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학문보다는 기술을, 허울 좋은 지위보다는 더 나은 생산을 추구하던 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지금까지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대중이 이미 알고 있듯이 그를 ‘실학’이라는 것으로만 소개하기는 어렵다. 박지원은 철학과 사상, 과학과 문학 등에 두루 박식했던 문필가이기도 하다. 수필로는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생일을 맞아 사절로 파견되어 두루 그곳을 돌아보고 귀국해 저술한 『열하일기』와 코끼리를 보고 그 감상을 적은 짧은 글 「상기」가 대표적이다. 소설로는 양반 직분의 허상과 매관매직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양반전」과 사회 구조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친 「허생전」, 노동자인 엄 행수를 ‘예덕선생’이라 높이며 그의 노동력을 찬양한 「예덕선생전」, 호랑이의 입을 빌려 인간의 잘잘못을 낱낱이 가리는 「호질」 등이 있다. 박지원은 농서인 「과농소초」를 쓰기도 했다. 그는 문집인 『연암집』 제2권에 「백자 증정부인박씨묘지명」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맏누이를 추모하는 글도 실었으니 과연 장르와 주제를 가리지 않은 진정한 문인이었다고 평할 만하다.
그중 소설 「호질」은 단연코 지금까지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호랑이가 (인간을) 질책한다’라는 의미의 이 소설에는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있다. 『열하일기』에 따르면 ‘호질’이 박지원의 순수 창작물이 아닌 심유붕이라는 사람의 점포 격상에 적힌 글을 정 진사와 함께 베껴온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혹자는 이것이 박지원의 저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실제로 문학사적인 의미에서 「호질」의 원저자를 밝히는 연구가 다수 있었다. 그러나 ‘기’라는 장르의 특성상 「호질」의 기원에 대한 박지원의 진술조차 완전한 사실인지 알 수 없으며, 박지원 저작에서 드러나는 특징이 소설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근거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호질」의 원저자가 박지원이라고 주장한다.
「호질」’은 동물이 인간을 꾸짖는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는다. 호랑이의 몸에 붙은 귀신들이 인간 중 선비를 잡아먹을 것을 호랑이에게 권하지만 ‘북곽선생’이라 불리는 그 선비는 본래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아첨하기 좋아하는 자니 범이 그를 먹지 못하고 오히려 훈계한다. 북곽선생인 홀로 사는 ‘동리자’라는 여성을 사랑하고 수절 과부로 소문난 동리자에게는 성씨가 다른 아들이 다섯 있었다는 점이 당대의 시선으로 인간을 비판하는 대목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박지원은 이를 통해 「양반전」, 「예덕선생전」과 마찬가지로 양반의 허례허식과 학문을 실용으로 이끌지 못하는 학자들을 비판한다.
「호질」은 인간을 신랄하게 평가하는 소설임에도 환상성이 두드러진다. 호랑이가 말을 한다는 것, 호랑이의 몸에 붙은 귀신이 호랑이에게 말을 건다는 것, 소설의 초반에 ‘비위’, ‘범우’, 박’, ‘오색 사자’, ‘자백’, ‘표견’, ‘황요’, ‘활’, ‘추이’ 등 호랑이를 잡아먹는 가상의 동물이 등장한다는 것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다. 박지원이 「양반전」과 「허생전」에서 현실 속 장면을 생생한 문학으로 남겼다면, 「호질」은 작가로서 그의 상상력을 양껏 펼친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원저자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이 소설은 작품성의 면에서 뛰어남을 먼저 인정받았다. 호랑이가 인간을 꾸짖는다는 환상성과 ‘북곽선생’, ‘동리자’ 등 상징적인 인물상을 통해 완전한 허구로만 보이는 이 소설이 상상이 아닌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였다면 어떨까. 호질의 원작을 소장하고 있던 심유붕은 그 이야기를 어디선가 전해들었고, 박지원이 이를 소설로 각색했다면, 그리고 「호질」’이 사실 박지원의 잃어버린 아들과 깊이 연관된 소설이었다면. 「호질」 속 ‘귀신 붙은 호랑이’가 실존했다면. 그리고 박지원에게 귀신을 보는 아들이 있었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위의 가정은 박지원의 어떤 저작과 역사서에도 없는 완전한 거짓이다. 그러나, 흥미롭지 않은가. 테라리움 작가의 장편 연재작 《호귀》는 이런 가정에서 출발했다. ‘귀신 붙은 호랑이’가 아닌 ‘귀신이 된 호랑이’. 산천을 호령하는 호랑이 ‘산군’에 대해 어느 날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그 산군에게는 아귀가 들었다
박지원에게는 숨겨진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탄생이 비범했으며 귀신을 감지할 줄 알았다. 아기가 태어나고부터 집안 여기저기서 기묘한 소리가 들리니 사람들은 짐승인가 싶어 사냥꾼을 불렀다. 집을 살피던 사냥꾼은 “집 안의 흔적들이 (아기) 도련님이 계신 방을 바라보는 형국”이란다. 결국 지원의 조부는 아기를 죽대 어멈의 손에 들려 집에서 내쫓는다. “집안에서 무당이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 아기를 내보낸 유일한 이유였다.
