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것.’ 다소 냉소적이지만 사실이다. 멀리서 보면 인생은 정도와 높이의 차이만 있을 뿐 다 비슷비슷하다. 그렇다고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태어나서 죽는 것이라는 문장 중간에 생략된 말이 있다. 삶에서 출발해서 죽음에 닿을 때까지의 과정. 삶은 결과가 아닌 과정을 통해 의미가 생긴다.
‘이것이 현실이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현실은 기계처럼 냉혹하고 사람은 생존을 위해 실리만 챙기는 동물처럼 들린다. 그런데 사람은 의외로 추상적인 목표를 두고 살아간다. 누구는 사람을 ‘울리는’ 소설을 쓰고 싶고, 누구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말한다. 울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행복은 어떻게 측정하는가? 현실에 사는 사람이 한 말 치고는 우습다. 더 우스운 것은 사람은 타인의 추상적인 목표를 들었을 때 웃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응원한다. 목표가 특이해서 이해하지 못해도 그런가 보다 하지 비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생을 인도하여 과정을 만들어내는 목표가 없다면 인생이 무위하다는 사실을 동의하기 때문이다.
‘얀’의 죽음은 허무하지 않다. 어릴 적 뇌리에 박힌 파도를 다시 한번 보려다가 죽었으니까. 파도가 목숨을 걸 만큼 가치가 있다고, 얀의 죽음은 개죽음이 아니라고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삶에서 출발해서 죽음에 닿는 과정은 맹목적이고 비논리적이다. 정도만 다를 뿐이다. 본인이 진심으로 원했다면 그것으로 무엇이든 다 성립된다.
아마도 얀의 친구들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 뜻을 가진 어린 새싹들은 장례식은 친우의 것이 아니라 가족의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어리고 죽음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무의식중에서는 동의할 것이다. 허망하게 죽은 얀의 장례식을 치르고 왔는데, 카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카일은 살아남은 얀이다. 카일은 조상의 계보를 알고 싶어서 덜 얼은 호수를 횡단하는 인간이다. 친구들은 의미 있게 살아가는 얀에 이끌렸듯 카일에게도 호감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다. 얀과 카일은 똑바로 사는 인간이니까.
인생은 시시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인생이 걸어온 길은 찬란하다. 모순되는 인생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인생은 말도 안 되는 거대한 파도와 호수 중앙에 가라앉은 트럭처럼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질서와 규칙이 있는 것 같은데, 어제까지 농담을 나눈 친구가 급사하는 게 인생이다. 어쩌겠는가. 인생이 그렇다. 우리는 주어진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갈 길을 가야 한다. 320킬로미터보다 더 멀리. 죽음에 도달하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