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를 공부하다보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구한말~일제강점기 쪽이 아닐까 싶다. 객관적으로는 독립운동을 주도한 수많은 (이름이 배우 유사한) 많은 단체들과 그들의 성향(공산주의, 민주주의)을 기억하는 게 어렵고, 심리적으로는 망해가는 나라의 세세한 피해들을 익히는 게 괴롭다.
힘들게 일제강점기를 끝내면 이번엔 동족상잔과 분단의 현실이 다가온다. 비극에 또 비극이다. 이 시기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슬픔’을 배제 할 수 없는 것 같다. 멀리 ‘수난이대’ 같은 소설에서 부터,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실화 기반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웰컴 투 통막골] 같은 과하지 않은 휴머니즘적 유머를 섞은 작품에서도 슬픔의 페이소스는 짙게 묻어난다. 거기에 ‘부치지 못한 편지’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안락한 현재를 누리는 나는 슬픔을 넘어선 부채감마저 짙게 느끼게 된다.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 가네모리 마쓰오’ 역시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국군이되 일본식 이름을 쓰는 그 모순에서부터드러나듯, 일제강점기~6.25를 겪은 이가 주인공이다. 일본에서 나서 자란 그는 조선말보다 일본말이 편하고 신사참배가 당연한 등교문화의 일부인 소년이었다. 그의 의식세계는 조선인 출신 소년의 출현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깨져간다. 그리고 대동아전쟁의 패배, 조선으로의 귀환, 6.25의 발발과 미군의 등장 후, ‘슈샤인 보이(구두닦이)’로의 생계유지마저 어려워지자 그는 지독한 가난을 피해 국군에 입대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에겐 투철한 신념이나 굳은 믿음따위는 없다. 새로 발 디딘 조선땅에서 우리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친구의 말에도 ‘천황에게 하던 절을 다른 왕’에게 하게 될 것 뿐이라 생각하고, ‘그게 가능’하겠느냐 반문할 뿐이다. 그는 6.25가 왜 일어났는지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밥주고 잘 곳을 줄거란 생각에 국군에 입대한다. 그런 그의 옆엔 학도병들이 불타는 눈빛으로 총을 잡고 있다. 예전 그의 친구같은 눈빛으로.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술을 통해 조금씩 변해가는 가네모리 마쓰오의 모습을 그려낸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초기의 그는 별다른 생각이 없다. 주어진 현실에 맞춰 살아갈 뿐. 그러나 몇몇 사건들을 겪으며 그는 서서히 변해간다. 특히 초반 별다른 적개감이 없었던 적에 대해, ‘멧돼지떼’라 부르며 타자화 함으로써 심리적 거리를 두고, 전우의 죽음이후 적개심을 드러내는 대목에서는, 이 시기 평범한 개인들이 어떻게 전쟁으로 인해 변해갔는지 보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고 씁쓸하다.
확고한 이상과 신념도, 굳은 확신도 없이 ‘거짓말을 늘어놓고 먼저 도망간’ 대통령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총을 들고 싸우는 그의 처지에서는 전쟁의 부도덕성과 정치성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무엇을 위해 총을 들었나? 그는 왜 이토록 멧돼지떼를 없애고 싶어 하는가?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지막에,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가 이 전쟁에서 살아난다 해도, 평생을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될 그런 선택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결말이 어느정도 예상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우리의 역사고, 실제로 벌어진 일이고, 사실이었기에.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이야기이기에.
끝으로, 끝끝내 나오지 않은 그들의 한국 이름이 궁금하다. 가네모리 마쓰오와 리무라 마사토, 인식표에 새겨진 그들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