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월-공포 단편 리뷰
1.
출근길 무료함을 달랠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망설임 없이 <적월-공포 단편>을 읽어 보라고 권하겠다. 이유는 단순. 우선 분량이 짧다. 가장 짧은 이야기가 200자 원고지로 6매이며, 가장 긴 것도 50매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재미있다. 거의 모든 회차의 결말에 도사리고 있는 독특한 반전과 각 반전을 상상해 낸 작가의 창의력에 혀를 내두르는 재미다.
스낵컬처가 유행한 지 오래됐다. ‘바쁘다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핵심만 요약한 짧은 글, 짧은 영상 등은 우리가 원하는 정보와 재미에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영화 한 편 다 볼 시간은 없어도, 어디 가서 그 영화 모른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한 ‘무슨 무슨 영화 10분 만에 다 보기’ 같은 콘텐츠처럼 스낵 콘텐츠는 짧고 가벼운 게 특징이지만, 그런 짧고 가벼운 콘텐츠 만들기가 비단 쉬운 일은 아니다.
단순하게만 따져 봐도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을 10분짜리 영상으로 요약하려면 제작자는 해당 영화의 내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각 장면 중 어느 장면을 소개하고 어느 장면을 잘라내야 효과적일지를 따질 수 있어야 하고, 이때 스스로 추구하는 ‘효과’가 어떤 효과인지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분량이 제한적이므로 그 안에 무슨 내용을 담아낼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창작자는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노리게 되고, 일견 그것과 무관하거나 관련이 덜해 보이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어낼 수밖에 없게 된다. 스낵컬처가 가려운 부위를 정확히 긁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neptunuse 작가의 『적월-공포 단편』은 스낵컬처로서의 기능을 정확히 수행한다. 그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나 김동식의 『회색인간』 등이 수행했던(어쩌면 ‘전자책’이라는 새로운 그릇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시절의 『나무』로서는 채 완수하지 못했을지 모르는) 기능과 다르지 않다. 쉽고 가볍고 빠르게 소비할 만한 재미난 읽을거리. 이때 말하는 재미의 원천은 이렇다.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지?”
따라서 이런 종류의 글쓰기는 일종의 ‘창의력 뽐내기’과 되는 관계로, 작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해 내야 한다. 짧은 분량만큼 높은 회전율을 지닌 콘텐츠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비슷한 이야기, 비슷한 소재, 비슷한 반전 등을 독자는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찾아낸다. 이것이 작가에게는 적잖은 부담이지 않을 수 없는데, 다행히 neptunuse 작가의 성실함에 기반해 『적월-공포 단편』은 61회에 걸쳐 연재된 현재까지 도시괴담, 신비주의, 범죄 스릴러, SF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소재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매회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반전을 만날 수 있어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2.
『호러 사피엔스』의 작가 도다야마 가즈히사는 인간의 공포 체험을 “어라? 무서워. 꺄!” 체험으로 단순화한다. 공포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겠지만, 흉폭해 보이는 큰 개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의 공포는 매우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그 때문인지 공포 장르 스토리텔링은 다른 장르의 이야기에 비해 초단편 형태를 띠는 케이스가 많다. 우리가 흔히 ‘무서운 이야기’라 부르는 종류의 이야기, 인터넷상에 떠도는 갖가지 괴담 등이 그렇다.
