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에서 기술은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안에서 사람은 무한한 생명을 얻거나, 우주를 탐사하기도 하고, 새로운 지적 생명체를 발견하거나 상상도 못한 현상을 관측한다.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미래를 동경한다.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픽션 속 모든 사건을 통해 인물의 감정은 고조되거나 안정을 찾는다. 픽션 안에서 거대하거나 사소한 기술의 변화가 감싸고 있는 건 감정이어야 한다. 소설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 증오와 화해는 미래에도 유효하다.
이미 공간으로는 허구까지, 시간으로는 종말 이후까지 픽션의 범위는 확장되었다. 그러나 소설은 거시적인 동시에 개인의 미시적 생각까지 꿰뚫어 본다. 사회적 이슈나 범우주적 멸망, 개인과 개인의 사소한 관계까지 소설이 건드리지 못할 영역은 없다. 그러므로 독자는 픽션, 특히 SF의 확장성에 많은 기대를 건다. 기술의 발달은 자연스레 시공간의 확대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비롯한 이동수단의 발달로 지구는 좁아지다가 결국 마을이 되었다. 이동하는 데에 수 개월이 걸릴 곳에 이제는 하루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다. 불과 백 년 안에 이룩한 발전이 이러한데 수백, 수천 년이 더 흐른다면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이 질문에는 보수적인 답변과 급진적인 답변이 모두 가능하겠다. 미래의 인간 문명은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을 정도로 온건하거나 전혀 꿈도 꾸지 못한 방향으로의 전환이 발생할 것이다. 이는 흥미로운 예측이다. 백 년 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발견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인간이 우주로 나가는 것은 떠올릴 수 있었다. 종잇장만큼 얇아지는 디스플레이의 개발은 미신에 가까웠지만, 괴생물체의 합성은 상상 가능한 범위였다. 이처럼 기술은 때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뻗어가거나 한없이 정체된다.
여기 인간의 잔혹함과 이기심은 그대로 보존된 채 기술만 극단으로 발전되어버린 세계가 있다. 샤유 작가의 소설 〈영원한 것을 동경해서〉는 우주로 인간 삶의 영역이 확장된 어느 미래를 그리고 있다. 그 안에는 어딘가 크게 어긋나버린 사랑과 돌이킬 수 없는 죽음, 방향성을 잃은 세계가 포함된다. 그것은 하나의 ‘동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찰나의 인간은 영원을 바라고
인간의 수명은 고작 100년이다. 46억살로 추정되는 우리 행성의 나이, 그보다 수 배는 오래되었다는 우주의 기원과 비교하기에는 찰나라고 표현하기에도 짧은 순간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사람은 ‘영원’을 꿈꾸기 시작했다. 불로초를 비롯한 갖가지 고대 신화에서 시작된 영생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실재하는 힘을 얻었다. 지금의 불로불사는 허상이 아니다. 오히려 막연하지만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이 자연적으로, 진화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한, 의학적 연명에는 금전적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때문에 몇몇 과학소설은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계급 또는 계층에 따라 차등지급되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기술로 인한 계층 차이는 ‘계급화’되고, 빠르게 기술적 디스토피아로 이어진다. 〈영원한 것을 동경해서〉 역시 이 소설들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서린은 미래의 사람이다. 교육 기관으로서의 ‘학교’가 본래 목적을 잃고 “돈이 많거나, 유명하거나, 머리가 좋”은 학생들의 친목 모임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서린은 돈과 명예는 없었지만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입학을 허가받는다. 그 안에서 서린은 자신과 생활 반경, 생각의 범위, 심지어 다루는 시간의 단위까지 다른 학생들을 만난다. 죽음을 정복한 채 인간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가능성을 꿈꾸는 또래 아이들에게서 서린은 소외감을 느낀다. 지금의 빈부격차를 고스란히 확장해 배경에 녹여낸 이 단편의 도입은 작은 사회로서의 학교, 특별히 그 안에서 극단으로 치달은 개인의 차이를 보여준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교육의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은 사회의 계층구조가 완전히 망가진 채 악순환되고 있다는 증명일 테다. 서린은 학교의 아이들과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스스로 고립될 때쯤 나타난 민주는 서린의 친구가 된다.
