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는 이연인 작가의 장편 연재 《별리낙원》 290회까지의 연재분 내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랑이란 멈추려 해봐도 바보같이 한 사람만 내내 떠올리게 되는 것”1
‘진짜’ 사랑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세월과 시간 안에서 대단히 명석하거나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그것을 정의하고자 애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그와 동일시하는 것(To love someone is to identify with them)”이라고 했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사랑은 그저 미친 짓(Love is merely madness)”이라고 말했다. 현재 우리 말을 가장 정확하게 풀이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은 사랑을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그 정의를 보는 한 개인의 사랑을 정확히 가리키지는 못한다. 사랑에 관한 모든 말은 전부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들지 않는 감정이며 그것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물어온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궁극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감정에 있어 보편성이란 적용될 수 없으며, 안타깝지만, 사람은 가장 일상적이고도 익숙한 ‘사랑’이라는 것조차도 우리의 언어로 정의 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로맨스의 궤도가 우연히 자신과 맞아떨어지거나 특정한 사랑의 격언이 마음을 울리는 경험을 하곤 한다. 사랑을 모두의 마음에 맞게 재단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사랑의 떨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언제나 생긴다. 그것이 문학이나 영화, 음악 등에서 발생하는 로맨스의 팬덤은 그들에게 고유한 사랑의 진동수와 꼭 맞는 울림을 찾은 이들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울려올 ‘진짜’ 사랑을 찾는 당신에게, 그리고 그런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당신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로맨스가 있다. 이 사랑의 울림은 묵직하다. 촘촘하고, 헌신적이다. 수신을 섬기는 나라 천한국, 화신을 섬기는 나라 사미르. 마치 서로 다른 두 행성에서 온 여자와 남자를 표현하던 어느 책의 제목처럼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지닌 곳에서 자란 두 사람이 정치와 사회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사랑을 완성해간다.
‘망나니’라고 불렸으나 실은 뛰어난 실력의 천한국 제2황녀 이진원과 사미르 반도의 아르투르에서 술탄의 다섯째 아들인 선우가 서로의 삶을 조금씩 나누어 가는 과정이 이연인 작가 특유의 촘촘하고 예스러우며 깔끔한 문체로 표현되는 장편 연재 《별리낙원》에서 독자는 현실과 이상, 가상과 실상을 넘나드는 로맨스의 여행을 하게 된다.
사랑이란 이별일지라도 그 끝은 낙원이리라는 가정을 정면에 내세우는 이 이야기는 제목마저 단정하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네 글자에 섣불리 말을 얹었다가는 어디 흠이라도 날까 조심하게 된다. 그러나 환상적이고도 애틋한 이 역사 로맨스에 아직 발을 딛지 않은 누군가를 위해, 천한국과 사미르 반도의 아르투르, 그 안에서 무엇 하나 양보하지 않는 치열한 정쟁의 순간 피어나는 단 하나의 사랑을 소개하기 위해서라면 곁가지 하나쯤은 당신에게 내밀어도 되리라 생각하며 몇 자 적어보기로 한다.
미리 말하건대 우리가 지금부터 느껴볼 사랑은 녹록지 않다. 한 나라의 황녀와 술탄의 아들이 만났다고 해서 무작정 해피엔딩일 리는 없다. 둘은 당쟁과 전쟁의 피바람, 반목과 모반의 줄다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작된 인연이었으며 이별이 사랑의 전제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칼로 자르듯 정해지지 않는다는 듯 언제부턴가 둘은 이별보다 먼저 낙원을 떠올린다. 서로의 마음에 기대어 풍파와 역경에 맞서는 이 각별한 관계에 속절없이 공감하고 응원하게 된다.
적국의 남자를 ‘가인’이라고 부르기까지, 천한국 제2황녀 진원의 파란하고도 만장한 여정을 따라가 보자. 천한국의 차기 황제를 탐하는 수많은 권력의 다툼 안에서 타국의 견제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나아가는 망나니 황녀는 그 화려한 별명대로 뜨거운 사랑을 완성할 수 있을까. 여성과 남성의 구획, 권세와 시선의 싸움, 이방과 낯섦의 영역을 넘어 분투하는 이토록 치열한 두 사람의 연애를 기꺼운 마음으로 좇아 보자.