공포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은 미국 영화 제작자들이 공포 장르 비평가들이 여러 해 동안 줄기차게 공언했던 견해를 실행에 옮기려고 수차례 노력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견해란 바로 “공포 이야기는 짧게 요점만 간단히 표현해야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비록 킹은 영화 제작자들의 시도가 대개는 실패에 머물렀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공포 장르 스토리텔링은 비교적 짧은 스낵 콘텐츠로 소비되는 경향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공포 웹툰, 공포 라디오 등이 그렇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공포 이야기 독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그야말로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다. 가령 혼자 사는 집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정황을 포착했다고 해 보자. 이때 이 이야기를 접한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나만의 안전한 보금자리인 줄로만 알았던 집이 실은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었다는 점과,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내가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야기하는 불쾌함과 두려움, 섬뜩함 등의 감정이다. 이 집에 거주하는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어떤 유형의 인간이고, 이 위기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으며 어떤 깨달음을 얻는지 등등은 공포 독자에게 부차적인 것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정해진 분량 내에서 작가는 늘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데, 공포 장르는 그 이름 그대로 ‘공포’를 지향하는 장르인 탓에, 그리고 공포는 길에서 큰 개를 마주쳤을 때와 같이 지질한 절차 없이도 즉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정서이므로, 독자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천명 아래 스티븐 킹이 지적한 영화 제작자들과 마찬가지로 ‘짧게 요점만 간단히’ 표현하는 선택이 내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선택이 작가들의 나태함이나 무책임을 나타내는 지표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다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그렇게 지름길들이 채택되는 동안 무심코 지나쳐 왔을 무수히 많은 갈림길과 샛길들, 그리고 그 다양한 길목에서 겪었을지 모르는 다양한 경험들의 소멸이다. 나의 기우는 스낵컬처가 붐을 이루며 보다 긴 분량의 콘텐츠는 점차 외면당하게 되는 분위기, Z세대가 겪고 있다는 문해력 저하 등의 문제와 하나의 대오를 이룬다.
물론 서점 한구석의 공포/호러 코너는 초단편 공포 소설집뿐만 아니라 수많은 장편소설들로도 채워진다. 각각의 상황에 맞는 독서 소비가 이뤄져야 한다. 출퇴근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 줄 스낵 콘텐츠가 필요할 때 『적월-공포 단편』과 같은 초단편 공포 소설집은 탁월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짧은 시간 내에 감정의 환기를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는 텍스트로써 공포라는 정서를 체험하는 데 있어 보다 길고 복잡하지만, 한층 더 깊이 있고 다양한 층위를 갖춘 길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연유로 neptunuse 작가의 또 다른 공포 장편인 『역마살(疫魔殺)』의 연재를 눈여겨보게 된다. 『역마살(疫魔殺)』은 ‘역귀’의 창궐로 초토화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존자들의 이야기이다. 프랑켄슈타인으로 대표되는 시체가 살아 움직인다는 공포의 원형을 차용한 작중 ‘역귀’는 역병으로 무너져 가는 몸에 죽은 사람과 동물의 몸을 덧대 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시체를 얻기 위해 사람을 해치고 다니는 괴물이다. 역병, 시체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이고 쌓여 이룬 부정의 덩어리가 생존하는 방식은 또 다른 시체를 덧붙이는 것으로, 결국 끊임없는 부정의 생산, 자가복제, 확산인 것이다. 이에 맞서는 인간의 대응방법이란 무엇인가? 연재 초기에 해당하는 현재까지는 당연하게도 ‘도피’이다. 작중 주인공은 계속해서 위기 앞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를 강조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살아남기만을 추구하는 동물이 아니다. 생존본능에 따라 위축되어 있던 인간이 마침내 또 다른 본능에 눈을 뜨게 됐을 때, 끔찍한 괴물의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가 흥미진진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한편 『역마살(疫魔殺)』의 역귀는 『적월-공포 단편』 중 한 회차(26회, 「초소에 있던 것」)의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그 회차를 『역마살(疫魔殺)』의 프리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neptunuse 작가의 작업이 스낵 콘텐츠로 공포 장르에 입문한 독자를 장편 공포 소설로 유입시키는 선순환을 낳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맛있는 반찬만 골라 먹는 편식은 몸에 좋지 않을뿐더러 다양한 반찬이 지닌 고유의 맛을 즐겨볼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라는 밥상머리 예절 비슷한 ‘책 읽는 법’을 독자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저것 차려 먹을 시간이 없을 때는 입맛에 맞고 허기를 달래줄 수 있는 간식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니, 때와 상황에 맞는 섭취가 필요하리라.
이상, 출퇴근하며 먹기 좋은, 아니 읽기 좋은 소설, neptunuse 작가의 『적월-공포 단편』 리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