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먼 것 같으면서도 손 뻗으면 닿을 것 같기도 한 마법의 단어입니다. 흔하게 입에 오르내리면서도 실질적인 형상은 눈앞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내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세계의 발전에 대단히 민감한 것 같고, 깨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멋있습니다. 물론 그것에 대해 우리가 깊은 지식과 통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남들보다 뚜렷하지만, 그래도 역시 피상적일 뿐인 이미지를 갖고 있을 뿐이고, 공상이 가져다주는 낭만을 알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만의 일은 아닐 겁니다.
옛날에는 신이 있었습니다. 문명이 있었고, 민족이 있었고, 명예가, 자유가, 이성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믿었고, 삶의 일부로 삼았으며, 때로는 삶의 전부가 되기도 했고, 정말 가끔은 죽기도 했습니다. 조금 섬뜩해지지만, 별 수 없습니다. 당대의 세계관을 당대의 사람이 의심하고 뛰어 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의심은 단단히 덧씌워진 어렴풋한 인상을 벗겨내고, 대상의 본질을 파헤쳐야 하는, 상당히 골치 아프고 피곤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간간히 그런 수고를 자청하는 한가한 사람들이 종종 나와주었고, 정 필요하다면 보편적 인식 자체를 뒤집는 대사건이 터져 주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의 인류사를 둘러보면 참 편의주의적인 전개구나, 싶어지게 됩니다.
다시 돌아가서, 사실 인공지능은 앞서 열거한 표상들에 비하기에는 다소 모자란 느낌이 있습니다. 적어도 인공지능을 위해 우리가 죽어 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보다 우리에게 와 닿을 만한 표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본작은 강인공지능이 개발되어 정치의 영역에 진출한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AI가 인간을 지배하거나 하는 디스토피아물은 아닙니다. 세계관 속 사람들이 지도자 후보를 추려 올리면 AI는 그들 중에서 지도자를 선출합니다. 그리고 AI는 지도자를 보조할 뿐 어디까지나 최종적인 결재는 인간의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거기다 안전장치로서 인류에 거역하지 말라는 규칙을 AI의 밑바탕에 깔아두기까지 했습니다. 모든 것은 통제되고 있고, 위험수위를 넘기지 않으며, 합리적으로 수행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런 인상을 받았을 겁니다.
“민주주의는 그저 최대 다수의 최대 만족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정치 시스템일 뿐이죠. 그 자체로 착각을 유도하는 셈입니다.” 화자는 후보에 들지 않았음에도 대통령에 선출된 유례 없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덩그러니 청와대에 놓인 화자의 시점에서, 그는 최종 결정권자라는 막대한 권한보다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초라함만을 느낍니다. 그래서 화자는 의심합니다. “여러분은 만약 이렇게 완벽하고 공정하고 옳은 판단으로 국가를 이끌어갈 이상적인 철인이 존재한다면, 그에게 나라를 맡길 자신이 있나요?” 화자의 대통령직 수행은 AI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흘러가지만, 화자의 일은 그저 결재 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 뿐입니다. 화자는 선임 대통령들 역시 비슷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던 차에 화자는 AI의 국정운영 시스템에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그 구조를 파악해보기로 합니다. 화자는 인공지능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업무에도 충실합니다. “축하합니다. 방금 여러분 모두의 투표권은 인공지능에 의해 박탈되었습니다. 한 명도 빠짐 없이요. 그것도 매우 민주적으로 말입니다.” 화자는 끝끝내 시스템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충격을 받습니다. 대선 관련 자료에는 단순한 후보들의 인적사항이나 선택 이유 정도가 아닌, 방문한 모든 곳들과 세세한 동선, 생필품 하나하나의 구매 내역, 대화 내역, 행동 양식, 성격 등 말 그대로 모든 정보가 기입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넘어, 미래의 행동에 대한 예측까지도요. 인공지능은 보다 최고의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그들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화자에 이르러, 인공지능의 능력은 가히 완벽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인공지능은 자신의 능력을 믿을 수 있겠느냐 묻고, 화자는 그에 전권을 위임하겠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아무 걱정 마세요 여러분. 철인 정치에 의하면, 그것이 최선이니까요.”
언젠가 인공지능에 대하여 이리저리 알아볼 때에, 몇 가지 일화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좀처럼 좋은 점수를 낼 수 없자 게임을 종료시켜버린 AI나, 3×3 판에서 삼목을 만드는 게임에서 판을 벗어난 자리에 수를 두는 AI까지, 그저 웃어 넘기고 말 일화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확장시켜 보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비밀 임무와 승무원들의 조력자 역할 사이에서 승무원들을 몰살시킨다는 결론에 이른 인공지능 HAL9000의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시 반복해서, 당대의 세계관을 당대의 인간이 의심하고 뛰어 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종종 의심의 실마리는 주어지기 마련이고, 정 뭣하다면 큰 사건을 터뜨려주곤 하던 것이 우리의 지구작가였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현재로서는 이만한 것이 없다’는, 인정과 의심이 뒤섞인 유보적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통한 완전한 철인 정치가 구현된 세상이라면 어떨까요. 구태여 귀찮기 짝이 없는 의심을 할 필요도 없고, 설령 의심을 품은들 그 또한 인공지능의 상정 내에 들고 말, 참으로 안락하고 포근한 세상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달리 문제될 것은 없지 않나, 싶으면서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얼마 전 보았던 TED 영상에서는 저와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세상에도 더 있었는지, 요즈음에는 인공지능의 능력 발전보다는 인간을 보조하는 존재로서의 인공지능 개발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과연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인공지능과 불가분한 관계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더없이 손쉽게 자행되는 더러운 짓거리로부터 피곤한 삶을 지켜낼 수 있을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