《호귀》는 과거 실존 인물인 박지원의 가상의 아들 박출을 주인공으로 한다. 집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귀신 보는 아이. 아니 귀신을 몰고 다니는 아이는 뒤꿈치에 기이한 흉터를 가지고 태어났다. 전술하였듯 박지원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문장가이며 그의 소설 「호질」은 중고등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미 ‘박지원’이라는 사상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형성된 독자가 다수 확보되어 있기에 그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아들이 귀신을 본다는 소설 속 가정은 자연스레 그들의 흥미를 끌 수 있다. 그렇게 뛰어난 사상가에게도 가슴 절절한 가정사가 있었다. 정사 속 야사를 읽는 기분으로 독자들은 순식간에 이야기에 몰입한다. 조금만 검색해 보면 박지원에게 그런 아들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와 별개로 실존 인물을 등장시킨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사실성에서 오는 흥미를 크게 확보한다.
실제 기록의 다수에서 박지원은 엄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정상균은 박지원의 「호질」을 분석하며 그의 소설 속 ‘호랑이 공포증(tiger phobia)’는 엄한 가풍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다음은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의 인용이다.
“집안이 본디 청빈한 데다 章簡公(박지원의 조부)이 깨끗하고 검약해서 가사에 마음을 쓰지 않았고 집안의 법도가 엄하여 王考(박지원의 아버지) 兄弟는 하루 종일 한 집안에서 모시고 서 있었으니 先君(박지원)兄弟는 책 펴놓고 공부할 곳이 없었다.”2
박지원 형제가 마음 놓고 공부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했다는 가풍은 ‘청빈’하고 ‘검약’한 것을 넘어 갑갑해 보인다. 때문에 박지원의 조부는 그의 집안에서 무당이 나오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 속 지원의 조부는 기록으로 전해지는 현실의 그와 닮아 있다. 귀신을 다루는 직업이니 학문을 중히 여기는 양반 집안에서 가당치 않다고 여겼으리라. 작가는 박지원의 조부가 성정이 강하고 마음먹은 바는 반드시 해내야 하는, 그러나 사람의 마음보다는 가문의 존속을 중요시 여기는 인물이라는 기록을 소설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박출은 그렇게 가문과 권세에 밀려, 이름마저 집에서 쫓겨난 과거를 품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죽대어멈은 그런 박출을 자기 아들처럼 대한다. 오히려 아들 죽대가 박출을 섬기도록 한다. 죽대는 박출이 큰 집안에서 났다는 사실을 알고 군말없이 그를 보좌한다. 신과 영으로는, 그리고 당대의 신분으로는 박출이 죽대보다 낫다고는 하나, 죽대에게도 남다른 괄괄함과 대범함이 있다. 조력자로서 박수무당인 출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죽대는 집을 잃은 그에게 또 하나의 가족으로 기능한다. 아버지가 양반가의 권세에 초연했던 것처럼, 오히려 그들을 비판하는 데에 거침이 없던 것처럼 박출도 말하는 데에 막힘이 없고 시원한 성격으로 자란다. 그러나 그가 태어났을 때의 불길함은 언제나 발뒤꿈치의 흉터로 남아있다.