1. 외강내유, 촘촘한 문장 속 한 줄기 애틋함
이연인 작가의 《별리낙원》을 하나의 모양으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 단단하고 조금은 두꺼운 보호막 안쪽으로 무엇보다 부드러운 질감의 물질이 가득 찬 이미지가 떠오른다. 누구도 뚫을 수 없는 견고한 방어막이 세상에서 가장 여린 무언가를 꽁꽁 싸는 모양. 꼼꼼히 직조된 문장 안에서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랑이 감지되기 때문이리라.
이연인 작가의 문장은 밀도가 굉장히 높지만, 갑자기 뭉치거나 흩어지는 일이 없다. 작가의 문장에 홀려 첫 장을 편 독자가 이야기를 따라감에 있어 실망이 없도록 한다. 마치 고르고 반듯하지만 한 사람이 온전히 주변 풍광을 담을 수 있는 1인용 포장도로가 독자를 안내하는 듯하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날 맹수의 공격을 받지도 않는다. 잘 정돈된 길을 걷다 보면 지루할 법도 하지만, 소설 속 끊임없이 바뀌는 인물의 감정과 그들을 둘러싼 정세가 일몰 무렵의 하늘처럼 독자의 눈에 다채로운 장면을 선사한다.
《별리낙원》은 방대한 세계관과 그 ‘배경’을 연결하는 세세한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 커다랗게 펼쳐진 ‘배경’이라는 이불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 이불은 한 세계의 표면을 넉넉히 덮을 크기다. 이불 위에서, 즉 세계의 표면에서는 수만 가지의 사건이 펼쳐진다.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정쟁하거나 화친을 맺는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태어나거나 죽는다. 전쟁과 평화, 화해와 반목이 온통 그 보드라운 이불 위에서 벌어진다. 그것을 우리는 ‘사건’이라고 한다. 《별리낙원》에서 하나의 사건과 다른 사건을 이어주는 연결점은 대체로 ‘인물’이다. 사건을 위해서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 《별리낙원》에는 가장 높은 권력을 지닌 황녀만 여덟이 등장한다. 8황녀 각각의 뒷서사에는 정치적 이해와 개인의 감정으로 얽힌 사람들의 복잡한 줄서기가 있다.
작가 이연인은 소설의 기본 요소인 배경-사건-인물을 거시적인 관점에서부터 미시적인 관점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직조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한 명의 인물까지 원근감을 조절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독자는 원하는 만큼의 줌인(zoom-in)과 줌아웃(zoom-out)만 하면 된다. 그러나 모든 편리함은 그것을 사용하기까지의 수많은 노고가 있다. 일상적으로 터치하는 스마트폰의 내부에 하나도 버림이 없는 부품이 저마다의 기능으로 가득 들어찬 것처럼. 우리는 매끈한 액정을 보지만, 그 안의 부품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을 기획하고 쓰기까지, 그리고 완성된 문장으로 풀어내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고가 들었을까. 독자에게 보이는 것이 물 흐르듯 부드러운 스토리텔링일지는 몰라도, 그 뒤에는 강줄기가 매끄럽게 흐르도록 도랑을 파고 다듬는 데에 여념이 없는 작가가 있다. 지상에 없는 하나의 나라, 그 안의 사람들과 체계, 규범과 도덕을 꼼꼼히 완성한 작가의 끈기가 놀랍다. 그저 독자가 글을 단순히 읽고 넘기기 부끄러울 정도로 길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작가가 고민한 이야기가 결국 로맨스라는 것도 낭만적이다. 사실 모든 로맨스는 낭만적이다. 몇 사람의 사랑, 그것을 위해 하나의 세상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별리낙원》으로 말하자면 그 분야의 봉우리에 서 있다. 단둘의 사랑을 위해서 천한국과 아르투르, 사미르 반도를 비롯한 완전한 판타지 세계관을 상당한 면밀함으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안에서 사랑을 위한 배경, 배경을 위한 사건, 사건을 위한 인물은 어떤 모양으로 짜여 있을까.
