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상상하는 일은 낭만적이다. 세상이 망할 거라는 예감은 현재의 고통이 영원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믿음, 나를 억압하는 것들이 사라졌으면 하는 소망과 궤를 같이 한다. 종말은 세계와의 갈등을 봉합할 여력이 없는 개인의 불온한 심상을 폭로한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다 끝내는 게 낫지 않아?’
깊은 저 바닷속 멋진 신세계
이러한 비관적 세계 인식은 아포칼립스/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허들을 높이는 요인이다. 죽음은 단순히 인식하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터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이기기 위해, 종말의 서사는 그 원인이 납득 가능해야 한다. 세계가 망하는 이야기는 망할 만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전 세기 사람들이 운석과 외계인, 거대한 괴수 같은 공동체 외부의 위협, 혹은 미치광이 독재자의 손에 들린 핵무기 발사 버튼으로 상징되는 광기에 의해 인류 문명이 돌연히 무너지는 걸 상상했다면, 근래 두드러지게 언급되는 종말의 원인은 죽어가는 지구다. 온난화를 해결하려다 역으로 얼어붙은 세상. 모래폭풍과 병충해로 식량과 산소가 고갈되어 가는 삭막한 땅.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한 모행성의 이미지 아래에는 인류세에 대한 부채 의식이 깔려 있다. 「해저도시 타코야끼」의 죽은 바다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서 인간은 다른 행성으로 탈출하지도 못하고 깊은 바닷속으로 도망친다. 해저도시는 두 겹의 돔으로 덮여 있다. 바깥의 돔은 언제든 도시를 수장시키려 드는 바닷물을 막고, 안쪽의 돔은 얼마 안 남은 자원이 낭비되는 것을 막는다.
안과 밖을 차단하는 두 개의 동심원은 불균형을 야기한다. 사람들은 중심부와 테두리 중 어느 쪽에 더 가깝냐에 따라 철저히 계급화된다. 에너지로 대표되는 물질적 풍요는 돔 안의 돔에 속한 이들이 존속하는 데 바쳐진다. 나머지 사람들은 돔 외부로 새어 나오는 빛으로나마 도시가 아직 제 기능을 잃지 않았음을 확인할 뿐이며, 그보다도 먼 외곽 지역에서는 수명, 신체기능, 욕망을 효율적으로 개량한 인조인간인 청소부들이 해저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기능한다. 인간의 도구화에 대한 윤리적 거부감을 억누르는 건 소마와 섹스도, 핵무기와 헝거 게임도 아닌 유리판 너머의 새까만 바다다. 생존의 문제 앞에서 인간성을 향한 의지가 무력해지는 순간은 우리 시대가 공유하는 익숙한 두려움이다.
인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죽음과 생명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지만, 그뿐이다.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도시가 수장되지 않게끔 바깥 돔의 물때를 제때 닦는 것밖에 없다. 내일을 도모할 여유도 없이 연명하는 데 급급한 해저도시 태양. 도시의 이름은 깊이도 모를 물속에 가라앉은 이 테라리움에 죽어가는 항성계의 이미지를 덧씌워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어떤 끝이 도래할지 짐작이 간다. 에너지가 고갈되고, 마지막 인간이 어둠과 외로움 속에서 죽고, 텅 빈 돔 안에 오염된 바닷물이 차오른 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고 말하는 결말. 그걸로 괜찮을까? 그 어떤 죄책감과 두려움도 끝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비참한 미래상에도 이 이야기는 악화일로가 아니다. 아주 작은 틈만 생긴다면, 해저도시의 말로는 적어도 이보다는 낭만적일 수 있으리라. 빛나는 꽃 한 송이, 따끈하고 녹진한 타코야끼 한 알만으로도.
태양과 달과 문과 문어
이 바닷속 멋진 신세계의 엡실론인 돔 청소부 문-AT0914은 현대의 우리와 비슷한 인간성을 지닌다. 그들의 재료인 죽은 청소부들의 유전자에 구시대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저도시의 누구도 본 적 없는 지상에서의 삶이, 실존을 인정받지 못한 존재의 무의식을 통해 파편으로나마 보전된다는 설정은 아이러니하다. 자연, 예술, 관계를 향한 노스텔지어는 문이 인위적으로 주입된 자신의 본능에 저항하게 만든다. 청소구역 유리 벽에 뿌리내린 섬세하고 여린 빛을 지키기로 마음먹는 문의 선택은 그가 품은 반항하는 인간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이 해저도시의 껍데기를 부숴 바깥의 생명을 들여보내는 내부자라면 루나는 경직된 질서에 속에 갇힌 도시의 인간성을 흔들어 깨우는 침입자다. 이방인인 그는 도시를 유지하는 규칙에 연연하지 않는다. 트럭은 응당 중심부에만 머물러야 할 온기를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나눠주며 돔 전역을 돌아다닌다. 루나는 그 어떤 물질적인 보상도 바라지 않기에 손님들 간에 계급적 차이는 무의미하다. 어둡고 추운 거리를 밝히는 이 심야식당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존재하는 기묘한 소우주를 형성한다.
꽃과 트럭과 빛은 상동 관계다. 그 시작점과 방향이 다를 뿐, 두 주인공의 행동은 해저도시가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고 싶다는 공통의 목적을 둔다. 돔 안팎으로 일어나는 두 별개의 이변은 문이 루나를 만나 자신의 이름과 비밀을 고백하는 순간 한 줄기로 이어진다.(그런 면에서 그의 이름은 단절된 두 공간을 다시 연결하는 통로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팔을 잃어도 몇 번이고 끈질기게 회복하는 문어와 태양 빛이 닿지 않는 밤하늘을 밝히는 달은 둥그렇고 따끈따끈한 타코야끼라는 상징물로 어우러지며 하나의 명확한 희망으로 탈바꿈한다.
관계, 전복, 재생의 서사―아포칼립스의 숨겨진 욕망
그러니 태양은 타코야끼 한 알 때문에 망하는 거라 표현해도 좋을 테다.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두 사람의 타코야끼 트럭이 달리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다.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도 몰랐던 이들은 결핍을 채워주는 낯선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과한 욕심을 부리고, 돔 안의 돔의 사람들은 때아닌 혼란을 일으키는 문과 루나를 결국 떼어놓는다. 죽어가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해저도시의 관성은 거스르려 할수록 점점 더 강해지며 두 주인공과 마지막까지 갈등한다. 그러다 마침내 문과 루나가 지켜낸 비밀이 돔 안을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바다로 가득 채우는 순간, 작품을 지탱해오던 팽팽한 긴장감은 일순 해방감으로 승화하여 독자에게 경쾌하고 따스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작품을 구상하는 동안 늘 같은 결말을 염두하고 있었다는 작가의 사설이 십분 이해 간다. 문과 루나와 태양의 사람들 모두에게 이보다 아름다운 재출발을 찾아주기는 쉽지 않을 테다. 다만 마지막까지 문이 인간과 바다를 양분해 인식하는 대목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가 단절되어 일어난 비극을 다시금 단절로 해결하겠다는 논조는 비록 캐릭터의 단편적인 생각이더라도 독해에 혼선을 주기 때문이다.
「해저도시 타코야끼」는 아포칼립스 서사의 진정한 매력이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아닌 그 뒤에 당도할 재생의 기쁨에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망할 만한 세계가 망한 뒤 그 자리에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이야기. 이 소설은 오래된 태양이 지고 새로운 빛이 떠오르는 창조 신화이기도 하다. 반짝이는 생명으로 가득 찬 돔을 멀리서 본다면 갓 구운 타코야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