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글동글하고 맛있는 일본식 문어빵. 우리는 그것의 원래 이름을 따 ‘타코야키’라고 부른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문어의 함량은 다르지만, 모양과 맛은 거의 비슷한 것이 아무래도 소스 맛으로 먹는 빵인가 싶다가도, 배가 출출한데 마침 타코야키 트럭이 보인다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다. 가다랑어포를 헤치고 빵을 이쑤시개에 꽂아 하나 입에 넣는다. 씹자마자 놀랍게 고소하고 뜨거운 반죽이 툭 터져 나온다. 누구나 공유하는 타코야키의 질감과 온기, 간혹 야시장에 등장하는 신나는 타코야키 노래는 ‘문어빵’이라는 소재를 떠올릴 때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이다. 나이 불문 사랑받는 이 음식은 어디에서나 사랑받을 것이다. 이를테면, 해저도시 같은 곳에서도.
김청귤 작가의 〈해저도시 타코야키〉는 해저도시에서 판매되는 타코야키에 대한 내용이다. ‘해저도시’는 보통 어떤 느낌일까. 과학기술의 총집합체. 황폐한 대지에서 피신한 인간. SF에 기반한 여러 상상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어김없이 타코야키 노래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아니, 그전에 해저도시의 타코야키는 어떤 맛일까. 적어도 지상보다는 따뜻해야 할 것 같다. 바다는 춥고 어둡다. 이 소설의 배경처럼 “죽은 바닷속”에 만들어진 해저도시라면 말할 것도 없다. 문어의 함량, 온도, 습도가 적당하다면 문어빵은 ‘돔’ 모양의 둥근 도시에 가장 어울리는 음식이다. 둥근 것 안에 ‘한 때 살아있던’ 생물이 들어있다는 것마저 비슷하니 어쩌면 해저도시에 가장 먼저 도입되어야 하는 식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저도시 ‘태양’에는 어쩐지 타코야키를 아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이곳은 무엇에 의해 ‘차단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코야키를 먹을 수 없는 사람들
해저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건 커다랗고 둥근 돔이다. 돔은 도시에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아주는 동시에 ‘안’과 ‘밖’을 충실히 갈라준다. ‘돔’을 기준으로 바다와 해저도시는 구분된다. 사람이 북적이는 도시와 머나먼 우주가 지구의 대기층으로 나뉘는 것과 비슷하다. 우주와 도시, 도시와 심해는 제각기 다른 느낌을 준다. 사람이 북적이는 도시의 중심부와 미지의 공간은 각각 대비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심해-우주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근원이자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장소이지만 ‘도시’는 익숙함에서 비롯된 편안함을 준다. 사람은 잘 아는 곳을 편하게 느낀다. 〈해저도시 타코야키〉에는 이처럼 구분된 ‘이것’과 ‘저것’이 다수 등장한다. 공간뿐 아니다. “청소부”와 “돔 중심부 인간”, “돔”과 “돔 안의 돔”, “에너지바”와 “타코야키”, “태양”과 “달”은 각각 반대의 속성을 가진다. 청소부는 일하기 위해 대량으로 공장에서 생성되고 ‘돔 중심부’에 사는 인간은 지금의 인간종이 번식하는 것과 같이 아이를 낳는다. 해저도시는 ‘중심’으로 갈수록 안전하다. 마치 둥근 지구 위에 선 우리가 먼 우주를 동경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처럼, 해저도시의 사람들도 중심부를 가장 ‘안전하게’ 구성했다. 그리고 다가가기 꺼려지는 외곽을 청소부에게 관리하도록 맡긴다.
이 소설에서 청소부는 흔히 SF에서 인간과 대조되는 ‘로봇’처럼 보인다. 대량생산되고, 단순 작업을 위해 태어나며 생명성이 부여되지 않는다. 이런 존재가 맛있는 여러 음식을 먹는 건 비효율적이니 정해진 양만큼 ‘에너지바’를 지급하는 것이 최선이다. 죽은 이후에 그들은 다음 탄생의 부속품이 되고, 일련번호로 이름이 붙여진다. 언뜻 보면 이들은 ‘로봇’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청귤 작가는 청소부에게 로봇과의 차이점을 부여한다. 그 차이는 사소하지만 명백하다. 청소부는 기계가 아니다. 개량된 ‘인간’이다. ‘사용 가능 기간’이 아니라 ‘수명’이 부여되며 ‘생식기관’의 유무를 따질 수 있다. 작가는 이들을 ‘인공인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인간이 만든 인간이라는 이름이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진다.