먼저 거시적으로 작품의 장르를 살펴보자. 이 소설은 판타지 역사 로맨스에 속한다. 작가는 지극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정쟁과 반목 속 로맨스를 환상적으로 만들기 위해 신령과 마법을 첨가한다. 서로의 생각과 이미지를 공유할 수 있는 팔찌 등 마력의 존재로 인해 등장하는 신기한 장면 중 소설 전반에 걸친 동시에 신이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은 단연 불과 물의 마법이다. 진원의 나라인 천한국에서는 수신을 섬긴다. 물로 거대한 빙산을 만들거나 비를 뿌리는 등 수신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물을 통한 마술을 부릴 수 있다. 마술대대를 이끌던 진원이 수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소매를 훌훌 걷어붙인 진원은 보통 사람들은 제대로 볼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인계를 맺더니 손끝으로 수면을 가리켰다. (…) 작은 파문 하나 없던 물이 별안간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세차게 뿜어져 오른 물줄기는 땅에서 1백여 리 가량 떨어진 상공에서 한데 모여들어 커다란 구체를 이루었다. 구체 표면에서 철썩이는 물결이 햇빛을 받아 사방팔방으로 반사광을 쏘았고 구경꾼들은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면서도 탄성을 질렀다.” -71회 중
그렇다면 선우는 어떤가. 선우는 화신 교단의 성직자로서 술탄의 5남이다. 그는 불을 일상적으로 다룬다. 수신을 섬기는 천한국의 사람들은 불을 쉽게 붙이고 없애는 선우의 행동을 신기하게 보거나 그로 인해 깜짝 놀라기도 한다.
단순히 ‘마법’으로만 등장했다면 화려한 효과로만 끝났을 능력들은 ‘신’과 결합하여 종교성을 획득한다. 종교는 저마다의 이념과 종파가 있고, 그 안에서 어기면 안 되는 규율이 있다. 종교는 때로 권력보다 앞서거나 권력을 뒤흔들기도 하므로 정쟁을 다룬 이 소설에 매우 적합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수력에 강한 진원과 화력에 강한 선우가 서로를 만났다면 둘은 그저 ‘이국민’이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국경 너머의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수신’과 ‘화신’의 교단이 개입한다면 둘은 서로를 ‘이교도’로 대하게 된다. ‘이교도’는 사회적인 파장을 몰고 온다. 진원과 선우의 결혼은 단순히 국제적인 이해관계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타종교의 신관, 타종교의 가호를 받는 이를 받아들이는 문제로 확대된다.
불과 물은 상극이다. 소설뿐 아니라 게임, 영화 등의 스토리텔링에서 불과 물의 이런 상극성은 다양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둘은 색과 온도의 면에서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또한 같은 조건에서 물은 대체로 불을 이긴다. 이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만나 초반의 충돌을 겪는 선우와 진원의 속성을 드러는 동시에 진원이 선우보다 조금 더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은유한다. 불과 물은 부족함과 더함이 없이 선우와 진원의 역할을 표현한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불과 물, 자연을 이용한 마법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내막에는 종교, 역사 사회적인 양국의 위치, 진원과 선우의 만남에 불어닥칠 파장까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극인 진원과 선우의 사랑을 통해, 그들에게 부는 피바람과 같은 역경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치 이유 없는 로맨스는 없다는 듯, 작가 이연인은 선우와 진원의 관계 속에 독자에게 건네고자 하는 한 줄기 애틋한 사랑을 숨겨 놓는다.
2. 지극한 이상, 또는 지극한 현실의
“3년 전 친왕이 마술대대 대대장으로 부임해 왔을 때만 해도 그가 제대로 복무를 마칠 수 있으리라고 여긴 장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군관학교에 입교했다가 동료 후보생들과의 추문에 휘말려 반년 만에 각교(却敎)당한 전적, 2황녀에게 손목 한 번 잡혀보지 않고는 제대로 된 사내라 할 수도 없다는 말이 돌 만큼 화려한 남자 편력. (…) 엄청난 자산과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 등 ‘망나니 황녀’를 둘러싼 소문은 대한의 수도 중경의 높은 성벽을 넘어 국경지대까지 널리 퍼진 상태였다.” -1회 중
소설 속 진원의 첫 번째 묘사는 이러하다.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불도저 같은 성격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재산으로 저 편한 대로 살아가는, 소설 속 표현 그대로 “망나니 황녀”가 따로 없다. “누군가와 밤낮으로 서로 얼크러져서 살아가야 하는 나날”을 “환란”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독단적인 면모도 있다. “대한의 수도 중경의 높은 성벽을 넘어 국경지대까지” 온 나라의 사람들이 진원의 소문은 파다하게 퍼진 상태다.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고사하고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인 제2 황녀. 진원의 초반 이미지는 이렇게 요약된다.
그러나 《별리낙원》 속 진원의 실제 모습은 능력 있고 자립심 강하며, 주변 사람들을 챙길 줄 알고 과감한 결단을 망설임 없이 내리는 인물이다. 서사가 심화하면 심화할수록 진원의 인물상은 변화한다. 그를 향한 주변 인과 독자의 판단 내지는 정의의 잣대도 조금씩 허물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허물어짐’을 가능케 하는 사람은 그와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 결혼한 선우다.
