단편 안에서 로맨스의 주체인 남우와 박원은 중성적인 외자 이름을 가졌지만, 소설 안에서 그들이 여성이라는 암시가 분명하다. 작가가 이전의 소설에서 만들었던 ‘리아’라는 캐릭터를 생각했을 때, 남우와 박원의 캐릭터는 색과 향이 강렬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소설의 배경과 분위기를 만드는 ‘안개’라는 단어와 썩 잘 어울린다. 은은한 것에서 강렬한 것까지 이준 작가의 사랑론은 넓이와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특별히 이번 단편에서 그의 사랑은 환상과 관련되어 있다. 둘 다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사랑과 환상은 궁합이 잘 맞는 소재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감각적으로 표현할지는 다른 문제다. 이준 작가는 오감 중 시각과 촉각을 사용하기로 했다. 안개와 연기 등 희뿌연 분위기는 색채와, 찌르고 고통스러워하는 감각은 촉각과 관련된다. 구체적인 장면과 소재가 덧씌워진 사랑, 환상, 시간 여행은 비로소 상상이 쉬워진다.
이 소설은 시간 여행자가 등장하는 환상소설이다. 묘지와 안개의 음산함 속에서 시간 여행의 주체는 타지 출신의 묘지기다. 그는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라면 안개로 만든 누룩을 먹어야 한다. 안개로 만든 누룩은 먹자마자 신비한 효과를 낸다. “목젖을 짓누르며 응축된 안개가 팽창”하고 구역질이 나 입을 벌리자 “굴뚝처럼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회귀의 장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작가는 이마저 환상으로 녹인다. 생각해보면 다수의 시간 여행에서 과거로 막 돌아가려는 순간은 아주 중요한 변곡점임에도 자세히 묘사되지 않거나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회귀의 목적지에서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할지가 모두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개로 누룩을 만들어 삼키면〉은 회귀의 지점을 설명하는 데에 큰 공을 들인다. 독자는 안개로 만든 누룩이 연기를 피우며 시간을 되감는 장면에서 작가의 섬세함과 회귀를 향한 애정을 본다.
애절한 사랑을 위해서는 빌런이 있어야 한다. 악당은 더욱 악랄하게, 선한 인물은 더욱 선하게. 위험한 상황은 극도로 위험하게, 안전한 장소는 완전히 안전하게 만들 때 소설의 굴곡이 살아나고 이야기가 선명해진다. 이런 굴곡을 위해서는 악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소설에서는 시간여행 방식을 오해한 작업반장 플로리안이 그런 역할로 등장해 흥미를 돋운다. 그는 전형적인 빌런(villain)이며 조금은 평면적인 악역이다. 그는 묘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해치고자 한다. 박원도, 남우도 ‘애송이’라고 불리는 어린 건축가도 그의 손에 죽거나 죽을 위기에 처한다. 플로리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반복해서 틀린 방법으로 시간 여행을 시도한다. 일 년에 한 번씩 묘지에 불을 지르지만, 그것은 아무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 그는 왜 틀렸다는 걸 알면서 10년 동안 이런 행동을 반복할까. 이유는 소설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플로리안에게는 한층 더 진화된 악당으로의 가능성이 있다. 그에게 지금 있어야 하는 것은 ‘사연’이다. 사연을 부여하는 순간, 모든 캐릭터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갖는다. 마침 플로리안에게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그러니까 사연이 딱 들어갈 만한 안정적인 자리가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왜 결론이 없이 남에게 피해만 되는 행동을 10년간 끈질기게 하고 있을까. 그에게는 어떤 원한이 있으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회귀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가. 플로리안의 기행을 설명하려면 자연스럽게 그의 과거를 짚아야 한다. 과거에 독자의 렌즈를 들이미는 순간, 그에게서 보여야 하는 건 방화와 관련된 타당하고 개연적인 사연이다.
‘사연’으로 플로리안은 연민 또는 공감을 얻거나 더 악랄한 인물이 될 수 있다. 그가 이야기 초반에 같은 민족을 멸시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 이 상황에서 그에게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는 것은 조금 위험한 시도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과거를 들추며 더 추악한 모습을 부각하는 건 어떨까. 마침 두려운 기운을 풍기는 ‘묘지’와 신비하고도 기묘하게 등장하지만 뚜렷한 소재로 쓰이지 않은 ‘교회’라는 장소도 있다. 대체 플로리안에게는 어떤 과거가 있었을까. (이 이상의 상상은 작가의 몫일 테다)
사랑을 위해 배치된 환상과 악당, 공간과 시간, 배경의 구체성은 이야기를 향한 독자의 감각적 상상력을 끌어올린다. 이준 작가가 창조하는 세상은 확실히 이전보다 더 독자에게 편리하고 편한 방식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런 그의 머릿속 세계를 누룩과 안개, 시간 여행을 결합한 잔잔하고도 안온한 연대로 만나게 되어 즐거웠다. 특별히 처음과 끝에 배치한 그림은 작가가 배경으로 쓰고자 했던 이미지를 상상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세상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장면을 만들어나가길 좋아하는 독자도 있지만, 작가가 영감을 받은 그림이나 사진, 음악 등에서 서사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독자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이 글을 더 다채로운 방향으로 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준 작가는 벌써 다음 소설이 기대되는 작가다. 사랑과 세계, 나와 당신을 연결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그에게 짧고 가볍게 써내려간 이 글로 감사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하나 집어 입에 넣으면 화한 연기를 내뿜는, 부드러운 안개로 빚어진 누룩의 모양과 맛, 그 끝에 있을 두 이방인의 사랑을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