청소부를 ‘기계’로 설정했다면, 작가는 여타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선명한 ‘이분법’ 안에서 편리하게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이런 시도를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인공인간’을 기존의 기계와 비교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인공인간’이라는 설정은 ‘기계’와 많은 차이가 있다. 사실, 이 작품 안에서 인공인간은 ‘인간’에 가깝다. 그들과 ‘중심부의 인간’은 신체적 차이가 크지 않다. 생식기가 없다는 것과 수명이 매우 짧다는 것. 이 둘뿐이다. 이런 인공인간의 속성은 독자의 무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타자화에 수시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인간은 이토록 악하다. 동족을 개량하여 로봇 대용으로 쓸 만큼.’ 무기체를 수식하던 ‘인공’이 생명을 수식하는 순간, 독자는 기계를 보며 적용하지 않았던 ‘윤리’의 잣대를 떠올린다.
기계에서 재생되는 사이렌은 인간의 비명보다 약한 경고성을 지닌다.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강렬한 비명을 듣는 것보다는 담담히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는 한 사람을 대면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의 감정을 가장 크게 느낀다. 그것이 이 소설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선택한 이유다. 〈해저도시 타코야키〉는 가장 가깝고 담담한 발화법을 사용한다. 조상의 경험과 지식이 쌓여 스스로 소모적인 인간이라는 걸 아는 청소부는 자신을 받아들인다. 억울해하지도, 울분을 토하지도, 저항하지도, 탈출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순순히 삶을 받아들이는 청소부를 보며 독자의 마음 한켠에는 ‘불편함’이 싹튼다. 미래에 사는 우리의 동족이 해저도시에서 벌인 ‘인공인간 개량 사업’에는 도덕적으로 명백한 결함이 있다.
하지만 그게 과연 미래의 일이기만 할까. 당연히 아니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다. 지금의 우리는 존재를 ‘개량’하는 데에 너무도 익숙하다. 법과 도덕으로 간신히 ‘인간성’이라는 허상의 이음매를 기워내며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만 적용된다는 ‘인간성’은 타종(他種)과 ‘우리’를 구분하는 데에 유용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아직’ 인공인간을 만들지 않았을 뿐이다.
이쯤 되면 해저도시의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황량한 마음의 소유자가 아닌가 싶은 회의감이 들 수 있다. 에이, 그래도 ‘타코야키’가 있는 도시인데. 완전히 차갑기만 할까.
바람과 싸워 이긴 ‘태양’처럼
옛 동화에는 나그네의 옷을 누가 먼저 벗기나 내기하는 태양과 바람의 일화가 있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그 대결의 승자는 태양이었다. 바람이 세찰수록 나그네는 옷을 단단히 여몄지만, 태양이 따스하게 비치자 그는 옷을 하나둘 걷어냈다. 이 동화에서 우리는 ‘온기’의 힘을 본다. 물론 불볕더위는 온기와 느낌이 다르지만, 어지간한 온기에 겉옷을 젖히지 않고 버틸 사람은 없다. 속마음을 비추는 데에는 온기처럼 좋은 것이 없다. 그러니 입안에서 툭 터져 나오는 따뜻한 반죽을 사람들이 못내 좋아하는 것이다.
해저도시의 타코야키 사장님은 ‘루나’다. ‘문’이라는 이름과 일련번호로 매겨지는 주인공 청소부의 명칭 역시 달과 관련되어 있다. 해저도시의 돔-타코야키-달은 ‘둥글다’라는 속성으로 연결된다. 하나의 이미지가 소설 안에서 제 역할을 해내도록 배치하는 것은 작가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 청귤 작가는 〈해저도시 타코야키〉에서 동그란 모양들이 어떻게 서로 가까이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 둥근 이미지에는 문어의 모양도 빠질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은 ‘동그란 것들’의 이어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루나는 타코야키를 판매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맛있는 음식을 따뜻할 때 먹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로 빵을 굽는다. 루나는 ‘돔 안의 돔’ 사람들과 다르다. 문을 자신과 다르게 보지도 않고 그를 ‘청소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맛있는 타코야키를 나눠주며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이후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도 루나에게는 ‘이방인’의 속성이 있다. 루나 역시 ‘문’처럼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해저도시 태양에서 존재하지 않는 달”이다. 현실의 사람에게 없는 따뜻함이 외부인의 음식에만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이 소설의 이야기를 슬프게 만든다.