“셰이흐의 눈매는 붓으로 그린 듯 우아했고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의 둥글고 커다란 녹색 눈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반듯한 콧날과 턱선은 넘치지도 모자라지고 않았고 흠집 하나 없는 하얀 살결은 유백옥을 깎아 만든 듯 했다. 갓 피어난 장미꽃잎 같은 입술은 제아무리 철석같은 심장을 가진 이라도 입맞추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할 성 싶었다.” -14회 중
첫 등장부터 선우의 외형 묘사는 남다르다. 그의 행동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단정하다. 한어에 유창하고 예의와 범절을 차린다. 여성을 홀대한다는 뭇 사미르 남자들의 행동거지와 다르게 선우는 진원을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는다. 누구나 깜빡 넘어갈 정도의 화려한 미모로 선우는 진원에게만 마음을 쏟는다. 비록 진원에게는 둘의 결혼이 “누군가가 작심하고 만들어 낸 결과”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선우에게는 진심이었다.
이런 둘의 관계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고전적으로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되던 성역할이 전복된다는 점이다. 《별리낙원》의 전반에는 이런 성역할 도치의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다. 진원의 모국인 천한국은 군(君)과 왕(王)이라는 호칭을 남성에 국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당수 정치권력자가 여성이며 그들에게 기존의 전통적 역사 문학에서 남성의 것으로 알려진 군과 왕의 호칭이 거침없이 붙는다. ‘왕공’, ‘가군’, ‘가인’ 등의 호칭 또한 성별이 아닌 개인의 역할에 따라 부여됨으로써 성별과 관계없는 공평한 칭호를 사용하려 한 작가의 의도가 두드러진다.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차이는 호칭에서 발생하곤 했다. 이연인 작가는 이를 근본부터 비틀어 평등한 세상을 그리고자 했다. 선우는 ‘가인’, ‘안주인’ 등으로 가볍게 불릴 때도 집 안에서 황녀 진원을 보필한다는 역할을 받는다. “좋은 남편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 할 첫째가는 덕목이 다름아닌 순명”이라는 등 기존에 여성에게 요구되던 순종적인 태도가 천한국에서는 남성의 것이다.
여성으로서 진원이 태어난 나라, 천한국의 분위기가 이러하다면, 남성으로서 선우가 태어난 사미르는 어떠할까.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사미르는 남성이 여성보다 사회적 우위를 점유한다. 사미르의 부인절 풍습이 묘사된 대목을 살펴보자.
“부인절 열하루 동안 사미르에서는 나머지 389일 동안 결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진기한 광경이 펼쳐지곤 했다. 우선 기혼 여성들은 여성이 혼자서는 문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햇빛이 닿는 곳에서는 얼굴을 뺀 모든 몸 부분을 가려야 한다는 샤리아의 규정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반대로 남자들은 원칙적으로 집 담장 바깥으로는 발가락조차도 불쑥거릴 수 없었다. 만약 금기를 어겼다가 적발당하면 여성들로 구성된 자경단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남은 여인절 동안 광장 수가(首枷)에 계속 묶여 있어야 하는 수치스러운 주형(珠刑)을 받았다.” -113회 중
흥미롭게도 주원의 모국인 천한국에서는 여성이, 선우의 모국인 사미르에서는 남성이 인정 받는 분위기다. 하지만 사미르에서 천한국으로 옮겨온 선우는 자국의 관습을 내려놓고 온전히 진원에게 복종한다. 사미르 반도에서의 생활은 없었던 것인 양 천한국 남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결국 이 소설의 배경은 천한국이고, 그곳이 진원의 본국이며 작가가 궁극적으로 완성하고자 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미르는 이상적이고 비교적 완전한 천한국과 비교하기 위해 만든, 현실과 매우 흡사하지만, 불완전한 공간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 소설이 모든 여성의 역할을 남성의 것으로, 남성의 역할을 여성의 것으로 바꾸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여성이 전통적 남성의 역할을, 남성이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감당하는 세상만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은 사고의 오류다. 전복적인 시선은 일시적으로 세상을 신선하게 보는 감각을 길러주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모든 행동에 ‘성역할’을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때로 편협한 시선이 된다. 오히려 독자는 특수한 시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진짜 ‘사랑’에만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야 한다. 《별리낙원》에서 이연인 작가의 의도는 ‘소설’이라는 글쓰기의 가상성(假像性)을 십분 이용해 공평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은 무의미하다. 선우의 아름다움과 진원의 대범함이 성적 관념에서 벗어나 개인의 ‘특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이 소설에는 다양한 장치가 배치된다.
