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죽은 정승이 산 개만도 못하다’와 같은 속담이나 불로불사, 영생과 같은 단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돈이 많든 적든, 권력을 갖고 있든 아니든 간에 불로불사는 고대로부터 사람들의 선망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에는 다들 관심을 갖지 않는 듯하다. 영생도 중요하지만 내가 죽지 않고 살아갈 때 그 삶은 어떤 모습일지 한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병범 씨의 목표도 마찬가지였다. 죽지 않고 영생을 사는 것. 뒤늦게 후회하지 않기 위해 병범 씨는 철들 무렵부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진한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투자하고 불리기를 반복한 결과, 병범 씨는 65세를 전후로 하여 CWT시술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만세! 드디어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우울한 전철을 밟지 않게 된 것이다. 딱히 특출난 것도 없던 병범 씨가 인생 계획을 달성할 때까지 기울인 노력에 박수를.
CWT시술을 위한 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한 병범 씨는 그제서야 한 가지 의문을 가진다. 시술을 받고 난 이후의 삶은 어떨까? 결혼도, 연애도, 친구도, 취미도 포기하며 자신의 인생을 CWT시술 비용을 마련하는 데 쏟아부은 병범 씨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기로 결심한다. 오로지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뭐라 형용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년 단위로야 절치부심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내 모든 인생을 바쳐 단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본 적은 없으니까. 목표 달성을 위해 기울인 병범 씨의 노력과 인내심, 끈기를 생각하면 대단한 집념을 가졌구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 멋있다와 같은 생각이 들다가도 병범 씨가 평범한 일상의 기쁨, 소소한 행복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걸 상기하면 귀중한 걸 많이 놓치고 살아왔구나 싶기도 하다. 역시 살면서 모든 것을 다 움켜쥘 수는 없는 법인가.
시술을 받기까지 대략 15년 정도의 여유 기간이 생긴 병범 씨는 시술을 받은 사람들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막연히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절망과 우울에 빠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병범 씨는 그들이 보여주는 다른 모습에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고 회의감을 느낀다. 죽음을 앞두고도 어떻게 여유로울 수 있지? CWT시술을 받지 않는데도 저렇게 긍정적이고 밝게 살아갈 수 있는 건가? 시술 없이도 힘차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다면 여태껏 내가 살아왔던 인생은 도대체 뭐가 되지? 사실 난 잘못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사실 병범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던 할아버지, 속세를 떠나 생사를 초월하겠다며 사라진 아버지, 성공적으로 영생을 살 수 있게 된 이후 우주정거장에서 사업하며 사는 할머니, 그 외에도 영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수많은 시골 노인들을 보며 자랐으니 당연히 병범 씨가 최우선적으로 가치를 두는 것도 영생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보고 들은 게 그것밖에 없었는 걸.
유한한 삶을 사는 노인들이 승리자라고 말했던 한 노인은 병범 씨가 CWT시술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었다. 웃돈까지 얹어주고 보험도 무상으로 양도해줄 테니 자신에게 시술권을 양보해달라던 노인을 보자 병범 씨는 다시금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한다. 여유로운 척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공포감에 휩싸여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노인의 속마음을 엿본 탓이다.
그러나 CWT시술을 받겠다는 병범 씨의 계획은 노인과 헤어지는 길에 만난 흰 고양이로 인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시술 전까지의 삶을 고양이와 함께 하며 병범 씨를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고양이로 인해 인생 계획을 몇 번이고 수정해가며 위기를 넘겼고, 고양이가 낳은 새끼들을 입양보내기 위해 오랜만에 지키지 않을 약속들을 뒤져가며 입양처를 찾기도 했다. 그렇게 십 수년의 세월을 고양이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병범 씨는 행복함을 느낀다. 계속 곁에 존재하면 모르지만, 없다가 생기면 누구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것이 실체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간에. 병범 씨에겐 흰 고양이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타인의 온기, 함께 산다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과 안정감을 준 존재. 간혹 삶을 빡빡하게 만들고 계획을 어그러뜨릴 뻔하기도 해 원망을 할 때도 있었지만, 병범 씨는 태연하게 손세수를 하는 고양이를 내쫓지 않았다.
마침내 고양이의 수명이 다했을 때, 병범 씨는 사랑하는 것을 잃은 사람답게 슬픔을 느낀다. 자신과 피를 나눈 혈육이 죽었을 때도 느끼지 않았던 감정을. 그걸 보면 병범 씨에게 있어 진정한 가족은 고양이가 아니었을까. 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같이 생활하며 기쁨과 슬픔, 어려움을 함께 했고, 마지막까지도 함께 했으니 가족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평화롭게 숨을 거둔 고양이를 보고, 슬퍼하는 동시에 죽음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가족에 얽힌 비화를 알게 되면서 병범 씨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살려내어 영생을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보내줄 것인지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맞이한 고양이의 마지막 모습과 그런 고양이를 보며 죽음을 선물이라며 부러워하던 병범 씨는 자신의 시술권을 공원의 한 노인에게 넘기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번드르르하게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포장했던 노인의 말보다는 평온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고양이를 보며 병범 씨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병범 씨가 죽음을 선물이라고 바라보기까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던 것일까.
하지만 고양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죽음마저 운명의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양이가 14년의 삶을 산 대가로 받은 그 선물을 앗아가도 되는 걸까? 자신이 죽음을 선물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어느 새 해가 강줄기 끝 언덕에 걸려 하늘이 붉어졌을 때였다. 그제야 병범 씨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내다봤다.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 그리고 CWT시술을 받고 나면 죽지 못해 살아갈 것이다.
이 대목에서나마 약간은 병범 씨의 심정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영생이나 불로불사, 장수는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살고 싶어서, 죽지 않기 위해 영생을 바란다면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살아 숨쉰다는 점만 빼면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인데. 세상의 모든 것에는 강약이 존재한다. 예술같은 인위적인 것에는 물론이고 자연에도 존재한다. 가령 장대비가 쏟아지다가도 이슬비로 바뀐다거나, 힘차게 흐르던 강이 산을 넘어가며 작은 시냇물로 바뀐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마냥 강강강, 혹은 약약약으로 유지되는 것을 보았는가? 사람의 생도 마찬가지다. 태어나 유소년기를 거쳐 청년기로 가는 것은 크레센도, 중장년기를 거쳐 노년기로 가는 것은 디크레센도이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쉼표이자 마침표다. 삶을 계속 모데라토로 살 수는 없다. 강약이 없는 삶이 계속되는 것만큼 괴상한 게 어디 있을까. 병범 씨는 자신의 고양이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았던 것처럼 보인다.
다시 돌아오지 않은 병범 씨는 어디로 갔을까. 자기의 고양이를 만나러 갔을까? 멋진 마침표를 찍고 자신의 고양이를 만나러 간 것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