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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작품: 진달래 선비 (작가: 유권조, 작품정보)
리뷰어: 일월명, 22년 1월, 조회 88

글을 열며

장르 소설을 읽는 두 가지 요령이 있다. 하나는 작품의 서사와 코드를 분석하여 그것이 장르의 계보 상 어디에 위치하는지 구체적인 좌표를 명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작품이 기존의 도식을 얼마나 세련되게 비틀었는지를 따져 그것이 획득한 참신함을 규명하는 것이다. 전자는 장르 문학의 기반 개념을 견고히 다지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후자는 장르 독해의 고착화를 견제하여 담론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각각 유효한 비평적 시각이다.

헌데 간혹 두 방식 중 어느 쪽으로도 영 읽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보편화된 소설의 형태에서 이탈하려는 텍스트들, 장르 문법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를 서사의 핵으로 삼는 글들 말이다. 이러한 창작물들은 장르와 소설의 기존 정의에 불응함으로써 소설 혹은 장르의 정의에 대한, 나아가 장르 소설의 범주 확장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데 문학적 의의를 둔다.

독자가 그것들을 단지 낯설다며 외면하지 않고 하나의 작품으로 수용할 수만 있다면, 미사여구로나 쓰이던 ‘전에 없던 장르 소설의 탄생’을 정말로 목도하는 행운을 누릴지도 모른다. 그 순간이야말로 비평가가 손에 익은 두 자루의 칼 대신 상상력과 융통성을 발휘할 때이리라.

『진달래 선비』를 읽고 작품보다 더 긴 글로 두 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이것을 소설로 읽을 수 있는가. 장르로 읽을 수 있는가.

 

201. 견문록. 200.

『진달래 선비』의 작품 소개 문구는 “201자로 쓰인 이야기들”인데, 왜 하필 201자냐면 그게 작품이 연재된 브릿G 플랫폼이 요구하는 최소 분량이기 때문이다. 즉 『진달래 선비』엔 ‘주어진 조건 내에서 가장 적은 분량’이라는 제약이 걸려 있다.

짧은 소설은 얕은 호흡, 정제된 어휘와 문체, 일목요연한 스토리라는 특징을 수반한다. 때로는 문장의 육하원칙과 서사의 기승전결을 과감히 버리기도 한다. 주의할 점은 이런 미니멀한 형식은 으레 독서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축약과 생략이 많은 소설은 고맥락적이 되며, 그로 인해 감춰진 서사의 공백을 메울 책임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가된다. 짧은 소설의 고급독자가 적은 건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분량이 적은 글이 소설로 받아들여지려면 읽는 이의 피로를 덜어줄 보조장치가 필요하다.

이 작품을 지탱하는 장치는 견문록이라는 외형 양식이다. 견문록은 ‘서술자가 낯선 장소를 여행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다른 이에게 전달한다.’는 취지를 지닌다. 이를 아는 수용자라면 같은 기제로 쓰인 텍스트가 비일상적인 상황을 다룬다는 것을, 서술자 주체의 감상보다는 사물․객체․풍경 묘사에 품을 들인다는 것을, 이를 통해 낯선 무언가를 마주하는 즐거움을 독자와 공유하고자 한다는 걸 자연히 예측할 수 있다. 양식에 대한 사전정보는 짧은 글의 단점을 매끄럽게 보완하고 작품을 향유하는 방안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논픽션의 구조를 빌리는 『진달래 선비』의 형식 실험은 소설이 정형을 통해 작품 내․외적으로 얻는 효과를 보여준다.

아울러 여행을 통한 서술자의 시간적․공간적 이동은 이 글이 소설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서사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정작 작품을 읽을 때는 그 속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진달래 선비』의 다소 특이한 플롯 때문이다. 1화 「진달래 흐드러진 날」에는 서술자인 선비가 ‘진달래 선비’라 불리게 된 이유가 나온다.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진달래 흐드러진 날 돌아왔기에, 사람들은 그를 진달래 선비라 불렀다.

 

여기엔 여정의 시작과 끝이 명시되어 있다. 즉 ‘진달래 선비’의 이야기는 작품 도입에서 불완전하게나마 완결된 상태다. 이후 이어지는 98편의 독립된 에피소드는 모두 1화에서 생략된 ‘서’의 줄거리, ‘선비가 여행서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에 대한 각각의 답이다.

병렬식 액자 구성은 액자 속 내용과 순서를 취사선택하는 독특한 독서를 가능케 한다. 읽는 이의 기호에 따라 98!로 변하는 『진달래 선비』의 스토리는 일종의 오락성을 자아낸다. 『진정한 의미의 ―』시리즈서부터 이어지는, 소설과 게임의 교집합에 대한 유권조 작가의 탐구가 이룬 또 하나의 성과다.