아이들의 대화에서 독자는 이 세계의 시공간적 범위를 가늠할 수 있다. 항성계 간 교류 등 탈지구적인 공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서린의 세상은 개인이 우주를 왕래하는 것이 자유로운 시기다. 심지어 지구 밖의 다양한 곳에서 인간이 거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교’, ‘한국’, ‘가족’ 등의 개념이 여전히 일상적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독자는 이 시기를 어느 즈음으로 생각해야 할까.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과학소설에서 시공간은 작가의 예상보다 정교하고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작가의 머리에는 이 소설의 배경이 뚜렷하지만, 독자는 서린의 세상에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날짜를 표기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오히려 지나치게 정확한 시간은 소설의 재미를 반감하기도 한다.) 단지 몇몇 확실한 단서를 통해 지금으로부터 대략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인물들의 활동 범위는 어느 정도 되는지를 암시한다면 더욱 좋겠다. 이는 독자가 소설에 몰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시공간은 곧 인물의 행동 반경이기 때문이다.
서린에게 다가온 친구 민주는 뜻밖에도 작가가 설정한 인간 세계의 가장 상위에 있는 사람이다. 학교에 겨우 입학 허가를 받은 서린에게 민주는 그야말로 동경(또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서린과 민주는 학교의 아이들 중 양극단의 환경에 놓인 부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민주가 서린에게 물어보는 것이 뜻밖에도 ‘꿈’이라는 점이다. 서린은 자신의 꿈이 물리학자라고 답하며 이런저런 과학적 지식을 말한다. 이 소설의 즐길거리 중 하나는 SF 상상력에 기반한 과학적 설명이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수준으로 삽입되어 있으며 그것이 후반부 소설 진행에 적절한 톤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스토리의 진행에 전혀 맞지 않는 지식의 남발이 아닌, 적당한 과학적 예측과 상상은 독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유희 안에서 서린은 민주와 자신의 욕망에 공통점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민주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그녀의 이름을 딴 발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민주는 가볍게 그것을 제안했고, 서린은 망설이다 받아들인다. 독자들은 물론 민주의 저의가 사랑에 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민주와 서린은 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 민주는 서린을 충분히 얕볼 수 있고, 서린은 민주와의 비교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음에도 둘은 절친이 되었다. 이런 구도는 결핍이 있는 인물과 그것을 사랑으로 충족시키는 인물의 구도를 자연스레 형성하며 독자에게 흥미로운 전개를 예고한다. (교차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에서 서린이 민주를 살해하려는 것으로 보아 둘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발생함이 암시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전형적인 신데렐라 또는 구원자의 플롯이 되지 않으면서 작가의 개성을 오롯이 드러내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서린과 민주가 발 딛고 선 사회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두 인물의 설정이 비교적 분명하고 자세히 잡혀 있는 것에 비해 주변의 세계(특별히 사회적 배경)에 대한 정보가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서린과 민주의 계급이 아예 다르다면, 또는 거주지마다 낙인처럼 번호나 별명이 붙어서 학교 학생들이 서린을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어떨까. 파티나 회상 형식의 장면으로 빠르게 지나치기에는 ‘학교’를 포함한 거시적 사회의 소설 속 설정은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물론 이 소설은 서린과 민주의 관계에 집중한 단편이지만, 그 주변의 상황은 어떠한지 다양한 에피소드로 풀어준다면 독자에게 더욱 다면화된 미래의 사회를 보여주는 소설이 될 것이다.
민주와 서린의 관계 이외의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학교’ 안의 아이들에 주목하다보니, 서린이 이 학교에 오기 전에는 어떤 세상에 살았는지, 그곳의 생활은 ‘윗공기를 마시는 아이들’과 어떻게 달랐을지 궁금하다. 서린의 학교 밖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독자가 학교 안과 밖의 서린을 비교하며 그녀의 자격지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서린뿐 아니라 민주의 세계에서도 결이 다르지만 복닥복닥한 이야깃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동경, 그 끝의 사랑
민주는 서린과 손을 잡고 발전기를 개발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이때 비로소 서린의 감정을 크게 뒤흔들 사건이 발생한다. 공사 도중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번에 사망한 것이다. 이 장면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현대의 산업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이 개인의 생명까지 앗아가고도 태연한 이 상황에서 독자는 분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민주의 행동은 그 분노를 돋운다. 반성도, 사과도 없는 민주의 태도에 독자들은 아연실색한다. 그러나 서린은 자신이 그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비교적 확실히 인식한다. “민주의 말대로 그 0.3%의 손실은 빠르게 충원되”지만, 서린의 마음은 곪아간다.
