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좀비가 아니여, 이것은 사랑이여 공모(감상) 공모채택

대상작품: 돌연변이의 댄스 (작가: 이해선, 작품정보)
리뷰어: 휴락, 22년 7월, 조회 26

전통적으로 좀비물이란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래 뚜렷한 특징을 갖고 있다. 생존과 군상의 갈등, 폭력성, 풍자와 사회비판의 필수요소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까칠하고 우울한 것들을 찾으면 안 된다. 그럼 무엇을 찾는가? 뭘 찾기는! 사랑과 유머다.

좀비에 물렸지만 좀비가 되지 않는 별종 ‘다중’. 그는 왼쪽 가슴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느낄 수 없게 된다. 그의 여자친구 ‘소희’는 좀비에게 물렸지만 빠른 조치 덕에 회생의 기회를 얻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냉동장치에 들어간 상태에서 온 몸의 피를 교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중요한 작업을 수행할 동료들이 오질 않는다. 다중은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에서 까칠하고 우울한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 디데이, 그랜드마, 네버, 예스 등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영어(를 한글로 소리 그대로 옮긴) 단어 하며, 한여름 열병에 시달리는 듯 미쳐 날뛰는 작가의 말재간(일명 ‘재랄 댄스’), 우리의 별종 주인공의 사랑을 향한 고군분투와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다중’은 제 나름의 심각하고 슬픈 상황을 직면했지만 독자로 하여금 좀처럼 덮어놓고 심각해지고 슬퍼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하, 그렇다면 이 소설은 블랙 코미디인가? 아니면 몬티 파이선 같은 부조리한 코미디가 아닐까? 노우! 절대 노우! 거듭 강조하지만 까칠하고 우울한 것을 찾지 말지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좀비에 물려 반푼이가 되고, 좀비에게 둘러싸이고, 연인을 잃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독자는 ‘다중’의 슬픔에 빠져들 수 없다. 찰리 채플린은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슬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다중’에게 가까이 닿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그야 당연하다. 작가는 슬프기 위해 이 소설을 쓰지 않았고, 우리는 슬프기 위해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 사랑하고, 유머를 느끼기 위한 것이다.

사랑이 발작하면 하늘도 말리지 못한다.

태초부터 그랬다.

‘다중’의 유머는 우리를 슬프지 않게 해줬고 ‘다중’의 사랑은 그의 왼쪽 가슴이 다시 연인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앞뒤 모르는 스무 살 청춘이 있을 뿐이다.

지글지글 구워지거나 습기에 눅눅해지는 요즈음, 깔끔하게 읽기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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