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G 초창기에 최참치 작가님의 글을 즐겨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의 어제를 노래하며>라는 글에는 리뷰도 남겼었고요. 그걸 기억하시고 이 글의 리뷰를 의뢰해 주셨어요. 덕분에 오랜만에 작가님의 글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정제된 리뷰를 쓸 능력은 없고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그냥 좀 많이 적어 보려고 해요.
대전이라는 디테일
작가님 글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놀라울 정도의 디테일입니다. 이건 예전의 리뷰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저는 작가님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너의 어제를 노래하며>는 과거를 회상하는 사소설 성격의 글이었기 때문에 그 장점이 더욱 두드러질 수 있었습니다. 아포칼립스물인 <단지 먼지뿐임을> 역시 그런 디테일이 장점이 될 수 있는 글입니다.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구체적이고 현실감있게 묘사하는 초반부는 독자들을 끌어 들이기에 충분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 디테일이 특히 공간 묘사에 집중됩니다. 이야기는 대전의 구석구석을 이동하며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대전 사람이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는 수많은 지명들이 등장합니다. 저 역시 대전에 꽤 오래 살고 있는지라 연이어 나열되는 동과 천의 이름을 들으며 주인공의 동선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전을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이 부분이 어떻게 읽힐까 걱정이 됩니다.
물론 공간적인 디테일이 반드시 독자가 잘 아는 지역을 대상으로 할 때만 효과가 있는 건 아닙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세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지명들에는 단순히 낯선 고유명사들의 나열 이상의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킹스랜딩, 윈터펠, 리버런과 같은 지명은 처음 듣더라도 영어에 익숙하다면 그 지역의 특징을 떠올릴 수 있게 해 줍니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샤이어, 리븐델, 곤도르, 모르도르와 같은 지명들은 의미까지는 아니어도 어떤 분위기를 전달해 주고 그 세계에 깊게 빠져들 수록 얽혀있는 지명들의 연관성에서 더 많은 의미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글에 등장하는 대화동, 비래동, 진잠동과 같은 지명에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대전을 모르는 독자에게는 그냥 의미없는 고유명사일 뿐이죠.
만일 이 이야기의 배경이 뉴욕이나 파리라면 그런 고유명사의 나열도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 스태튼아일랜드 같은 지명 역시 뉴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미를 찾기 힘든 고유명사지만 소설을 통해 그런 지명들을 접하고 특징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즐거움을 줍니다. 왜냐면 뉴욕이니까요. 뉴욕에 가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뉴욕을 묘사한 글도 좋아하겠죠. 하지만 대전에서 그런 매력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대화동, 비래동, 진잠동이 대전의 어디쯤 위치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이 글에 등장하는 수많은 지명들은 별다른 정보 없이 독자에게 피로감만을 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역시 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는 건 비효율적이니 지양해야 할까요. 대전에 살고 있는 독자로서 그런 결론은 내리고 싶지 않네요. 솔직히 대전을 이정도로 구체적으로 묘사한 글은 이런 글이 잘 없다는 그 자체로 가치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대전을 잘 아는 독자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글이죠. 다만 이렇게 고생해서 쓰신 글의 매력이 일부 독자에게만 한정되어 전달된다면 안타까운 일이겠죠.
낯선 도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글도 보편적인 독자에게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먼저 대전이라는 도시를 독자가 상상할 수 있도록 특징을 잡아 간략하게 그려 주시면 어떨까요. 대전은 과학과 국방의 도시입니다. (네 그전에 빵의 도시이기도 하죠)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고요. 대전의 지역들도 그런 특징들로 구분되어 있죠. 대전역 (과 성심당) 을 중심으로 한 동남쪽의 구도심, 정부청사가 있는 중심부의 신도심, 카이스트와 연구소들이 몰려 있는 북쪽의 연구단지, 자운대와 현충원 그리고 서남쪽의 계룡시로 이어지는 군 관련 시설들로 나뉘죠.
이 이야기에서는 이 모든 지역들을 여행합니다. 먼저 대전의 특징과 지역 구분을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주시고 여행을 시작하면 대전을 잘 모르는 독자들도 흥미롭게 그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이 이야기에는 여러 세력들이 나옵니다. 마침 그 세력들도 군인, 연구자 등으로 나뉘죠. 이런 세력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과 대전의 지역 구분을 결합해서 더 단순하게 배경을 설정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포칼립스와 미스터리
아포칼립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와 조건이 다릅니다. 방사능에 오염되었거나, 물이 부족하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좀비들이 창궐하거나, 외계인이 침략하거나. 이 중 몇 가지 조건이 주어지면 주인공들이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초반부 이야기의 동력이 됩니다. 세계에 대한 탐색을 넓혀가면서 그 중 몇 가지는 해결되고 몇 가지는 새로 등장하며 그 과정에서 이유를 알 수 없던 조건들의 비밀이 밝혀지고 별개라고 생각했던 조건들이 연결되며 그 뒤에 숨어 있던 거대한 구조가 드러나게 되죠. 주인공은 그 구조의 핵심을 파악해 그것을 극복하거나 혹은 그걸 이용해 빌런을 처치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어지는 조건들을 살펴보죠.
