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할 때, 진행 속도가 더뎌 골치를 썩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시간이 정말 가지 않는다. 일의 진척도 느리고 시간도 가지 않을 때는 정말이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짜증과 함께 자괴감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빨리 해치우고 여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라거나 이런 것도 금방 처리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능에 대한 자책이라거나. 별다른 고민없이 일에 집중하거나 선택을 끝내고 싶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땐 가끔씩은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네스티자’는 최선의, 최상의 선택이 될 수 있다. 별도의 복잡하고 귀찮은 절차 필요없이 그저 머리에 중절모를 쓰기만 하면 바로 원하는 것에 집중하여 쉽게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데 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준서도 그 중의 하나다. 회사에서 발표를 앞두고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그는 결국 ‘아네스티자’를 사용해 최고의 효율로 일을 끝낸다. 그는 처음엔 모자의 성능에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게임에서도 효과를 보자 점점 아네스티자를 사용하는 빈도를 늘린다. 사용할 때마다 입 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감도는 건 무시한 채로. 선택과 집중에 어려움을 겪던 많은 사람들은 준서와 같은 전철을 밟았다. 그저 중절모만 쓰면 모든 선택을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 물리적인 행동은 내가 하지만 그 행동 명령을 내리는 주체는 내가 아니다. 그것을 내가 선택해 행위한다고 정의할 수 있을까? 결말의
그저 검은색 중절모만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눈 부신 해가 뜬
살아있는
죽은 자들의
밤이었다.
라는 대목이 모든 걸 압축해서 말해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유지에 필요한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그 외의 모든 활동은 모자에게 맡겨버린다면 나는 과연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심지어 생명유지에 필요한 활동도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선택을 하는 것이 어려워 모자를 쓰고 모자가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모자의 행위이지 ‘나’의 행위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아네스티자가 뇌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므로 마약류로 분류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와 같은 주장은 미래를 내다본 예언이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작고 사소한 선택이 쌓여 ‘나’를 만들어가는 것인데 중절모가 선택을 대신 한다면 그것은 중절모를 구성할 뿐이지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될 수 없으니까.
선택과 집중이 어렵다고 해서 다른 ‘것’에게 그것을 맡기는 것이 과연 편리하고 좋기만 한 일일지 다시 한번 되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