 

독창적 환상 세계를 담는 선비의 시선

선비의 여로를 따라 펼쳐지는 풍경도 작품에 매력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작품의 배경은 동양이 아니다. 동북아 문화권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 동양풍 판타지 장르를 생각했다가는 당장 2화에 등장하는 핏물과 불을 뿜는 용의 모습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작품을 동․서양 판타지 중 어느 한 장르로 귀속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선비가 여행하는 세계는 숲과 산, 바다와 사막에 이르기까지 광활하고 다채로우며, 그 속은 인류가 공유하는 신화원형에 뿌리를 둔 상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작품의 결이 구비문학과 비슷하다 여겨지는 건 이 때문이다. 『진달래 선비』는 장르 문법, 즉 문명과 이성으로 재단되지 않은 영역을 탐방한다.

이 독창적이고 범문화적인 환상계를 동양처럼 보이게 하는 이는 다름 아닌 선비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진달래 선비의 견문록이다. 고즈넉한 곳에서 스스로를 돌보며 시간을 보내는 늙은 선비. 독자는 그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본다. 작가가 직접 창작했을, 그렇기에 아직 아무도 무엇인지 모르는 피조물들은 첫 발견자인 선비가 ‘사시랑이’, ‘치룽구니’, ‘고삭부리’와 같은 우리말 이름으로 명명함으로써 비로소 몬스터, 프릭이 아닌 요괴, 영수로 정의된다.

한 음절도 허투루 쓰이지 않은 정갈한 고유어 단어와 섬세한 묘사는 작가가 치밀하게 고민해 쌓아 올린 결과인 동시에 선비가 구사하는 일상어이기도 하다. 『진달래 선비』의 세상은 관찰자의 언어에 맞춰 ‘동양적’으로 재구성되어 독자에게 전달되는 셈이다. 조금 더 상상을 보태어, 이 작품 자체가 그가 열흘에 사흘 동안 집필한다는 책이라 추론하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경계를 유랑하며 봄을 향하는 여정

그렇다면 선비가 아름다운 언어로 전하는 세상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무엇을 눈여겨 살피고 또 기억하는가.

언덕을 낀 작은 집에서 늙어가는 선비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생활반경 바깥의 넓은 세상이 이상적이지 않으리라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지식인에게 있어 안분지족의 삶은, 뜻을 바르게 펼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지키기 위한 자발적 도피 행위니까. 환상 세계로의 여정은 본래 속한 세계의 변방으로 쫓겨나온 선비가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 혹은 피안을 찾는 긴 방황의 과정으로도 읽힌다.

아쉽게도 선비의 발길이 닿는 곳은 딱히 안락한 공간이 아니다. 그 양상이 다를 뿐 환상 세계에서도 시기 다툼은 일어나고, 이기심과 증오로 누군가 고통받고, 개인의 역량으로 극복할 수 없는 두려운 것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선비의 성정이 유독 다정하고 여린 탓에 그런 모습만 눈에 밟힌 걸 수도 있다. 자신이 어찌하지 못할 다양한 아픔을 보고 들으며 그는 또다시 무력감을 느꼈을지도, 그래서 먼 길을 헤매며 겪은 일들을 남에게 알리는 대신 홀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비가 여행한 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는 환상 세계에서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담담히 살핀다. 현실과 거울상을 이루는 환상 세계의 일들은 곧 현실 세계서 마주치는 비슷한 사건에 대한 사유를 환기한다. 이 낯설게 보기는 때로 무감각해져 있던 일상의 문제를 직시하게 한다. 그건 여행의 순기능이기도, 문학의 순기능이기도 하다.

선비가 여행의 끝에서 얻은 것은, 독자가 이 작품을 통해 얻은 것과 닮았으리라. 작품 말미의 흐무러지는 진달래는 선비와 함께 지난한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들을 위한 작가의 헌화다. 길고 시린 계절을 통과하며 쌓인 경험은, 그것을 겪은 모든 이들의 삶 속에서 꽃내음을 닮은 귀한 깨달음으로 다시 태어난다.

 

글을 닫으며, 경계를 탐험하는 이들에게

형식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진달래 선비』는 낯설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소설인가? 그렇다. 장르적인가? 환상성을 획득했냐는 질문이라면 역시 그렇다. 재미있나? 물론이다.

그럼 『진달래 선비』는 장르 소설이 될 수 있는가? 내재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작품 외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회의적인 결론을 내게 된다.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가 하나같이 활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달래 선비』를 이을 새로운 작품이 나올까? 글쎄, 유권조 작가가 자기복제를 하지 않는 한 힘들 듯 하다. 재해석되지 않는 스타일은 놀랍도록 빨리 사람들에게 잊힌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창작물이 군계일학이 되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진달래 선비』는 호들갑을 떨어서라도 지지할 가치가 있다. 장르 소설의 범주를 넓히는 건 바로 이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가능성을 품은 작품에 기대를 거는 건 실제로도 꽤 즐거운 작업이다. 같이 떠들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글을 닫으며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가 포용할 수 있는 형태와 내용의 한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무엇이 장르 소설로 읽힐 수 있는가. 무엇이든 장르 소설이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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