1) 지상이 먼지로 뒤덮혔고 사람들은 지하에 살고 있습니다.
2) 사람을 잡아 먹는 새들이 아파트 단지를 점령했습니다. 지상으로 올라가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죠.
3) 과거 언젠가 잠든 사람들의 몸이 어려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려진 정도는 제멋대로고요.
이 세 가지 조건이 주어지며 1화가 시작됩니다.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일단 1), 2)로 동선이 제약되고 목표가 생깁니다. 주인공의 직업은 새를 피해 물건을 배달하는 배달꾼, 혹은 새를 잡는 새잡이에요. 3)으로 미스터리와 기대감을 줍니다. 2화에서는 새들이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는 암시가 주어지고 4화에서 그 새 무리를 처치하기 위한 원정대가 구성됩니다.
이후에 드러나는 조건들은 스포일러라 글을 읽고 나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4)
자유토벌여단이라는 군인들의 무리가 정부청사 근방의 중심부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호의적일리 없는 집단이죠.
5)
현충원에서 새보다도 더 무서운 괴물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망자들의 흔적이죠.
6)
현실이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중첩이라고 표현되는데 사람들이 잠들었던 이후 여러 개의 현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거죠. 그 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원들이 있고요.
7)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 어떤 원인이 설명됩니다.
그럼 이런 조건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효과적으로 활용될까요. 아쉽지만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제가 읽으면서 느꼈던 문제는 이렇습니다. 처음에 주인공의 적은 2번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4번과 5번이라는 새로운 적이 나타나죠.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럼 여기서 진짜 적이 무엇인가가 중요해집니다. 그에 따라 다른 적과는 손을 잡을 수도 있겠죠.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됩니다. 4번을 타도하는 것과 2번과 손을 잡고 5번에 맞서는 것이죠. 그런데 이 두 갈래의 이야기에 시너지가 없습니다. 4번을 타도하기는 하는데 그 과정에 2번과 5번은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5번에 맞서기는 하는데 극복하는 게 아니라 밀리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끝납니다.
4번의 타도가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그 과정에 2번과 5번이 어떻게든 관여하는 게 좋았을 겁니다. 다가올 종말은 막을 수 없더라도 버려진 세상에서 보다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이야기가 되었겠죠. 5번과 맞서는 게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2번과 손을 잡고 4번의 방해를 극복하는 과정이 반격을 위한 교두보가 되었다는 희망을 주었으면 좋았을 겁니다. 대전 곳곳을 헤매며 고생했던 주인공의 여정이 결말의 방점을 찍는데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야 독자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문제점은 3, 6, 7번의 조건이 이야기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지지 않았어도 똑같은 이야기를 아무 문제 없이 풀어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3번 같은 조건을 보면 독자들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해하고 그런 조건 때문에 예상을 벗어난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을 보며 흥미로워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그 두 가지 모두 주어지지 않습니다. 6번과 7번도 마찬가지예요. 독자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원인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6번의 사실은 이야기의 진행에 전혀 이용되지 않습니다. 박사의 일방적인 설명으로 제공되는 7번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이해하거나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에서 미스터리는 미끼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독자가 온갖 상상을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읽게 만들죠. 때로는 그 자체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모든 미끼가 진짜 먹이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미끼가 가짜 먹이라면 미끼 자체에 흥미가 떨어지겠죠. 이 이야기에는 많은 미스터리가 등장하고 그로 인해 흥미롭게 글을 읽을 수 있었지만 정작 미끼를 붙잡아 깨물었을 때는 경이로움보다 허탈함이 더 컸습니다. 혹은 끝까지 붙잡지 못했거나요. 그런데 사실 미스터리를 중심으로 한 많은 이야기들이 그렇기는 합니다. 미드 <로스트>를 비롯해 떡밥을 제대로 회수하지 않았다고 비난받는 많은 명작들이 있죠. 이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얼마나 큰 만족감을 주느냐는 독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저는 좀 아쉬웠어요.