따뜻하고 달콤짭짤한 타코야키는 ‘문’뿐 아니라 다른 청소부, 그리고 중심부 사람들에게도 전해진다. “루나는 외곽에서 중심부로 점점 이동”한다. 청소부와 중심부의 사람들은 타코야키를 먹고 매우 다른 반응을 보인다. 타코야키의 맛을 보고 ‘이상하다’라고 하는 동료 청소부에게 ‘문’이 “이상한 게 아니라 맛있다고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타코야키가 보여주는 가장 따뜻한 모습이다. 그간 알지 못했던 ‘온기’라는 것을 전달받는 청소부가 새로운 맛에 눈을 뜨는 것은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감정을 준다. 그러나 중심부의 사람들은 루나가 ‘문’과 함게 떠나려 하자 “저런 청소부”의 말을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며 “더 만들지?”라는 반말로 상대를 낮추어 부른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진풍경’이다.
‘문’은 타코야키를 팔고 있는 루나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돔 벽으로 데려간다. 그리고는 빛나는 식물을 보여준다. 그것은 ‘문’이 청소를 하며 내버려 둔 생명이었다. “나는 물때를 제거하는 청소부지 생명을 없애는 청소부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다. 빛나는 식물을 놔둔다는 건 돔 벽이 갈라질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문’은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생명을 지키고자 한다. 그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더욱 생명을 귀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을 주었는지 모른다.
결국 이 ‘빛나는 생물’은 어둡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해저도시에 금을 낸다. 바다가 죽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과 달리, ‘문’의 예상대로 돔 바깥에는 생명이 넘치고 있었다. 인간이 바다에 미치는 영향을 격리하자 생명이 되살아난 것이다. 돔이 나누고 있던 해저도시의 안과 밖은 소설의 결말에서 큰 이미지의 변화를 겪는다. ‘인간’의 관점에서 죽은 것이 돔 바깥이었다면, 실상 죽은 것은 돔 안쪽이었다. “자신만 살겠다고 달려가는 인간”은 바닷속에서도 같은 모양이다. 돔에 생긴 틈으로 물이 쏟아지자 코미디처럼 얽히고설키는 그들의 모습이 퍽 우습게 보인다. 바다는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므로, 죽어버린 해저도시의 안으로 생명이 밀려 들어가는 결말은 벅찬 소용돌이와 같다.
돔은 생기로 차오른다. 사람이 점령했던 도시의 모습은 바닷물에 손쓸 틈 없이 희석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루나의 정체가 밝혀짐으로써 완성된다. 몹시 이질적일 만큼 따뜻했던 루나의 진자 모습은 ‘문어’였다. 한없이 돔에 어울리지 않던 이방인으로서의 루나가 실상 문어였다는 것에 독자들은 놀라는 한편 고개를 끄덕인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던 돔 안에도 ‘온기’가 살아있었다. 사람은 발산할 수 없는 생명이 문어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루나’라는 달의 이름으로.
맺으며
김청귤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늘 두 가지 감각이 속에서부터 흘러넘친다. 하나는 온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다. 이 추상적이고 조금은 상투적인 말을 김청귤 작가는 자신의 모양으로 잘 다듬어 소설이라는 작품으로 만든다. 이토록 질리지 않은 온기와 사랑을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이렇게 꾸준히 따스한 사람을 이전에 알았던 적이 있었던가. 사랑과 온기를 낡은 것으로 여기는 지금의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당신들은 진짜 사랑과 온기를 느껴보지 못했을지 모른다고. 그것이 갖는 에너지는 상상 이상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잊은 것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라고.
기묘하리만큼 독자를 홀리는 이 작가의 단편은 타코야키처럼 중독성 있다. 어느 것도 낡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하지만 새롭다는 말 안에 다 담을 수 없는 진중함은 달콤하고 고소하며 짭짤한, 이국적인 문어빵과 꽤 잘 어울린다. 이방인, 그리고 인공인간에게 내밀었던 루나의 따스한 손처럼. 아니, 발처럼. 다섯 가지, 여덟 가지, 수십 수백 가지로 갈라져 오늘도 타인을 향해 뻗는 작가의 손끝에는 따스하고 폭신한 사랑이 올려져 있다. 사랑의 모양은 둥글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확신하게 되었다.
죽어가는 세상을 위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당신’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는 듯한 이 작가에게 나는 오늘도 눈물 흘리며 속내를 보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