박출과 죽대는 산신령 호랑이 대신 동자승을 모시려는 산촌으로 향한다. 그곳의 착호군 우두머리가 죽은 것을 알았는지 호랑이들이 마을에 내려와 동물들을 물어간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신령이 아닌 동자승을 모시고자 한다. 그리고 신을 바꾸는 의식에 박수무당인 출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을로 가던 중 산에 들어가지 말라는 한 여인의 경고를 받는다. 탐욕스러운 ‘천기후’라는 착호군을 만나기도 한다. 이는 박출의 여정이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을 것임을, 더 나아가 그의 여정에 장애물이 많을 것임을 암시한다. 산으로 향하는 도중, 박출은 아귀를 만난다. 그 아귀를 쫓는 과정에서 그의 발뒤꿈치의 상처가 심상치 않게 달아오른다. 하나의 에피소드로만 다루어지는 듯한 서두의 모든 이미지는 소설의 중반부터 하나의 서사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그 발단은 ‘산영’이라는 여자의 등장이다. 호랑이에 물려 죽었다는 착호군 우두머리의 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산영은 산군이 아귀에 사로잡힌 듯하다고 박출에게 이른다. 테라리움 작가는 호랑이가 인간을 먹는 이유로 ‘아귀’를 가져온다. 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일컬어지는 아귀는 본래 불교의 여덟 귀신 중 하나로 늘 굶주려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탐심이 과하거나 성질이 사나운 사람을 일컬어 ‘아귀’라고 하는 관용표현을 볼 때 우리는 아귀가 ‘욕심’의 은유라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호랑이는 욕심에 사로잡혔는가.
그의 몸을 관장하게 된 아귀는 산 아래 인간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산영은 그런 아귀로부터 본래 순수한 성정으로 산을 호령하던 산군을 구해달라고 박출에게 간청한다. 그렇게 그의 ‘진짜 여정’이 시작되고, 산영과 박출, 그리고 탐욕에 가득 찬 천기후가 산군을 찾으러 떠난다.
환상, 그러나
산군을 찾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는 박출의 여정에서 작가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서사를 피하고자 환상의 동물들을 등장시킨다. 미향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화할 수 있는 천년호와 그녀를 따르는 다람쥐들, 박과 청룡, 산군의 아래 있는 대호를 비롯한 산의 존재들. 그들은 본래 산에서 살았으며 신령 중 하나인 산군이 아귀에게 먹혔다는 것과 그로 인해 산의 본질이 변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인간보다 훨씬 멀리, 빠르게, 하지만 섬세하게 모든 것을 파악하는 그들에게 산의 변화는 그야말로 뚜렷했다. 인간의 시공간 너머로 움직이는 그들이 산군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것, 그러나 결국 산과 세상의 안전을 위해 그를 죽여야만 하는 결론에 마주하는 것을 독자는 홀린 듯이 보게 된다. 환상의 동물들은 인간을 통해, 인간을 도우며 산군과 산을 구할 방법을 찾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동물 중 대부분이 박지원의 ‘호질’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테라리움 작가는 단순히 ‘귀신 들린 호랑이’ 모티프를 차용한 것 이상으로 「호질」을 조화롭게 재창작한다. 호랑이를 잡아먹는다는 존재들에게는 산군 이상의 지위를 부여하고, 호랑이의 몸에 기생한다는 귀신은 아귀로 형상화한다. 이미 호질의 초반에 나열되는 수많은 동물들을 알고 있다면, 이 동물이 이러하다는 정보를 미리 숙지한 채 좀 더 풍성한 맥락으로 중반부를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환상적인 동물이라고 해서, 인간에게서 비롯된 아귀를 쫓는 게 마냥 편하지는 않다. 초월적인 존재의 앞길을 막겠다고 감히 마음먹을 정도로 대범한 인간들도 세상에는 있기 때문이다. 병폐에 물든 산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 그곳에서 한몫 거하게 챙겨보려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한다. 초반에는 호랑이를 잡아 재물을 모으는 천기후가 그 중심이었으며, 후반에는 벼락 맞은 나무에 현혹된 현령과 그의 수하들이 욕망의 대를 잇는다. 산군을 구하고 (또는 대의를 위해 산군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려는 박출의 무리에게 감히 맞서는 그들은 잔혹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인간 이상의 존재에게 대항하고 그에 걸맞은 방법으로 죽는다.
한편 이렇게 박출의 여정을 방해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의 곁에서 함께하는 이들도 있다. 산영과 죽대, 그리고 잠시 현령과 함께 했지만 끝내 그의 탐심을 깨닫게 된 무명 등이 그러하다. 산영은 소설 속에서 대범한 여성상과 다층적인 정체성을 보여준다. 아들인 줄로만 알았던 ‘산’이 ‘산영’이 되어 돌아온 장면과 망설이지 않고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은 그의 성격을 충분히 설명한다. 소설 속 산영의 가장 큰 역할은 박출과의 은은하고 절절한 로맨스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만약 산영이 업었다면 박출의 여정은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산영과 박출은 서로를 구하고 감싸고 치료하며 산군을 향한 여정을 이어간다.