누나와 의뢰인
아무리 끔찍한 아포칼립스 상황이어도 주인공 혼자 던져졌을 때는 별로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니까요. 어떻게든 헤쳐 나갈 것 같죠. 그래서 많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아끼는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 사람은 주인공의 발목을 잡기도 하고 주인공이 행동할 동기를 제공해 주기도 하죠. 이 이야기에도 누나가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누나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사하고 싶어하고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합니다. 위험한 임무를 맡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되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보호가 필요한 누나를 두고 떠나기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에게는 누나에게서 해방되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이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주인공은 누나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고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고 찾기 위해 움직입니다. 누나의 존재는 이야기 내내 주인공이 대전 곳곳을 돌아 다니는 동기가 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누나의 불안한 상태는 주인공을 움직이기 위해 편리하게 이용될 뿐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는 주인공을 움직이는 또 다른 동기인 의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주인공에게 임무를 맡기고 심지어 그 결과에도 크게 개의치않습니다.
주인공이 받는 첫 번째 임무는 한 노인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확인만 하고 구출할 필요도 없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셔도 구출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와도 된다는 의뢰를 아들이 하는 겁니다. 그럼 왜 굳이 생사를 확인하는 걸까요. 주인공이 가보지도 않고 대충 둘러대면 어쩌려는 걸까요.
무기를 준비하고 아파트에 올라가서 노인에게 이상한 예언 비슷한 말을 듣고 새와 싸우는 장면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그냥 그 장면만 즐겨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의뢰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만 않으면요. 다른 임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이 임무를 수행하며 겪는 일들은 흥미롭지만 대체 그 의뢰가 의뢰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왜 하필 주인공에게 의뢰한 건지는 불명확합니다.
무기와 냉혹함
주인공의 무기는 쇠메입니다. 메와 날과 모가 달려 있는 이 무기는 상당히 자세히 묘사되고 이를 이용한 액션도 호쾌하게 펼쳐집니다. 근접 무기만으로 날아다니는 새와 격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 자체가 흥미롭고 또 잘 활용됩니다.
그런데 중간에 갑자기 주인공은 이야기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오버 테크놀로지 무기를 손에 넣게 됩니다. 거의 무적으로까지 보이는 이 무기를 손에 넣은 뒤 주인공이 갑자기 강해지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몇몇 상황을 해결하는 데만 제한적으로 활용됩니다. 그런 무기를 굳이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싶더군요.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있는 건 무기만이 아닙니다. 주인공을 비롯해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때로는 냉혹하고 때로는 온정적입니다. 아포칼립스 상황이니 냉혹한 건 당연해 보이는데 간간이 온정적인 모습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전반적으로 배경과 인물의 설정이 조금 느슨하고 작가에게 끌려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전작인 <너의 어제를 노래하며>가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반면에 인물과 배경은 생동감 있었다면 <단지 먼지뿐임을>은 사건이 벌어지기 위해 인물과 배경이 생동감을 잃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다만 작가님의 장점인 세밀한 묘사력은 전자의 경우와 더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
글의 템포에 대해
글의 분량에 비해 공간적인 배경과 얽히고 설킨 세력 관계 그리고 풀어야 할 미스터리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각각의 장면은 흥미로운데 이어 붙일 때 조금 어색해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불필요한 설정을 좀 쳐내거나 차라리 글의 분량을 늘여서 천천히 진행하시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뢰하시면서 3회까지가 지루하다는 평이 있다고 하셨어요. 제가 보기에는 3회까지가 지루하다기 보다는 4회부터가 진짜 재밌다는 게 맞을 것 같아요. 현충원으로 향하는 원정대를 모집하고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개성있는 대원들이 새들과 활극을 펼치는 이 부분의 템포가 저는 제일 좋았어요.
주인공이 좀더 자신의 의지로 움직여도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첫 번째 노인을 만나는 장면은 굳이 의뢰를 받지 않고 그냥 유용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 고층 아파트로 모험을 떠났다가 만나는 걸로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누나 역시 무기력하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동생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거나 하는 뚜렷한 목표로 움직인다면 어떨까 싶고요.
글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리뷰를 부탁하셨다고 생각해서 조금 과하게 여러 가지 말을 적어 보았어요. 느끼기에 아쉬웠던 점과 제 생각을 적긴 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에 불과하니 그냥 참고로만 하셔서 더 좋은 글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작가님의 여러 장점이 서정적인 일상물 뿐아니라 냉혹한 아포칼립스물에도 꽤 잘 어울린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즐겁게 읽었고 앞으로도 많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