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출신인 ‘나’는 어디론가 떠나는 우주선 안에서 어느 소녀를 만난다. 이미 멸망한 지 몇십 년이 지난 지구에서 왔다는 소녀는 다짜고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나’는 소녀에게 알 수 없는 불안한 위화감을 느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이는, 그러나 어쩐지 이미 ‘나’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나’와 정체불명 소녀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짧고 간결한 이야기 구조 안에 수려한 문장과 꽤 묵직한 여운을 머금고 있다. 주요 소재나 결말부의 반전은 그리 새롭지 않을진 모르지만, 시작부터 차곡차곡 쌓인 체념 혹은 그리움과 비슷한 감정선을 끝까지 가져가는 데에 탁월함을 보인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을 잊기 위해 일종의 장치를 통해 죽은 그 사람과 꿈속에서 살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 꿈의 결말은 현실처럼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항상. 소녀의 말에 따르면 322번이나 계속. 이 설정은 일견 이상해 보인다. 현실도피를 위한 꿈에서 마저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건, 너무 가혹하다. 이와 더불어, 소녀라는 안전장치의 존재 이유에도 의문이 든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만든 꿈이라면, 그 꿈을 끝내는 안전장치를 만들 이유가 있을까.
과잉해석의 위험을 무릎 쓰고 여기에 개인적인 생각을 적자면 이렇다.
연구에 몰두한 ‘나’는 사랑하는 준이 홀로 죽어가는 동안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다. 죄책감. 이 글의 서두에 체념 혹은 그리움과 비슷한 감정선이라고 설명했던 것의 정체는 결국 죄책감이다. ‘나’가 꾸는 꿈의 결말은 항상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며 이 죽음은 언제나 ‘나’가 가져온 것이다. 나로 인한 그의 죽음. ‘나’가 꾸는 모든 꿈은 이 한 마디로 정의된다.
이렇게 보면, 결국 ‘나’가 만든 현실도피 장치는 ‘나’가 의도했든 아니든, 준을 홀로 죽게 한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영원히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체벌의 기능을 한다. 영원한 형벌 무간지옥처럼. 이 꿈이 악몽이 되기 위해선 비극으로 끝나야 하고, 무엇보다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인셉션>의 팽이처럼) 꿈을 끝내기 위한 안전장치인 정체불명의 소녀가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는 설정으로 보자면 결국, 이 여정의 목적지가 ‘나’의 내면에 있으며, ‘나’와 소녀의 대화는 ‘나’와 ‘나’의 대화였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박사님, 준은 이곳에 없어요. 이곳에 있는 것은 무한한 꿈을 꾸는 박사님과 꿈을 끝내고 시작하는 역할을 하는 저뿐이죠.”
이 작품은 결국 ‘나’의 혼잣말로 이뤄진 거대한 독백이며 자신을 영원한 비극 속으로 내몬, 자신을 영원히 용서하지 못하는 이의 거대한 악몽이다.
소녀는 마지막에 ‘나’에게 선택의 시간을 준다. 이대로 여정을 멈출 것인가, 아니면 계속할 것인가. 이야기는 ‘나’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의 선택을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