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적들(Friendly Enemies)’에 대하여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보호구역 (작가: 빗물, 작품정보)
리뷰어: NahrDijla, 22년 2월, 조회 66

친밀한 적들(Friendly Enemies)

 

 

“그럼, 진짜 사람은 때리고 죽여도 되는 거지요?”

강아지 인형과 사림 인형에 대한 폭력은 작품의 위기감을 고조하는 동시에 상우의 상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다소 불안에 가득찬 묘사들은 상우의 태생이 난폭한 것이 아닌 그 이면에 무언가 일어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 ‘친밀한 적들’이 있다면 어떨까. 그 서글픈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 이 소설의 주된 골자이다.

 

“일한 만큼 시급 계산해서 달라고 연락만 했어 봐. 찾아내서는 아주 그냥 후회하게 만들어줬을 텐데. 그러질 않았으니 봐주고 넘어간 거지.”

그 다음으로 제시되는 이 말은, 언 듯 보기엔 근로 계약서조차 쓰지 않은 심성 나쁜 사장의 협박으로 들린다. 하지만 철저하게 방관하는 태도를 지닌 사장의 태도와 합쳐 볼 땐 어떨까. 이 이야기는 돈을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로는 들리지 않는다. 봐주고 넘어갔다는 말은 무언가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사장이 방관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방관했다는 것일까. 아마도 후반부 밝혀지는 아동 폭력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하는 게 과연 비약일까.

 

“선생님이 찾아줄 때까지 숨어 있었지.”

현실일지 환상일지 모를 공간 속에서 남자 입에는 남자 인형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 남자에게서는 생선 썩는 냄새가 났다. 아마도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 남자가 죽어 있다고 명시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생선 썩는 냄새를 풍기는 ‘친밀한 적들’이기에, 생선 썩는 냄새는 피해자들에게 각인된다. 생선 썩는 냄새 역시 살아있을 적에는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주술적으로도 보이는 이 장면은 친밀한 적들의 상징이 남성성으로 집약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친밀한 적들이 남성성을 띄는 이유는, 가부장적 질서의 현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근본적인 위계의 정치 속에서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며 결국 비극의 전모가 드러난다.

 

‘아이와 어른이 손을 잡고 들어가 문을 닫으면, 누구도 찾지 않는 시간이 시작된다.’

표현은 중층적으로 구성된다. 주인공과 상우의 시간은 환상성 아래 현실로 침잠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상처로 말미암아 과거로 집약된다. 누구도 찾지 않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은, 누구에게 의지하지 못한 채 아이 홀로 온전히 그 시간을 견뎌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아이가 홀로 견뎌야 하는 시간, 무엇이 벌어졌고, 무엇이 일어나는 가를 따지는 것은 참혹하다.

이 지점에서, ‘몸으로 밀면 열려야 할 유리문이 열리지 않았다’ 라며, 주인공이 공간 안에 갇힌 듯 묘사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어른인 내가 아이의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자신 역시 아동 폭력의 대상자였음을 자각하는 일이다. 이 자각 속에서 소설의 도식은 아이 – 남자 어른으로 양분 된다. 내가 여자 어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 도식의 목격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의 폐해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도식은 어른인 ‘나’가 비단 소설 속 자아인 ‘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아동 폭력의 피해자로서 성장한 ‘우리’로 확장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상우를 연민 하지 않는다. ‘상우가 파고든 가슴팍 위로 진득하게 피가 묻어나는’ 일은 이 중층적인 구성 속에서 피해자로서의 ‘나’로 귀결되어 모든 것들을 고발하려는 위상으로 치환된다.  

 

결론적으로 <보호구역>은 참혹한 현실을 조망하는 호러 소설이다.

물론 단순 르포 소설이라고 한다면 호러 소설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닌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강조함과 동시에 시간을 중층적으로 구성한 환상성 속에서 호러적인 이미지를 구현함으로써 공포를 완성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비극 그 자체를 조망함과 동시에 연민 보다는 유대에 관점을 둔 소설이라는 점에서 뜻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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