그렇다고 여성의 권리를 소홀히 대하거나 여성을 향한 문제에 작가가 무감하지는 않다. 《별리낙원》에서는 여성을 향한 폭력이 강조되기도 한다. 작품의 무대가 천한국임에도 선우의 본국인 아르투르가 속한 사미르 반도에서는 여성이 여전히 종교, 문화, 사회상의 이유로 억압받는다. 물론 천한국도 과거에는 사미르와 유사한 상황이었던 듯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한국에서는 여성의 권익이 주변 국가에 비해 빠른 속도로 신장된다. 진원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또는 직접 겪어봄으로써 사미르의 여성들이 얼마나 천한국과 다른 대접을 받는지를 마주한다.
“사미르 남자들은 초야에 부인이 선혈을 비치지 않으면 순결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대단히 불명예스럽게 여긴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칼리마와 샤리아의 가르침”, “사미르에서는 금반지 한 낱에 여성들이 이리저리 팔려 가는 일이 부지기수”, “사미르에서는 예로부터 음식을 만드는 일은 여성의 차무로 여겨져 왔고 (…) 술타나조차도 한 달에 한 차례는 반드시 손수 구운 봉포를 술탄께 바쳐야 한다”라는 등의 표현은 사미르의 여성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사미르는 매우 현실적인 공간이다. 위의 인용은 가공의 지역인 사미르뿐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구의 현실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선우는 그에게 어색한 대한의 문화와 법도, 풍습을 당연하다는 듯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가 태어난 지역과 그곳의 종교적, 사회적 풍습은 여인을 동족 미만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선우는 사미르의 남자로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진원을 진정한 황국의 차손으로, 완전한 권력자로 받들고 복종한다. 그의 행동에는 거짓됨과 위선, 한줄기 권세를 이용하려는 가식이 없다. 문화와 환경을 초월한 진정한 사랑과 헌신, 진원을 향한 사랑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랑은 ‘공평함’이라는 분위기를 만든다. 사랑은 공평할 때 분쟁이 없다. 독자도 이를 읽으며 진원과 선우의 사랑 안에 지금 발생하는 수많은 사랑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있음을 감지한다.
천한국이라는 이상적인 공간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가장 빠르게 현실로 적용되어야 하는 ‘평등함’의 문제였을 것이다. 선우와 진원의 사랑은 공평함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선우가 진원에게, 진원이 선우에게 요구한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머무름이었다. 단지 이연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해야 한다는 무언의 합의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지는 중이다. 이런 사랑은 어떤 방법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 아니,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질문해 보자.
이런 사랑도 완성될 수 있을까.
3. 아직 끝나지 않은, 그러나 이미 완성된
대단한 분량의 이 소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문장의 촘촘함을 타고 흐르는 사건 역시 빠르게 달리기보다는 천천히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이연인 작가의 이런 속도가 마음에 드는 독자들이 여전히 그 길에 함께한다. 제한 속도를 지켜 운전하는 모범 운전자처럼 성실하고도 묵묵히 글을 쓰는 이 글의 작가처럼 소설의 인물들 역시 성실히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정확히 이야기에 맞는 역할을 감당한다.
“차라리 선우를 영영 눈에 담지 않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그 모든 고통도 잊힐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선우의 상처 입은 심신이 진원을 절실히 수요(須要)하고 있었기에 섣불리 그를 멀리할 수도 없었다. (…) 적어도 선우가 그를 둘러싼 모든 공규로부터 안전해지기 전까지 진원은 그를 옆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다. 장서황후와 신서친왕이 진원의 심장에 꽂힌 칼이라면 선우는 핏줄을 타고 끊임없이 몸속을 휘도는 유리 조각이었다.” -145회 중
진원에게는 선우를 책임질 이유가 있다. 진원의 마음에는 언제나 선우를 향한 부채감이 있다. 선우 역시 천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기대기 위해서 진원이 필요하다. 둘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 진원에게는 물질적인 넉넉함과 행동에서 오는 거침없음이 있다. 선우에게는 심리적인 다정함과 포용이 있다. 그들은 서로가 앉을 마음의 공간을 만든다. 그러나 결핍으로서 서로에게 매이지 않고, 필요에 의해 상대를 속박하지 않는다.
