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위 연필꽂이에는 여러 종류의 펜이 꽂혀 있다. 모나미 볼펜, 시그노 중성펜, 동아 큐노크에 사쿠라 겔리롤, 펜텔 샤프, 팔로미노 블랙윙에다 직구한 레트로 51 볼펜까지. 각종 펜이 어지럽게 꽂혀 있는 연필꽂이에서 단연코 돋보이는 것은 몽블랑 수성펜이다. 캡탑에는 몽블랑 특유의 문양인 흰색 별이 그려져있고, 하단에는 몽블랑 마이스터스튁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6라인의 수성펜이다.
이 소설에서도 몽블랑 필기구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몽블랑에서 플래그십 모델로 내세워 주력으로 마케팅하고 있는 마이스터스튁 149 만년필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는 중요한 자리에서 사용하기 위해 주문한 만년필에 하자가 있다면? 그 하자를 계약 체결하기 1시간 전에 발견했다면? 다른 대안을 발견할 수 없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쭉 돋는다.
‘나’는 플랜 B를 실행할 타이밍을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중 우연히 리셉셔니스트 서능라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될 사람은 뭘 해도 된다고 했던가? ‘나’는 능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몽블랑 149를 구해오며 팀에서 다시금 구세주가 된다. 그리고 능라 덕택에 왜 이런 해프닝이 발생했는지도 알게 된 ‘나’는 이 일을 조용히 덮는다.
내게 지금의 너를 욕하거나 징계할 자격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다가 자기가 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생각해서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단초를 제공했든 안했든 간에 결국 잘못을 저지른 건 바로 그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똑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는데 말이야. 양심에 따라 행동할 기회를 ‘나’가 주기는 하지만, 과연 그 사람이 양심에 따라 행동할 지는 모르겠다. 그냥 배상만 하고 모른 척 할 것 같단 말이지.
결말을 알고 난 이후 새로 1편부터 읽으면 인물들 간의 대화가 다시 보인다. 대화가 그렇게 이중적으로 보일 줄 누가 알았겠어?
구체적인 이름과 사건은 혹여나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나’가 어떻게 ‘능라’의 도움을 얻어서 사건을 해결했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보시길. 간만에 깔끔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읽었다. 앞으로 이 두 명이서 자주 얽히게 될 것 같은데, 어떤 사건을 맞닥뜨리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