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화, 마치 꽃 같은 이름을 가진 열다섯 소녀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허름한 흥신소를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롭게 받게 된 ‘범생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업자가 되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훈련 받은 스킬을 바탕으로 연화는 프로 살인청부업자가 된다. 아버지 역시 업계에서 이름에서 꽤나 날리는 살인청부업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화는 한 건의 의뢰를 받게 된다. 사진 세 장에는 한 남자만 찍혀 있었다. 피폐한 몰골에 썩은 동태 눈깔을 한 남자였다. 얼굴을 못 본지 햇수로 한 손이 넘어가고 있었던 남자를 보고 ‘살아 있었구나, 그새 많이 늙으셨네.’ 정도의 생각을 하며 연화는 그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떤 의뢰가 들어와도 보수와 실력만 맞으면 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등에 칼을 꽂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아직 현역이었고, 이제 노인이었지만 여전히 노련한 프로였다.
살인청부업자, 킬러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들을 꽤 읽어 왔지만, 이 작품은 ‘꽃의 결실’이라는 제목에서도 보여지듯이 각 장의 이름을 꽃이 피고 지는 과정으로 그리고 있어 흥미로웠다. 씨앗 줍기, 식물의 이름, 파종, 꽃의 이름, 개화, 결실, 낙화, 낙종에 이르는 과정이 26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한 명의 살인청부업자가 태어나서 자라고 만들어 지는 일생이기도 하고, 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옥죄고 있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일종의 복수극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점이 초반에는 아버지, 할머니가 바라보는 것으로 진행이 되다가 연화가 본격적으로 업자의 길을 걷게 되는 부분부터 연화의 시점으로 펼쳐 지는데, 너무 정직하게 시간 순으로 전개되는 것은 좀 심심하긴 했다. 게다가 분량 문제이겠지만, 연화가 겪어온 파란만장한 삶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아 후반부에 아버지와 대면하게 되는 장면의 임팩트도 약하게 느껴졌다. 연화의 삶이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그려졌다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간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것을 벗어나기 위한 이야기,라고 작가님의 후기를 읽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구속하던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덕적 가치나, 사회적인 도리, 그리고 인륜을 깨부수기도 한다. 후배가 선배를, 제자가 스승을, 자식이 부모를. 이러다가 천벌 받는 거 아니냐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도, 모두 자신의 몫이다. 그래서 결국 연화가 얻어낸 ‘결실’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일을 끝내고 새로 마련한 거처에서 오래 전 자신에게 장래희망에 대해 물었던 친구를 떠올린 것은, 그녀의 삶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한 해의 끝, 마지막 날이다. 극중 연화처럼 묵은 감정들은 다 털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내년 한 해가 되길, 이 글을 읽는 모두들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