노동자들의 죽음이 예고된 것이었다는 데에서 서린의 화는 극에 달한다. 여기서 작가는 민주에게만 잘못을 씌우지 않는다. 기이하리만치 세상은 민주의 편을 든다. “그래도 그 분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일 아닌가요?” 심지어 이 섬뜩한 가해에 제3자가 아닌 유가족이 가세하기도 한다. “은하계에는 사람이 많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이며 “블랙홀 발전기를 만들기 위해 떠나간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에선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위험하기는 하지만, 살아만 돌아오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발전기 건설에 목숨을 건 이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샤유 작가는 그들의 죽음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독자가 오래 머물도록 한다. 그들의 죽음에는 일정 분량 모두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렇기에 이 소설의 결말은 의아하다. 민주가 오가노이드라면, 그런 이유로 그녀가 죽지 않는다면 수백만 명의 죽음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사랑’으로 점철된 마지막에서 차곡차곡 쌓아둔 앞의 진행이 조금씩 흔들린다. 민주를 죽이지 못한 채, 너무 쉬운 방식으로 복수를 미뤄두고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서린의 목소리는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서린이 민주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둘이 결혼을 한다면 속죄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 소설에서 작가가 끈질기게 주목하던 약자들은 사랑한다는 한 마디에 흩어진다. 그 끝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전기를 만든 한 사람과 그녀의 꿈을 이루어준 애인만이 남는다. 단순한 사랑 고백으로 마무리하기에는 앞에 쌓아둔 생명이 너무 많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다. 서린과 민주의 사랑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지속될 수는 없을까.
찰나의 사랑으로 영원의 속죄를 하려는 것은 죽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소설 안에서 사람이 죽는 건 간단한 사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민주와 서린의 사랑을 완성하는 건 결말을 향한 단순한 고민보다 한 차원 높은 문제다. 나는 그것이 수백만 개개인의 입장에서 고려되었으면 한다. 서린이 민주의 청혼을 한 번 유보하는 중반부의 장면은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아직 둘의 사랑이 미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말부의 사랑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죄가 그들의 앞에 있다. 순식간에 증발한 수백만의 목숨 앞에서 서린과 민주는 어떤 고통스러운 방식의 사랑을 이어가야 할까. 아직,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재해와 그 안에 사라진 이들의 명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사랑이 최선은 아니리라는 생각도 든다. 찰나의 사랑 안에는 숙제처럼 남은 속죄가 있다.
서린이 동경한 영원은 무엇이었을까. 모쪼록 그것이 억울한 이 없는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완벽하거나 깔끔하지는 않을 수 있다. 아니, 완벽하거나 깔끔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세상의 지속을 위해서는 쓴 눈물보다 화해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곳은 미래이니, 무엇이든 가능한 작가의 상상 속이니.
마치며
샤유 작가의 이 소설은 분명히 괜찮은 SF다. 세계관과 인물의 설정 면에서는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다. 이 만족스러운 세계의 보완과 지속을 위해서는 구체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시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할까. 공간은 얼마나 넓으며 그들에게 ‘시간’이란 어떤 속도로 흐르고 있을까. 수백만이 한 프로젝트를 맡은 노동자의 0.3퍼센트라면 이 미래에는 얼마나 많은 개인의 서사가 존재할까. 지구를 벗어난 우주는 광활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제한하지 말자. 과학적 상상력과 드넓은 스페이스가 있다면 그 안에는 다양한 사랑의 유형이 있을 것이다.
민주와 서린의 세계에서 더 많은 복작거림이 발생하기를 바란다. 더 많은 희노애락이 샤유 작가만의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최선의 방식으로 사랑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때로 억울한 누군가에게 집중하는 작가의 눈이 더 온화해지는 동시에 불의한 세상을 향해서는 날카로워지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