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앎의 비극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시간의 끝 (작가: 이태호, 작품정보)
리뷰어: NahrDijla, 22년 7월, 조회 51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유명한 호러의 정의 중 하나인 러브크래프트의 말입니다. 미지라는 것은 앎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단순하게 미지라는 단어는 앎의 부재 혹은 앎의 유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호러’에 있어서 미지는, 반드시 밝혀지게 되는, 그리고 파국에 이르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앎은 기이함과 으스스함이 존재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미혹이 함께합니다. 혹은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있기에 기이할 수 있고 으스스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양가적인 거부의 미학 속에서 호러는 주이상스와 비슷한 무언가로서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앎이 파국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이해 범주를 넘어섰을 때가 그러합니다. 이런 인간의 범주를 정해주는 것은 주로 과학이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세계의 규칙을 설명하는 과학은 어떤 면에서 진리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과학이 찾아낸 진리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역설은 인간 자체의 유한성을 표상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과학이란 도구로 세계를 설명한다면,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하는 걸까요. 과학은 그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빈칸으로 두고 탐구를 시작하지만, 그 빈칸이 과학으로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이런 과학에 대한 러브크래프트의 조소 혹은 비판은 크툴루의 부름의 첫 문단에서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다행한 일이 있다면, 인간이 스스로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인지 모른다. 끝없는 암흑의 바다 한복판, 우리는 그중에서도 무지라는 평온한 외딴섬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만 우리가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멀리 항해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학이라는 전문 영역은 지금까지 온갖 왜곡과 남용을 일삼아왔으나 아직까지 인류에게 오싹한 위험을 알린 적이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제각각이었던 지식이 통합될 것이고, 그때라면 끔찍한 전망과 더불어 소름 끼치는 현실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아마 우리는 그 현실에 미쳐버리거나, 진실을 외면한 채 또 다른 암흑 속에서 평화와 안정을 구할지 모른다.” – 크툴루의 부름 中

이런 면에서 이태호 작가님의 소설 「시간의 끝」의 주인공이 과학자임은 이런 맥락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유리 박사의 유년, 잠 못 들던 시절, 무서운 것이 많았던 시절, 그것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묘사는 ‘기이함’을 만나지 않은 자의 짧은 치기처럼 묘사됩니다. 그리고 끝내 외계의 지식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은 무너지며 앎은 곧 광기로 치환되어 유리 박사를 사로잡습니다. 여기서 이 광기로 표상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박제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박제가 아닌 원자 단위로 쪼개서 재조립하여 생명만을 소거한 채 형태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그 끔찍하면서도 초월적인 순간들을 유리 박사는 외계의 시간을 공유 받으면서 완벽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에 대한 서술은 ‘과학은 공포를 없앨 수 없다.’라는 명징한 결론입니다.

지식은 곧 시간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시간을 겪는 것이 곧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직 – 간접적으로 체험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작 중에서 그 체험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는 명료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상당히 초월적으로 보이는 것, 즉 인간의 이지를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 이런 체험의 방식은 기이한 체험이 인간의 시점으로 조직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초월적인 체험을 한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작 중 묘사된 유리 박사의 말로는 광기 어린 자기 구원으로 치달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효과들이 발현됨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사태를 일으킨 빛의 존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알 수 없음이야말로 소설의 외우주 신화적 공포의 핵심 축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있든 없든) 우리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소설 내 ‘이해’해버린 누군가가 맞이한 파국으로 말미암아 이 앎의 공포는 중개되며 확산 합니다.

그렇다면 최후에 유리 박사가 마주친 최후란 무엇일까요. 작 중, 작금의 세태를 반영한 듯 환경 위기의 무언가가 그 핵심인 듯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확실하진 않습니다. 작가는 충실하게 앎의 공포를 중개하고 알리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이야기하진 않으니까요. 그러나 환경 위기에 부화뇌동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과연 유리 박사가 목도한 진실은 무엇이며, 무엇이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을 진리인 걸까요. 기이함으로 경이를 일으키는 소설 이태호 작가님의 소설 「시간의 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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