이제 독자가 궁금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은 진원과 선우의 관계가 어떻게 지속될 것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내막을 끈질기게 좇아야 한다. 아직 답이 내려지지 않은 것 중 하나는 두 사람이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 진원이 잃은 기억이 무엇인지다. 전술하였듯 진원과 선우의 관계는 이 소설의 남은 진행에서 가장 핵심적이다. 그러나 그 핵심을 아직 독자는 완전히 볼 수 없다. 선우가 진원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진원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모두 있지 않다. 진원이 잃은 사미르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선우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에는 예측 불가능한 힘이 있다. 진원에게서 증발한, 분명히 의도적으로 감춰진 그 기억이 위태롭게 이어진 둘의 사랑을 뒤흔들어 놓을지, 또는 견고하게 연결할지는 미지수다. 잃어버린 진원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다면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 잃어버린 과거에 누군가 잘못했다면 그것은 선우일까 진원일까. 사미르 땅에서 기억을 잃기 전, 진원은 선우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둘째로 진원과 선우의 삶은 정치적으로 얽혀 있다. 천한국의 차기 황좌를 누가 이을 것인지는 둘의 관계에서 지울 수 없는 핵심이다. 그러므로 정쟁과 권력의 다툼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 이미 한 차례 반란을 진압한 천한국은 황녀의 죽음을 겪었다. 충분히 흔들린 이 정치의 장에서 종국에 승기를 잡을 사람은 누구일까. 근본적으로, 이연인 작가는 황제의 뒤를 잇는 것을 ‘승기’를 잡는 결말로 표현할까. 끝까지 권력의 욕심을 버리고자 하는 진원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어떻게 정리될까. 진원은 천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혹은 그럴 수 없다면, 선우와 진원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마지막으로, 천한국의 차기 황제가 등극하기까지 천한국의 주변 정세 변화도 놓칠 수 없다. 선우와 진원의 결혼으로 맺어진 평화가 끝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소설의 세계관이 넓을수록 독자는 마치 국제 정세를 가늠하듯 거시적인 관점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다. 단순한 즐거움을 위해 읽는 이야기를 넘어서, 한 시대의 사회상과 정치, 경제의 판도를 읽을 수 있는 소설은 독자들의 기대 지평을 넓힌다. 유희로서의 소설도 충분히 가치 있지만,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이 다양해진다면 독자는 그만큼 이야기 안에 더 오래 머물게 된다.
《별리낙원》은 독자들에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라는 믿음을 주는 글이다. 곁에 두고 오래오래 함께하고픈 친구처럼, 알면 알수록 진한 향을 즐기게 되는 따듯한 차茶처럼,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잠시 머물러 돌아온 길을 되짚게 되는 소설이다. 처음 읽을 때 흥미로우며 두 번 읽을 때 깨달음이 있고 세 번 본다면 이전에 보지 못한 보물을 찾는 기분이다. 단정하고 예스러운 문장에서 오는 분위기에 흠뻑 젖어 천한국을 거닐어보는 것도 좋다. 결말을 향해 잘 짜인 길을 걸어가면 갈수록 질문과 답을 적시에 던지고 회수하는 작가의 능력을 신뢰하게 된다. 어떤 운명이 진원과 선우의 앞날을 흔들어 놓을지라도 결국 둘은 서로의 낙원에 머물며 때로 눈물겹지만 사랑을 이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우리는 이별이 완성하는 사랑을 따라 전진한다. 내가 당신의 전부이며 당신이 나의 낙원이 되는 어느 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의 우리가 다소의 불행을 만나더라도 기쁘게 견디리라. 그곳에서는 불이 물을 소멸하지 않고 불이 물을 태우지 않는다. 설령 나의 애인이 이교도일지라도 그 자신의 권능으로 상대를 온전히 치유하고 포용한다. 어떤 것도 불화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미흡함을 온전히 보듬는 사람. 그리하여 어떤 정치도 분쟁도, 하물며 살을 깎는 고통도 함께 통과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세상은 어떻게 보아도 아름답지 않을까.
너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느냐는 노랫말을 곱씹게 된다. 여기 한 사람을 세상보다 아낀 나머지 자신의 모두를 바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운명적으로 닥쳐올 이별마저 사랑했다. 나아가는 과정에서 무엇을 잃든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로맨스의 믿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므로 이별까지 사랑할 수는 없는 사랑은 ‘이별마저’ 사랑하게 되는 완성의 순간을 통과한다. 아마도 그 관문의 끝은 낙원이리라 확신하면서.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 이 세계 안에 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