죽대는 박출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으며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한다. 물불 가리지 않는 그의 성격은 박출이 머뭇거리는 상황에 시원한 활력을 더해주고 가끔은 엉뚱한 성정이 소설의 재미를 북돋운다. 무명은 이 소설에서 드물게 입체적인 인물이다. 본래 탐심으로 가득한 현령의 무리에 소속되었으나 끝내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그를 제 손으로 죽인다. 한때는 그의 탐심에 동조했던 자로서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지만 무명은 결국 박출의 편에 선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박출의 곁에 있었으므로 그의 여정은 순탄치 않은 동시에 심심치 않다. 작가는 인물로서 박출의 적대자와 조력자를 알맞은 분량으로 등장시키며 소설의 매 장면을 뚜렷하고 직관적으로 구성한다. 동시에 그들의 주변을 관장하는 환상적인 동물들을 배치함으로서 단조로움을 피했다. 끝내는 산군을 만나기까지 오직 산에서 이어지는 이 여정에 모든 인물에게 서사가 있으며 그 서사는 적당한 속도와 강도로 꼬이고 풀려간다. 그러나 그 시작과 끝애는 누구도 아닌 박출이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무게가 있었다.
인간세에서 시작되었다는 아귀는 아이러니하게도 박출의 탄생으로 인해 세상에 등장했다. 그러므로 그 탐심 어린 존재들을 끝내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으리라. 소설에 잠시 암시되는 미향의 쓸모, 그리고 산영과의 애절한 사랑이 절절하게 만나 박출의 마지막 과제를 완성한다. 산영의 모습으로 아귀에게 사로잡힌 산군에게 돌진하는 박출의 마지막 내달림에서 그의 주변에는 다시금 아무도 없다. 그가 집에서 홑몸으로 쫓겨난 바로 그날처럼.
「호질」의 저자인 박지원이 심유붕의 집에서 보고 들은 것은 단순한 텍스트로서의 소설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의 아들. 그의 여정이었다. 그는 “내가 너를 버렸을 나이에…너는 세상을 구했구나…”라고 혼잣말하며 그가 떠나 보내야 했던 아들의 짧은 생을 먹먹하게 받아들인다. 심유붕의 집에서 그가 베꼈다는 소설은 실제였으며, 그 끝에는 가슴 아픈 두 번의 사랑이 있었다. 연인으로서 산영과 박출의 사랑과 부모 자식으로서 박지원과 박출의 사랑이.
마치며
박지원의 ‘호질’은 지금도 그것이 누구의 저작인지, 그 안의 호랑이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비단 그것이 오래된 이야기이거나 작가가 이미 옛날에 사망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테라리움 작가는 「호질」에서의 호랑이가 실재하였음을 가정하였다. 문장가로서 박지원은 「호질」 속 호랑이가 어떤 것으로도 해석되지 않는 본질적 ‘호랑이’가 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단지 인간과 대면해 그들을 꾸짖는 한 마리 호랑이로 남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호랑이와 귀신은 당시에도 지금도 신비한 존재이다. 그것은 작가가 누구인가에 따라, 그가 어떤 것을 말하고자 했는지에 따라 수만 가지 갈래로 해석될 수 있다. 귀신이 붙은 호랑이. 그것은 분명히 다양한 이야기의 또다른 원형, 또다른 시류가 될 수 있다.
아귀를 불러냈기에 그들을 소멸할 운명을 타고 난 자. 세상을 망가뜨렸기에 그 세상을 돌려놓을 천명을 받은 자, 사랑하려 하였으나 그 사랑마저 스스로 끝내야 했던,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박수무당의 이야기는 그와 억지로 이별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손에서 새로이 탄생했다. 물론 그것 모두가 실사는 아니지만,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자연스레 진실이라 믿게 된다. 이야기가 사람을 홀리는 매력은 여기에서 온다. 가짜가 진짜였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마음. 그리하여 상상이 사실성을 획득하는 마법이 호랑이 귀신을 타고 산줄기를 따라 내려온다. 우렁우렁 울려대는 호랑이의 비명소리와 그것을 단 한 번의 사랑으로 멈춰버린 어떤 가슴 아픈 전설은 오늘도 종이에, 단조롭지만 신비하게 적혀 내려온다.
그 호랑이에게 귀신이 붙은 사유는 이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